외로운 귀양지에서 조선의 걸작을 완성한 추사 김정희
"원교의 글이란 우리 조선 정서에 잘 맞아떨어지는 조형성에 있었는데, 이제 와서 생각하니 현판을 떼어내라고 한 것은 교만했던 내 잘못입니다!”
“그러하셨군요! 후대에 저를 포함하여 입방아 찍기 좋아하는 사람들로 인해 오만했다느니 하는 말들이 많습니다. 그러나 원교 선생은 동국진체를 완성시키신 분인데, 심한처사긴 하셨습니다. 왕희지 체를 무조건 답습한 것이 아니라, 그것의 장점을 승화시켜 독창적 필법을 창안하신 것으로 저는 알고 있습니다. 또한 개인적으로 선생님의 글을 완벽한 서체라 감히 범접할 수 없는 선망의 대상이 되는 까닭이지만, 제가 직접 가서 보았습니다만, 원교선생이 쓴 대둔사 대웅보전 현판의 글씨나, 백련사 대웅보전의 글 또한 제게는 아주 묘한 매력으로 다가옵니다. 힘차게 획을 긋거나 뻗침이 없이, 똑 같은 힘, 똑 같은 속도로 쓴 글씨에 간간한 정기가 서려있다는 생각입니다. 또한 흥취에 따라 글쓰기를 달리했다는 것은 순간의 감성을 중요하게 생각한 원교 선생의 철학 또한 저는 존경하고 있습니다. 그리 한다는 것은 제게는 무척 어려운 것이기에 더욱 그러한 생각입니다.”
“맞는 말입니다. 지금 생각하니 원교 선생의 글은 여간한 내공이 아니고는 성취하기 어려운 내면의 힘을 다하여 쓴 글이니, 내 그간 기교에 있어 시골서생의 글이라 폄하하였던 것이 이런 큰 실수를 범하게 된 사연입니다. 또한 원교 선생의 됨됨을 나중에 알고, 결국 유배지에서 생을 다하였단 말씀을 듣고 참으로 가슴 아파 했던 것입니다. 하여 초의선사께 다시 그것을 달고 내 것을 떼어내라 그리 하였습니다. 이제 긴 고통의 시간 속에 서 있다 보니 제대로 눈을 뜨게 된 사연인 것이지요.”
추사 선생님은 자신을 성찰하고, 스스로를 낮추어 세상을 배워나가는 중이었다. 그것이 글과 그림으로 승화되고, 인성 또한 물 흐르듯 유해지는 길고 긴 유배생활의 완성(?)을 이루어 갔던 것이다. 이토록 힘든 유배기간에 깊은 자아성찰을 통해 타인의 부족함을 포용하고, 자신의 자만을 단호히 버릴 줄 아는 지혜가 생겨남이니, 이제 귀양살이에서 풀려나 해배될 날이 얼마 남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나 여전히 역사적 사실로 볼 때 해배될 날이 두 해가 더 지나야 했다. 그러나 내 꿈의 시간은 별로 없었다. 하여 대충 생각난 것을 마구 던졌다.
“이제 다소 억울한 사연을 듣고 싶습니다. 솔직히 선생님을 이렇게 만든, 진정으로 선생님을 죽음으로 물고 늘어진 김양순의 말은 모두가 거짓이옵니까? 제가 몇 권의 서책을 통해 읽어보았습니다만 참으로 억울한 사연입니다!”
“이제 와서 그것들을 따져본들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안동김문과 경주김문의 힘겨루기였으니, 그것이 전부인 것을. 윤상도①의 상소를 십여 년이 지난 후에 다시 거론했다는 것이 무엇을 뜻하는 것이겠습니까? 순조대왕이 승하하시고, 세도가 안동김문 김조순의 딸인 순원왕후의 수렴청정이 시작되면서 효명세자의 든든한 버팀이었던 저와 경주김문의 힘을 꺾어버리기 위한 것임을 세상 사람들이 다 아는 사실이 아닌지요. 그러나 김양순이 나를 걸어 자폭한 것이지만, 생각건대 김양순 혼자의 생각이 아닌 듯합니다. 하지만 죽음으로 나를 물고 늘어졌으니, 내 어찌 그것에서 벗어날 수 있었겠습니까? 다행히 벗 조인영이 나를 구명해준 덕에 비록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지만 구차한 목숨을 연명하게된 것이지요.”
“예, 제가 그동안 생각해 왔던 것과 크게 다르지 않습니다. 또 한 번 심기를 아프게 해드려 송구합니다!”
추사선생은 한동안 말없이 비 내리는 바깥의 풍경을 넋 놓고 바라볼 뿐이었다.
“오늘 제가 선생님께 참 많은 아픔을 건드리게 됩니다. 이제 화제를 돌려 초의선사와의 관계에 말씀 좀 해 주십시오. 이곳 제주의 유배길에 초의선사와 소치 선생이 함께 동행 하셨단 말이 있습니다. 그것이 사실이옵니까?”
