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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한도와 추사체가 탄생된 까닭 ①

외로운 귀양지에서 조선의 걸작을 완성한 추사 김정희

by 박필우입니다




정녕 꿈이었다. 유배에 관한 원고를 의뢰받고, 짧은 지식을 한탄하며 인물에 대해 새롭게 자료를 찾고 필기하듯 공부를 하면서 꾼 꿈은 대책 없이 손을 놓고 있던 필자에겐 반갑고 고마운 것일 수밖에 없었다.

그렇게 꿈에서 만난 인물이 바로 광해군이었으며, 이어 두 번째 만난 인물이 추사였다. 그만큼 내 심적 부담이 컸었다는 방증이지만, 잠들기 전까지 스토리를 상상하며 다듬는 과정에서 이어지는 현실과 꿈의 중간 형태인 선잠에서 나타난 현상일 수 있었다.


이토록 선명하다는 것은 유난히 그분들에 관해 집착의 도가 지나쳤거나, 평소 욕심이 넘친 결과라 자위한다. 마치 추사선생이 연경의 옹방강翁方綱을 심히 사모한 나머지 꿈속에서 그를 만났듯 말이다.


푸른 물결이 몰려왔다. 포말로 부서지며 사라지는 제주 서귀포의 바다였다. 때마침 안개보다는 굵고 가랑비 보다 가는 는개가 내리고 있었고, 바다에서 짠 바람이 불어왔다. 순간 머리에 삿갓을 쓰고, 몸에는 띠도롱이 비옷을 두른 채 바다를 향해 하염없이 서 있는 남자가 눈에 띄었다. 망부석이거나, 세상을 등진 자, 세상 끝에선 산자의 고독을 즐기는 듯하였다. 꼿꼿한 뒷모습에서 어딘지 모를 외로움이 묻어났다.


순간 그가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1786~1856) 선생이라고 직감하였다. 분명 그것은 필자가 만들어 낸 가공의 연출이었고 인공적이었지만, 온 몸의 감각이 총 출동되어 현실이 되는 순간이었다.

반가움에 모래와 자갈이 반반인 해변을 가로질러 그 옆에 섰다. 그러나 인기척에도 아무 관심 없는 듯 미동도 없었다. 하지만 옆모습을 훔쳐본 필자는 소치小癡가 그렸다는 추사선생의 그림을 몇 번이고 보아온 터라 그 분이 바로 추사 김정희 선생이라고 확신했다.


역시 당대의 금석학자요, 문인화의 대가다운 풍모가 엿보였다. 비록 유배의 몸이긴 하나 경주김씨 사대부가의 흩트림 없는 형형한 기상만큼은 살아있었다. 필자는 반가운 나머지 선생의 시야를 가로막고 넙죽 큰 절을 올렸다. 그때였다. 석상처럼 굳었던 몸이 움직였다. 놀라는 기색도 없었다. 지긋하게 상대의 눈을 들여다보며 입을 열었다.


“어디서 온 선비님이신지요? 그 행색의 꼴은 또 무엇인지요?”

후대 세상에서 꿈을 만들어 찾아온 필자에게 놀란 듯 한꺼번에 질문해왔다.


“예, 소생은 평소 선생님을 흠모하여 늘 그리워하다, 그 도가 지나치고 보니 이렇게 꿈을 만들어 쫓아온 것입니다. 비록 행색은 상머슴 뒷간 청소부처럼 생겼지만 심성만은 그렇지가 않습니다. 그러하니 놀라게 해드렸다면 용서하십시오. 안정하시고, 제가 배움에 한 발짝 다가설 수 있도록 허락해 주십시오!”

하고는 땅 속에 들어가기라도 하듯 고개를 처박았다.


“허허! 이 세상 사연들과 이별하고, 현실과 단절되어 비천한 인생을 구걸하는 이 몸에게 무엇을 배울 것이 있겠소? 그러하니 부디 한 달에 한 번 초옥을 벗어난 내 사색의 귀한 시간을 방해하지 마시고 돌아가시길 간곡히 권하오.”


