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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사체와 세한도가 탄생된 까닭 ②

외로운 귀양지에서 조선의 걸작을 완성한 추사 김정희

by 박필우입니다


한 번 입에서 뱉은 말을 다시 담을 수 없는 법, 나는 마냥 머리를 처박은 채 손가락으로 방바닥만 문지르고 있을 뿐이었다.


어색한 시간이 얼마나 흘렀을까? 성글어진 방의 공기를 바꾸기 위해 필자가 먼저 말을 꺼냈다.

“조금 전 바닷가에선 무엇을 그리 생각하고 계셨는지요? 혹여 초의선사를 기다리신 겝니까? 아니면 소치 허유 선생을 기다리신 겝니까? 그것도 아니면 애제자 우선(이상적李尙迪 1804~1865의 호)을 기다리신 것입니까?”


음…, 초의선사는 나와 같은 해에 태어나 남다른 인연이지요. 그러나 일 년을 함께 하다가 달포 전에 떠났을 뿐인데, 벌써 그리움이 절절해서 큰일입니다! 그리고 소치는 이제 곧 올 것으로 생각하였는데, 소식이 없어 험한 바닷길에 애간장이 탑니다! 그리고 우선이야 연행을 갔으니 청나라의 신문물과 새로 나온 서책들을 보내오겠으나, 그 시기가 언제인지? 나란 참 하릴없는 사람이지요? 일전에 그림 한 점을 그려 우선에게 선물하였는데, 그토록 반기매 내가 도리어 미안 하더이다! 그런데 그 그림에다 청나라 문사들의 제영을 받아오겠다니, 생각이 참으로 영특하고 지혜롭지 않습니까? 그만큼 정서가 곱지 않으면 나올 수 없는 경지라 할 만하지요!”


선생님께서 <세한도歲寒圖>를 말씀하시는 거지요? 저도 실 그림을 직접 만나지 못했으나 사진으로 많이 보아왔습니다. 기실 오늘 이렇게 무례를 무릅쓰고 선생님을 찾은 것도 <세한도>에 대한 얘기를 듣고 싶어서였습니다.”

“사진? 그런 게 무엇인지 몰라도 세상과 등진 초라한 선비가 늘 고마운 제자에게 준, 작은 마음일 뿐입니다. 그 속에 절개와 믿음의 심정을 담아 고마움을 표현했던 것이지요. 절망의 길을 걷고 있는 나를 생각해 주는 애제자에 대한 보답이라 할까요?”


역시 그러셨습니다. 그럼 <세한도>에 관해 짧게 여쭈어도 될는지요? 선생님께서는 ‘도道와 예술이 상호 필수적’이라고 그리 말씀하셨습니다. 또한 남종화란 선비양반들이 즐겨하는 ‘시서화일치詩書畵一致’ 또는 ‘학예일치學藝一致’라 하여 학문과 예술이 따로 분리된 것이 아니라 동일한 것으로 보아 선생님의 마음을 그림으로 표현한 것이 <세한도>라 알고 있습니다. 그림을 시에 비유하여 그리신 것인데, 진정으로 추운 유배객 삶이 고달픈 것이었습니까? 아니면 고고한 기품의 자신감을 표현하시고자 하셨던 것이옵니까? 그림에서 풍기는 내면의 깊은 뜻에 후손들이 선생님의 기품을 존경하고, 또 흠모하게 된 사연입니다만.”


추사 김정희가 제주도 유배지에서 제자 우전 이상적에게 그려준 '세한도'(위키백과)




후대에 어떤 평가가 이루어지는지 내 알바가 아니지만, 선비께서 어떻게 보셨던 간에 보신 그대롭니다.”

그렇다면 <논어>의 ‘자한편’에 나오는 ‘세한연후지송백지후조’歲寒然後知松栢之後凋, 즉 ‘날이 차가워진 후에서야 소나무와 잣나무가 시들지 않음을 알 수 있다.’는 공자의 글을 발문에 인용하셨습니다. 어려운 지경에 이르러서야 진정한 벗을 알 수 있다는 뜻으로 해석들이 분분한데, 저의 미천한 시각으로 선생님이 그리신 <세한도>에서 참 외로움을 방금 알아보았습니다. 아무도 살지 않을 것 같은 집 한 채는 유배객의 고독함이요, 둥근 창은 마지막 자유의 갈망을 보았습니다. 또한 땅 깊숙이 뿌리박아 버티고 선 굽어진 노송에는 선생님의 절개와 세월을 보았으며, 가지에 핀 솔잎에 여전한 지혜를 엿볼 수 있었습니다. 또한, 옆으로 뻗어난 가지가 외로운 집을 감싸듯 드리우고 있음은, 유배객의 외로움을 이겨내기 위한 의지가 아닐는지요. 그리고 가지가 끝나는 곳에 선생님의 ‘완당’阮堂이라는 낙관이 찍혀져 있으니, 시선을 의도적으로 흐르게 하려는 것인지요? 만약 후대의 해석이 맞는다면 선생님께서 나타내고자 하신 <세한도>는 진실한 마음의 표현이라 생각했습니다. 더 지극한 건방을 떨자면, 그 옆을 굳건히 지키고 우뚝 솟은 나무 한 그루에서 제자 우선을 상상하며, 추위에도 그 본연의 마음에 변치 않는 사제 간의 돈독한 정과, 선생님의 불우한 처지를 나타낸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 이 그림을 여름날에 그린 것이라 알고 있습니다만, 한여름에도 이토록 절절한 선생님의 마음을 감히 읽었습니다. 진정 지극한 선禪의 경지를 나타내셨습니다!”