“다산 선생님의 유배 시 벗이었던 백련사 혜장스님이 계셨지요. 그의 제자였던 초의선사가 강진에서 해남 대둔사로 옮겨왔는데, 그때 극구 마다했었지만, 기어이 저와 함께 이 험한 곳까지 동행을 해 주셨습니다. 물론 남종화가 한창 무르익어간 소치와 함께 말입니다. 그리고 여전히 지금까지 이 먼 뱃길에 풍랑을 헤치고 찾아주시니 얼마나 고맙고 또 고마운지 모릅니다. 팔과 다리가 잘려버린 힘없는 서생을 위해서 그리하는 것을 내 어찌 잊을 수 있겠습니까? 언제고 기적이 일어나 해배 될 날이 있다면 남은여생을 그분들과 교우하면서 조용히 보낼 생각입니다. 그리되면 선비의 말처럼 민초들을 위한 학문에도 몰두를 해볼 요량입니다.”
“언제고 꼭 그것을 이루리라 저는 확신합니다. 그리고 지금 마시는 차향이 참 좋습니다! 차의 음용에 대해 다도茶道라 일컫습니다만, 차에 무척 애착이 깊으신 것으로 알고 있습니다. 차에 대한 선생님의 고견을 듣고 싶습니다.”
“나의 벗 초의선사께서 차에 대해 많은 지식을 전수 해 주셨지요. 물론 그의 스승인 혜장선사께서 가르침을 주셨지만, 차란 사람의 마음을 안정시키며, 특히 머리를 맑게 해주는 탁월한 효과가 있으니, 가까이 두고 자연의 마음을 마시듯 해야 하는 것이지요. 또한 차의 성미는 사악함이 없는 것인데, 이는 무릇 군자와 같은 차의 정신을 뜻하는 것입니다. 그러하니 덕을 따르고, 악을 멀리하며, 은은한 차맛에는 깨달음의 경지가 있는 것입니다! 진정 차란 ‘사람과 짝을 이루는 하늘이 내린 선물’인 것이지요. 때문에 초의 같으신 분께서는 ‘동다’東茶라 해서 중국과 달리 우리 동방의 나라 차에 대한 자존이 대단하였던 것입니다. 저는 기다리던 서책이나 차를 선물 받을 때면 마음이 설레는데, 미진한 인생이지만 조금씩 세상의 도리를 깨우쳐가나 봅니다.”
“예, 그러하시군요! 해서 ‘승설勝雪’ ‘다문茶門’ ‘일로향실一爐香室’같은 호를 자주 쓰셨습니다. 선생님의 말씀 가슴에 새기도록 하겠습니다.”
“차에 대한 애착에 도가 넘치다 보니 그러한 게지요.”
“그럼 선생님께서 특유의 필법을 창안하신 서체를 선생님의 호를 빌어 ‘추사체’라 합니다만, 차에 대한 애정이 접목되어 추사체에도 담겨지게 된 것인지요?”
“어디 차뿐이겠습니까. 자연의 이치와 대상의 형상이 아닌 정신세계를 담으려 노력하였을 뿐입니다. 어찌 사람과 글을 따로 논할 수 있겠습니까? 그렇게 되면 당연히 화면에서 필선筆線이나, 조형의 수식이 절약되고 단순해지면서, 추상적이며 여러 갈래의 진실들이 아름답게 중화되어 나타나는 것이지요!”
“그럼 <세한도>에서 보듯 여백의 미美는, 비워있음으로 가득채운 그 진실과도 무관하지 않겠습니다!”
“그렇다고 할 수 있습니다. 군더더기를 떨쳐버린 무한한 정신세계가 곧 여백의 아름다움인데, 그것이 서체에도 집약되어 나타나게 한 것입니다.”
“제가 알기로는 명나라 동기창董其昌의 필법을 연구하셨고, 송나라 소식蘇軾과 당나라 구양순歐陽詢의 서풍書風을 본받았으며, 그것으로 역대 명필들의 장점만을 모아 이루어낸 서풍이라 그리 알고 있습니다. 또한 해서楷書에 관해서도 깊은 연구가 이루어진 것으로 압니다.”
“어찌 아무것도 없는 무無의 상태에서 창의가 발현될 수 있겠습니까? 모든 필법을 응용해서 그것의 장점만을 모아 즐기게 되다보니 그것이 그렇게 굳어진 것이지요. 해서楷書 또한 예서隷書를 바탕으로 하여 나온 것이니, 예서법은 서법의 기본으로 서도書道에 있어서 예서를 모르고서야 어찌 글씨를 쓴다고 할 수 있으며, 더불어 가슴 속에 청아한 뜻이 없고서는 쓸 수 없는 것입니다.”