아뿔싸! 추사 선생 사색의 시간을 방해한 것인가? 결국 한 번에 거절을 당해 버렸다. 그러나 이렇게 꿈까지 만들어 온 필자는 그냥 곱게 물러설 수 없다. 허나 지금 당장에야 물러설 도리밖에 없었다. 무작정 밀어붙였다간 먹도둑놈 같은 인상에 버르장머리까지 없는 놈이라고 애초 치부해 버리면 낭패도 이런 낭패가 없었다.

단지 ‘예~!’ 하고 뒷걸음으로 십여 족장 물러서서 그를 향해 읍소해 있었을 뿐이었다. 유비가 제갈량을 얻기 위해 삼고초려 했건만, 감히 추사 선생님의 가르침을 받는다는 것이 어디 쉬운 일이던가.

*



추사 김정희. 이한철(李漢喆) 등이 그린 초상화.


일각(약 15분)을 그렇게 바람과 비를 맞으며 서 있던 추사는 천천히 몸을 돌렸다. 그러고 이내 멀리 떨어져 읍소하고 있는 필자와 눈길이 마주쳤다. 긍정의 변화를 읽었다. 묘한 표정을 던지고는 앞서서 걷기 시작했던 것이다. 처음 냉랭하기만 한 표정과 달리 은근한 정감이 서려있었으니, 필자에게 얼마간 마음을 열어 준 것이라 서둘러 생각하며, 쫄래쫄래 뒤를 따르기 시작했다.


벌레들에게 고문당했던 힘겨운 여름을 넘기고, 이제 막 서늘한 바람이 불어오기 시작한 가을의 초입, 추사 선생의 적소 탱자나무 울타리에 돋아난 가시는 가슴에 비수를 겨누듯 기상을 떨치고 있었고, 작은 초옥은 그 속에 초라하게 놓여있었다.


띠도롱이와 삿갓을 벗은 선생은 옷에 묻은 물기를 툴툴 털고는 방으로 들어섰다. 그리고 천천히 화로에 은근하게 남은 숯불에 찻물을 올렸다. 이때 마당에서 고개 숙인 채 읍소해 있던 필자를 향해 들어서라 손짓했다. 아! 드디어 대화의 물꼬가 트이려나 보다 했다.

한 평 남짓한 방으로 들어서서 무릎을 꿇고 조심스레 앉았다. 방 한쪽 구석에는 서책들이 높게 벽을 이루며 쌓여있어 귀양살이를 책과 함께 지내고 있다는 것을 알 수 있었다. 그 아래 바닥에는 붓끝이 닳은 몽당붓 수백자루와 함께 옆으로 밑창 난 벼루가 벽돌처럼 수북이 쌓였다. 그동안 얼마나 많은 시간을 글로써 보냈었음을 짐작할 수 있었다.


그때였다. 방안을 두리번거리던 필자에게 선생이 말을 꺼냈다.

“어찌 선비께서 이렇게 나를 불편하게 하시오? 그렇게 조심스레 앉아 있다면 내 마음이 얼마나 불편하겠소? 그러하니 편하게 앉으시지요.”


“하! 선비라니요? 언감생심 당치않습니다. 저는 겨우 제 이름 석자나 쓸 줄 아는 저자거리 장돌뱅이 옵니다. 그리고 말씀을 낮추시지요. 이곳 선비들처럼 저 또한 선생님을 존경하여 이리 불쑥 찾아 들어 무례를 범하니, 마음이 불편하긴 매 마찬가지입니다. 그러하니 편히 말씀해 주십시오.”


“허허! 참 내, 별 이상하게 대화를 엮어 가시려 하는구려. 그래 처량한 신세가 된 이 몸에게 무엇이 그리 궁금하며 또 무엇을 알고 싶다는 것이오?”


“처량하다 하셨는데, 유배의 몸이라고 하여도 사람의 정신까지 가둬놓을 순 없지 않습니까. 마음을 다스리고, 그동안의 세상살이를 되돌아보며 인내하고 또 지혜로 억울한 유배의 사연은 이미 저 먼 바다로 흘려보내지 않으셨습니까? 그러하니 그 정신을 맑게 승화하여 주옥같은 사상들이 작품으로 남겨져 후대에 칭송과 존경의 대상이 되는 분이시니, 고독한 삶에서 치열하게 고뇌해 얻는 앎이 진정한 사유의 원인이 아니겠습니까?”