“하하하~~ 어찌 그토록 선을 넘어서까지 감상하였단 말입니까? 비록 몸은 메여있으나 그림을 그리듯 글씨를 쓰고, 글씨를 쓰듯 그림을 그리며, 또한 시를 짓듯 그림을 그리는 것 또한 내 마음의 표현이요, 자유의 의지가 아니겠습니까. 경학經學에서 더 나아간 고증학의 영향을 받아 ‘실사구시實事求是’의 학문을 바탕으로 한 내 마음을 담았을 뿐입니다. 인공으로부터 자연으로의 전환이 필요했던 것이지요! 자연에서 글씨 기품의 영감을 얻고, 나비와 꽃에서 마음과 그림의 정신을 찾았을 뿐이었습니다!”


선생은 잠시 말을 멈추었다. 숨이 가빴던 것이다. 천천히 찻물로 입을 적신 선생은 생각을 정리하듯 고개를 천천히 움직이며 말을 이었다.

명나라 말 동기창은 ‘화가의 육법은 첫째가 기운생동’이라 하였습니다. 이것은 ‘자연으로부터 부여받은 것’이라 했는데, 이마저도 구속되어서는 아니 되는 것입니다. 즉 ‘배워서 얻는 부분도 있다.’고 하였습니다. ‘만권의 책을 읽고, 만 리의 길을 가고, 마음속에 세속의 티끌이 없으면, 자연히 마음 안에서 경치를 이루어 산수山水 윤곽을 드러내며, 손을 따라 그려내는 것이 모두 산수의 전신이 된다.’고 하였습니다.”


심오한 말씀이라 작은 머리로 담아내기가 심히 어렵습니다. 그러나 애써 인공적인 사유가 아니라 자연과 더불어 그 속에서 진리를 찾고, 꾸준히 노력하여 얻은 배움에도 진리가 숨어있으니, 그것이 모두 어우러진 후에야 학문과 예술로 승화한다. 그리 이해해도 되겠습니까? 만약 그렇다면, 선생님께서 우리나라 진경산수나 풍속화를 유독 낮게 평가하셨는데, 그 연유가 문인화에 깊이만을 높이 존중한 것은 아니었습니까? 덕분에 우리 민족의 정서가 만연해진 독창적 그림들이 쇠퇴하게 되는 원인이 되기도 하였다는 평가입니다.”

소치 허련이 그린 추사 김정희(출처 한국 기록유산 Encyves)

“내가 낮게 평가했다고 해서 그 화풍이 꺾여서야 하겠습니까? 다만 나의 뜻을 유행으로 인식한 사람들 스스로가 동조를 해버린 것이 더 큰 이유가 되겠지요! 그리고 그 비판은 오래전 인물들을 향한 것인데, 우리 조선에 남종문인화론에 대한 부재와 서단의 학문적 결핍과 오류를 비판한 것뿐이었습니다.”


“참 이해가 됩니다. 좋은 말씀 해 주셨습니다. 그러나 좀 다른 이야기입니다만, 한 가지 의문으로 남는 것이 있어 다소 무례라 알면서 말씀을 드립니다. 선생님께서는 백성의 아픔을 몸으로 느끼시고, 또 그것을 몸소 실천하시기 위해 백성을 위한 실천학문의 글들을 무수히 남기신 다산茶山 선생님과 달리, 불교 경전을 공부하시고, 유독 다양성을 인정하는 집단지성 보다, 종속적 얽매임을 강요하는 집단의식에서 우러나온 유가의 학문을 즐겨 하셨습니다. 고증학의 기본 원리인 ‘사실에 따른 사물의 진리를 찾는다.’는 실사구시 학문을 학문으로만 끝맺는 듯한 아쉬움이 있습니다. 외람된 말씀입니다만, 혹여 지식과 지성에 대한 허영이 남다르게 작용한 것은 아닌지요? 아니면 지금 경학에 대한 도를 넘어서 백성들은 그저 가르치고 깨우쳐야 한다는 대상으로만 생각하는 지적 오만함은 아닌지요? 그것도 아니라면 이 세상은 하층민들의 것이 아니라, 지극히 앞선 양반들의 주체적 의식인지? 도무지 알 수가 없습니다.”


스스로 지식으로는 무례하다는 것을 알면서도 질문해 버렸다. 실학의 대가 박제가에게 수학하였으며, 옹방강이나 완원에게 금석학과 실학을 익혔던 추사 김정희 선생인지라, 학문에서 실사구시를 강조하였을 뿐, 여린 민초들의 고통에 대한 성찰에는 소원했다는 생각이 들어 무리했다.