“기본을 중시하는 것이라 이해가 됩니다! 기본에 충실하고, 그것에서 크게 벗어남이 없으나, 얽매이지 않고 자유롭고 호방한 뜻을 서체에 나타낸다는 그런 뜻으로 알아도 되겠습니까? 그러하니 글이 맺고 끊어짐이 또다시 이어지고, 획이 가늘다 순간에 힘을 발휘하는 서체가 탄생된 것이군요!”
“허허, 아직 그의 경지에 도달하지 못했으니 선비께서는 그만 닦달을 하시지요!”
“죄송합니다! 앎에 있어 욕심이 과해 그리되었습니다.”
“모름지기 글씨에도 향이 있으며, 기氣가 살아있어야 평범함을 넘어섰다 할 수 있겠지요. 기교가 넘치면 가벼워지고, 힘이 넘치면 둔탁한 것이니, 자연의 이치와 다르지 않습니다. 그 또한 맑고 청량한 마음에서 우러나와야 할 것입니다.”
“정리되지는 않았지만 이제야 조금 가닥이 잡혀오는 것 같습니다. 다만 선생님의 명성이 중국에 널리 퍼져있으나, 그 높은 뜻을 미천한 저로 인해 잘못 담아낼까 그것이 두려우나, 미련한 뚝심을 빌어 최선을 다해볼까 합니다. 이제 그만 선생님과 아쉬운 작별을 해야 할 시간이 된 것 같습니다.”
문득 밖을 보니 어둑어둑 어둠이 내리고 있었고, 옆집 보수주인이 일터에서 돌아와 분주히 저녁을 준비하고 있는 듯 했다.
“벌써 가시려는 것이요? 어허, 이렇게 쉬이 헤어져야 한다니 참으로 섭섭합니다!”
“이제 제가 선생님께 꿈을 빌어 과도한 관심을 받았습니다. 아쉬운 마음이야 한량없으나 어쩔 수 없이 떠나야 할 시간 같습니다.”
일어서서 두 손을 합장하고 선생께 공손히 큰절을 올렸다. 선생은 앉은 자리에서 고개를 숙여 예를 다해 답했으며, 이런 미천한 놈과 헤어짐이 아쉬운 듯 두 손을 잡아주었다. 손은 메말랐지만, 따스했다. 손에서 손으로 전해진 온기가 가슴으로 스며들었다.
“비 오는 날이라 신경통이 압박하여 심신이 고달팠는데, 이상하게 생긴 선비께서 나의 인생에 걸쳐 행복한 고문을 가하였으니, 오늘은 달게 잠을 이룰 수 있을 것 같습니다. 이리 힘들게 찾아와 주신 선비님이 참 고마울 따름입니다.”
“.......”
아무런 말도 할 수 없었다. 단지 유배의 고된 흔적을 보는 것 같아 가슴이 메여왔을 뿐이다. 선생은 적소의 뜰까지 내려와 필자를 전송해 주셨다. 목례로 인사를 드리고 돌아서는데 선생님의 눈에 물기가 촉촉이 묻어있음을 보았다. 필자는 속으로 되뇌었다.
때는 1847년 9월 선생께서 환갑을 넘긴 62세 때였다.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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① 윤상도尹尙度의 상소上訴/ 종6품 무사과 벼슬을 지내던 윤상도는 1830년 효명세자가 죽자 호조판서 박종훈, 신위 유상량 등을 탄핵하는 상소를 올렸다. 그러나 온갖 욕설과 모함으로 가득찬 상소를 본 순조는 오히려 내용이 너무도 방자하며, ‘혼자만 조선의 신하란 말인가.’ 하며 ‘윤상도 같은 촌놈이 이런 상소를 혼자 올렸을리 없다.’ 하며 의심하였으나 조정이 시끄러워짐을 염려해 그냥 덮고, 윤상도를 추자도에 유배시켜버렸다. 그러나 십여 년 뒤 순조가 승하하자 순조의 비 순원왕후의 수렴청정 과정에서 대사헌 김홍근에 의해 윤상도와 추사의 아버지 김노경에 대한 국청을 열었다. 그 과정에서 상소사건을 재조사하게 되었고, 이미 3년 전에 죽은 김노경이었으니 관작을 추탈하라는 명이 내려졌고, 귀양가있던 윤상도는 다시 국문장으로 끌려와 자신에게 상소를 종용한 인물이 허성이었으며, 허성을 사주한 인물이 바로 김양순이라고 밝혔다. 윤상도는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국문장으로 끌려온 김양순은 추사 김정희가 처음 사주한 인물이라고 고변을 했으나, 결국 국문 끝에 죽어버리자, 김정희는 모진 고문에도 자신의 결백함을 주장했다. 결국 우의정이었던 벗 조인영의 도움으로 겨우 목숨을 건져 제주도로 유배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