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망국의 한을 품고 숨을 거둔 최익현 ①

동포끼리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by 박필우입니다



“…… 강화가 우리의 약점을 보이는 데서 나온 것이라면, 이는 주도권이 저들에게 있는 것으로서 저들이 도리어 우리를 제어할 것이니 그런 강화는 믿을 수 없습니다. 신은 감히 알 수가 없나이다. 오늘날의 강화가 저들의 애걸에서 나온 것입니까? 아니면 우리가 약점을 보여 그리된 것입니까? ……저들이 왜인이라고 하지만 실상은 서양 오랑캐입니다.”


가냘픈 체구에 가감 없이 토해내는 추상같은 그의 말은 엄동설한 추위도 녹여낼 듯 보였다. 뿐만 아니었다. 등에는 시퍼렇게 날이 선 도끼 한 자루가 그의 기세를 대변하듯 가로질러 메여 있었으니 정월의 칼바람조차도 기를 죽이고 그를 피해갔다. 이른바 나를 이 도끼로 목을 쳐라는 도끼상소였다.


때는 고종 13년(1876) 정월, 민씨 척족들을 위시한 조선의 나약한 정부는 일본과 강화도조약(조일수호조규)을 논의하자 면암勉庵 최익현崔益鉉(1833~1906)은 죽음을 각오하고 막아야 할 자신의 책무라 여겼다. 유배에서 풀려난 지 얼마 되지 않았지만, 그는 광화문 앞에 앉아 지부소를 올리고 임금의 실정을 질타하며, 왜구의 만행을 죽음으로 호소하고 있었다.


그러나 마침 왕세자 책봉하례를 드리는 날을 앞둔 터라 면암의 상소는 고종의 심기를 불편하게 했다. 결국 충정어린 그의 상소는 의지와 다르게 고종은 자신을 질책하는 그를 잡아가두게 했으며, 그리고 며칠 후 ‘상소 내용을 보아 신하로서 입에 담지 못할 말과 웃어른을 지적하며 탓하고, 위협하며 꾸짖는구나!’ 하며 흑산도로 절도안치 유배령이 떨어졌다. 결국 유배지로 압송되던 날 이미 일본과의 조일수호조규가 이루어진 후였다.

지난 1873년 민씨 일가의 횡포를 참다못해 호조참판직을 사임하고 그들의 폐단을 상소하다 내용이 불충하다는 이유를 들어 제주도에서 삼 년간 유배생활을 한 이후 해배되자말자 두 번째 유배길에 오르게 된 사연이다.


최익현의 가슴은 응어리진 한으로 가득 차올랐다. 이 나라 조선의 앞날에 먹장구름이 몰려오고 있었으니, 걸음걸음 피눈물로 자신의 가슴을 적시고 있었다. 또한 시대가 변함에 따라 자신이 믿어왔던 민족자존 위정척사사상도 한계를 드러내고 있었다. 사상적 뿌리의 근간이 점점 실용적 행동에 변화되며 보수로 대변되던 사상에 조금씩 혁신을 가져오게 된다. 물론 당시 제국주의의 경제적 침략성을 간파한 통찰력에는 부정하지 않았다.


그러나 면암을 여전히 날선 도끼를 마음깊이 품고 있었다. 그만큼 무겁게 세상을, 이 나라 조선을 바라보게 된 까닭이다. 평생을 수봉관·언관으로 비리와 부정에 눈 감지 않았으며, 강직한 성품을 잃지 않았다. 나는 새도 떨어트린다는 대원군의 섭정에 잘못된 점을 비판하며, 그를 권력일선에서 물러나게 하는 단초를 제공하기도 했던 그였다. 그동안 쌓여있던 폐단을 바로잡고자 노력하였으나, 그를 그냥 두고 볼 권신들이 아니었다.

그는 스승 이항로(1792~1868)의 학통을 이어받았지만, 변화의 물꼬에 갇혀 지내지만은 않았다. 이기론과 같은 형이상학적 이상보다 민족을 위한 실천도덕에 힘을 기울였다.



면암 최익현


“나라가 흥하는 것은 우리의 문화, 우리의 마음을 잃지 않는 데 있으며, 국권 없이는 모든 것을 잃는다.”


그의 사상은 훗날 항일의병을 일으키고, 민족독립운동의 지도이념으로 발전·계승되어 온 것이 그것이다.