이처럼 버릇없는 질문에 천하의 추사 선생도 얼굴이 굳어졌다. 때마침 잔뜩 내려앉은 하늘에는 굵은 빗방울이 요란하게 퍼붓기 시작했다. 문득 추사 선생의 마음을 읽는 것 같아 더 조심스럽게 몸을 사려야 했다. 자세를 고쳐 앉은 선생이 무겁게 입을 열었다.


“음……. 그리 보셨습니까? 그 말씀은 나를 지적 허영이 남다른 백면서생으로만 바라보는 것 같아 조금은 불쾌한 것은 사실입니다. 그러나 내 따지고 보면 근거 없는 학문에 무작정 매달리는 현실이 안타까워 깨우쳐 주기 위함이었으며, 진정 제도권 영역에 진입한 사대부가나 유가의 공리공론 정신세계 질서를 바로잡고자 노력했을 뿐입니다. 그렇지만 듣고 보니 일면 일리가 있는 말이기도 합니다! 하지만 변명 같을지 모르나 지금에 그것을 깨닫고, 그것을 공부하기에는 힘이 달립니다. 유배 첫해, 학질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겼으며, 이듬해 신경통이 과도하게 찾아와 뼈마디마다 고통의 나날들이었습니다. 시력 또한 예전과 같지 않아 몸 뿐 아니라 마음의 병이 더한 것이 아닌가 합니다! 그나마 우선 같은 제자가 잊지 않고 귀한 서책을 보내주니 고맙기 그지없고, 초의나 허련 같은 이가 죽음의 거친 바다를 건너 잊지 않고 찾아주어, 유배의 고통을 이렇게 이겨내고 있습니다.”


“예, 올곧은 심성에 상처를 드렸다면 사죄드립니다. 저는 다만 선생님의 학식과 업적이 편향된 것이라는 짧은 소견으로 드렸던 것뿐입니다.”


필자는 절대고독 속 처절한 유배객의 고단함을 잊고 있었던 것이다. 어디 몸뿐이겠는가! 황량한 마음을 어찌 다스렸을 것이며, 억울한 사연을 무엇으로 풀었을 것인가! 세상과 단절된 유배객의 처지에 자신을 다독이며, 학문과 예술로 승화시켜 나가는 길이 어쩌면 유일한 길인 것을.


침묵, 한참을 서로 바라만 보며 차향을 통해서, 그리고 방안의 맑은 공기를 통해서 마음을 나누고 있었다. 역시 사람의 마음이란 빛보다 빠른 법이다. 못 견디게 궁금한 것이 또 있었다. 그것은 필자가 책에서 읽은 대둔사 편액에 관해 내려오는 이야기였다. 슬그머니 눈치를 살피며 말을 이었다.


“유배길에 해남 대둔사에 들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 선생이 쓴 편액을 보시고 ‘조선의 글씨를 다 망쳐놓은 것이 원교인데, 어찌 이것을 걸어놓았나? 어서 걷으라.’ 하시고 선생님께서 새로 쓴 글로 바꿔 달게 하셨는데, 진정으로 원교 이광사 선생의 글이 그렇게 낮은 수준의 것이었습니까?”


“결국 그 이야기가 나오게 됩니다. 분명히 말씀드리자면, 그것은 타협할 줄 몰랐던 내 지난날의 치명적 실수입니다. 결코 낮은 수준의 글이어서 그랬던 것은 아닙니다. 다만 왕희지체의 검증되지 않은 학습의 대상이라, 이것을 보완할 금석학적 지식이 필요하다는 생각에 그리하였습니다. 그러나 서예 학습에 체계가 필요하다는 생각에는 변함이 없습니다. 왕희지체만 주야장천 따라서 쓴다면 황희지 아류에서 벗어날 수 없는 법이지요! 그를 위한 체계적인 학습 후에 그 축적된 자양분을 기본으로 하여 점진적으로 이루어져야 한다는 생각이었습니다. 실제로 창작시에 격조로서 이루어져야 하는데, 그 격조란 한 순간에 이루어지는 것이 아니라 배움에 차곡차곡 밟아 오르며 끊임없는 노력을 필요로 한다는 것입니다. 그렇게 함으로써 그림과 글과 문장의 진정성에 다가갈 수 있지만, 그렇지 않는다면 얼마나 허황되고 또 기교의 극치로 자만에 빠져 살겠습니까? 원교의 글이란 조선의 정서에 잘 맞아떨어지는 조형성에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현판을 떼어내라고 한 것은 교만했던 저의 큰 잘못입니다!”

(계속)


20210317_133114.jpg 제주도 추사 적소 터. 추사와 초의선사



경학經學/ 유교경전을 연구하는 학문. 유교의 도리를 이해하는 도학과 달리 실용적 경세의식을 강조하는 학문이다.

원교員嶠 이광사李匡師(1705~1777)/ 조선후기 이름난 서예가. 영조31년(1755) 51세 때 나주벽서사건에 억울하게 연루되어 함경도 부령으로 유배되었다가 7년 뒤 진도, 신지도로 이배된다. 가장 조선적 조형성이라 불리는 동국진체를 완성시킨 인물이다. <연려실기술>의 저자 이긍익이 그의 아들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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