“음……, 내 아직 배움이 모자라고, 또한 앎에 대한 욕심까지도 버린 지 오래건만 후대의 칭송이라니? 부끄럽기 짝이 없습니다.”


“아닙니다. 귀양살이에 갇힌 몸이라지만, 그 시간을 귀히 여겨 수많은 작품을 남기지 않았습니까. 선대로 서포 선생께서는 병환의 몸을 이끌고서 《구운몽》과 《사씨남정기》를 비롯하여 《서포만필》 등 많은 글을 남겨 후대 세상에 전해주셨으며, 송강 선생께서는 우리 한글을 한층 더 아름답게 만든 ‘사미인곡’을 포함하여 주옥같은 작품을 고향에서 남겼습니다. 또한 가까이로는 선생님과 인연이 각별한 다산선생께서 백성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시고 집필하신 《경세유표》, 《목민심서》, 《흠흠신서》 등은 그 사상과 정신세계를 온 세상 사람들이 칭송하고 있습니다. 뿐이옵니까? 이 나라 조선 건국이념을 완성한 삼봉 정도전은 유배생활 중에 직접 목격한 이 나라 백성의 곤궁한 삶에서 자신의 정치철학을 완성시키지 않았습니까? 그러하니 절대고독 속 유배 삶이 당사자에겐 고통의 시간이요, 절망과 시련의 시간이라 할지라도, 그것으로 인해 정신세계가 더욱더 견고해 지는 것이 아니겠습니까. 그 뿐이 아닙니다. 유배지란 한양에서 멀리 떨어진 벽진 곳이기 마련인데, 선생님처럼 유배 온 분들에 의해 그곳에 새로운 학문과 문화를 전수해 주는 역할로 소외되었던 지방의 문화가 한층 더 발전하는 계기가 되는 것이니, 선생님 역시 강도혼, 이시형을 비롯하여 박혜백 등 많은 제자들을 이곳 제주에서 길러내지 않습니까.”


온갖 정보를 머리에 장착한 필자의 장황한 말이 이어지자 선생의 눈빛은 어딘지 모를 확신에 찬 모습으로 변해 있었다. 이상하게 생긴 반백의 서생과 시간을 함께 보내도 그리 손해될 것이 없다는 듯 보였던 것이다.

찻물이 끓기 시작하자 선생이 천천히 차를 다려 권했다. 분명 초의선사가 벗 추사선생께 보낸 것이 틀림이 없었다. 필자는 은은한 차향에 황홀한 마음이 되었다. 보이차, 세작, 말차 숙병 뽕잎차 등등 가끔 즐기는 편이지만, 그토록 그리워하던 추사 선생과 마주하니, 한 잔의 차가 우주를 관통하는 듯 번잡한 마음을 가지런히 하게 했다.


그러나 필자와는 달리 기력이 쇠진해 가는 추사 선생의 모습이 안타까웠다. 심히 피곤하게 해 드리는 것이 아닌가 싶어 조심스러울 수밖에 없었다. 조용히 이상하게 생긴 놈이 토해낸 열변을 듣고 있던 선생이 힘겹게 웃으며 답했다.



추사 선생의 '불이선란도'


“말씀이 하나도 틀리지 않습니다만, 한 치 앞날을 가늠할 수 없는 시간 속에 잊혀져가는 사람의 서글픔이란 이루 헤아릴 수 없는 법인데, 마치 그 모든 것을 다 아는 양 이야기 하십니다.”


“그리 들렸다면 사죄드리겠습니다. 그러나 잊혀가지만, 고난의 시간 속에서 시류에 영합하는 인간들을 가려내고, 또 벗의 진정성을 알 수 있는 것 아니겠습니까?”

추사 선생의 눈빛이 밝아지며 입을 열었다.


“그렇습니다. 권력과 이익을 바라고 뭉친 자들일수록 그것이 다했다 생각하면 그들의 관계란 한낱 물거품처럼 흩어지는 것이니, 먼저 간 나의 벗 황산과 이재, 그리고 항상 감사히 여기는 우선藕船의 우정은 내 어떤 정성으로도 다 보답할 수 없는 진실로 참된 관계라 할 수 있습니다.”