당시 대내외적 격동기를 겪고 있던 조선사회는 중요한 분기점에 서 있었다. 18세기부터 조선의 농촌사회는 이양법 실시로 소출이 많아지고 상품생산 경제가 발전되면서 관작 농민이 출연하며, 봉건사회의 해체징후가 사회전반에 나타난다. 그러면서 부세문제가 농민들에게 집중되면서 중간수탈이 늘어나고, 민란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 것이다. 오랫동안 누적되어온 부정부패가 극에 달했으며, 삼정문란 중 환곡還穀문제가 농민들의 요구 중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하게 되니 수령이나 서리, 토호배들의 사적 수탈 등 봉건적 수탈에 대해 농민들은 생존을 위한 마지막 수단인 저항으로 맞서게 된다.


1862년 전국적 농민항쟁이 2월 단성, 진주를 시작으로 충청도와 전라도로 확산되며 70여개 고을에서 불같이 일어나게 된다. 그 후에도 전국에서 크고 작은 항쟁이 불길처럼 번져, 이름 하여 19세기는 민란의 시대가 되고 말았다. 그러나 일부 유력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세도정권시대의 부패한 조선왕조는 이를 수습할 능력이 없었다.


이후 대원군이 자신의 둘째 아들을 왕으로 만드는데 성공하여 정권을 잡았으나, 실추된 왕권강화를 위한 무리한 경복궁 재건과 당백전을 발행하여 나라 재정이 흔들리고 말았다. 대외정세에 대한 대응 또한 쇄국으로 일관했지만 이미 자력으로 힘을 키워낼 수 있는 한계를 벗어나 있었다.


뿐만 아니었다. 며느리 명성왕후 민씨(사후 대한제국이 선포되고 황후로 추존됨)와의 알력과 갈등으로 대원군은 실각하고 고종高宗이 친정을 하게 되지만, 민씨 일족들의 악행이 나라를 더욱 피폐해 지게 만들고 말았다. 실례로 <윤치호 일기>를 보면 당시의 상황을 조금이나마 파악할 수 있다.


‘명성왕후는 자기 왕조를 지킬 심산으로 북관왕묘를 짓는데 수 십 만원을 들였을 것이다. 하지만 북관왕묘는 왕후와 왕후의 왕조는 물론 자신을(북관왕묘를 말함) 지키는 데도 실패했다. 그 똑똑하고 이기적이었던 왕후가 물심양면으로 북관왕묘를 섬기던 것의 절반쯤만 백성들에게 할애했더라면 오늘날 왕후의 왕조는 무사했을 것이다.’


북관왕묘는 삼국지에 나오는 관우에게 제사를 지내는 묘당인데, 자신의 권력과 만세를 위하여 무녀에게 의존하면서까지 국고를 낭비해 굿을 벌였던 것이다.


뿐만 아니었다. 한말 고종의 자문역을 맡았던 미국인 헐버트는 관찰사가 수만 달러에 매각되고, 현감이 수백 달러에 거래되는 현장을 바라보면서 ‘이 나라의 장래는 결국 패망으로 가는 것이 아닐까?’ 생각했다. 결국 매관의 연쇄현상이 일어나, 그것이 아래로 전달되는 상황에서 아전들의 횡포로 직결된다. 이것이 민심이반을 낳는 원인이 된 것이다.



충남 예산군 광시면 관음리에 있는 조선 말기의 애국지사 최익현(1833-1906)의 묘. 충청남도 기념물 제29호.(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러면 조선을 둘러싼 대외정세는 어떠했는가? 18세기 후반 제국주의 팽창정책의 손길은 동방의 해 뜨는 나라 조선에까지 뻗치게 된다. 약탈로 대변되는 값싼 원자재의 공급지로서, 또한 선진문물이라 대변되는 완제품 시장의 활로를 찾아 통상을 요구하기 시작했다. 그들의 첨병으로는 개화시켜야할 미개인들의 선도자(?)이자, 제국주의 촉수 선교사가 있었으며, 이와는 반대로 병인양요(프랑스)와 신미양요(미국)를 시작으로 군사적 약탈도 마다하지 않았다.


일본은 조선의 강화도에 운양호사건을 일으켜 그것을 빌미로 통상조약체결을 요구하였다. 나약했던 조선 정부는 결국 1876년 최초의 근대적 불평등 조약인 조일수호조규(강화도조약)를 맺게 된 것이다. 이후 미국, 중국, 독일, 영국, 이탈리아 등과 통상을 맺으며 조선은 열강들의 수탈의 한 가운데 서있게 되는 비운이 시작되었다.


또한 사대사상의 깊은 뿌리의 근원지인 북경이 청일전쟁으로 함락되자 조선의 성리학적 정치이데올로기 근간이 흔들리며 신분질서에도 큰 변화를 겪게 되는 것이다. (계속)

keyword
이전 28화추사체와 세한도가 탄생한 까닭 ③