그렇게 말하는 선생의 얼굴이 회상에 잠기는 듯 잔잔하게 변했다. 고개를 숙여 느리게 찻잔을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때를 노칠 수 없다.


“그런데 선생님 궁금해 왔던 것이 있는데, 그렇게 서로 인장까지 보관하며 벗했던 황산 선생이 말년에 선생님과 소원했던 연유가 무엇입니까?”

“선비께서 그런 것까지 알고 계신단 말입니까? 이거 정신을 제대로 잡지 않으면 된통 당하겠습니다 그려. 저도 그것이 궁금합니다. 정치적 시비를 떠나 서화를 함께 감상하며 논했고, 고금에 대해서도 나누며 보낸 시간들이 참으로 아름다웠었는데, 말년에 나도 모르게 어떤 오해를 불러일으킨 것이 아닌가 합니다!”

“미천한 제 시각입니다만, 혹여 당대 세도가 김조순의 아들인 황산께서 곤란한 처지에 몰린 선생님을 도울 길 없어 일부러 그렇게 했거나, 아니면 자신의 뜻과 달리 아버님의 말씀을 거역할 수 없어 답답함이 속병을 만들어 그렇게 세상을 떠난 것이 아니겠는지요?”


“일 리가 있는 말씀이지만, 그 또한 알 수 없으니 지난날의 아름다운 추억들만 기억하고 또 그리고 있지요.”


“역시 선생님다우신 말씀입니다. 가슴 아픈 사연을 생각나게 해드려 죄송합니다. 말씀드리기 송구하오나 사랑하는 부인께서 돌아가시고 쓴 제문을 책을 통해 읽어보았습니다. 그 절절함이 사무치고, 애절함이 가슴을 적셔 흐르는 눈물을 주체할 수가 없었습니다. 때문에 선생님의 귀양살이가 더욱 삭막해 지셨습니다. 특히 다음 생에 서로 성별을 바꾸어 태어나 다시 부부의 연을 맺어 서로의 입장에 서 보자시던 그 글에서 가슴을 쳤습니다!”


말을 마치자 지난 시절을 회상하듯 고개를 든 추사 선생의 눈에 금방이라도 맑은 물이 고여 흐를 것만 같았다. 내 욕심을 위해 괜한 말씀을 드렸다 생각하니 후회되어 고개를 들 수 없었다.

그러나 한 번 입에서 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마냥 머리만 처박은 채 손가락으로 방바닥만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계속)


옹방강翁方綱(1733~1818)/ 호, 담계覃溪. 청나라 금석학자 겸 서예가. 추사는 그를 존경하여 아버지 김노경을 따라 연행에 갔을 때 만났다. 그 이후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스승과 제자의 연을 맺는다. 연경학계의 원로이자 중국 제일의 금석학자 였던 옹방강은 추사의 비범함에 놀라 “경술문장 해동제일”이라 찬탄했고, 당대 석학이었던 완원으로부터는 완당(阮堂)이라는 애정어린 아호를 받았다.

소치小癡/ 추사의 제자. 허유許維의 호. 문관이자 서화가. 남화南畵의 대가. 처음 이름은 허련許鍊이었으나, 후에 중국 남종 문인화의 대가 왕유王維의 이름을 따서 허유라고 개명하였다.

황산黃山/ 김유근金逌根(1785~1840)의 호. 그는 안동김씨, 세도정치의 권세가 김조순의 아들이지만 정치력과 달리 추사와 깊은 우정을 나누었던 사이이다.

이재彛齋/ 권돈인權敦仁(1783~1859)의 호. 추사보다 7살이나 아래지만 평생 우정을 나누었던 관계이다. 헌종 때 영의정까지 올랐으나 철종 때 파직되어 유배지에서 죽었다.

우선藕船/ 이상적李尙迪(1804~1865)의 호. 역관출신으로 추사의 제자였다. 연경을 자주 드나들면서 수집한 서책들을 제주에 귀양가 있는 추사에게 보내며 정성을 다했다. 그 보답으로 추사는 유명한<세한도>를 그려 그에게 선물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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