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망국의 한을 품고 숨을 거둔 최익현 ②

동포끼리 죽이는 일을 나는 차마 못하겠다

by 박필우입니다

러일전쟁 . 랴오둥반도에 상륙하는 일본군





삼 년간 제주도 유배를 끝내고 불과 일 여년 관직에 복귀하지 않고 있던 면암은 일본과 조일수호조규에 국가 존망이 걸린 일이라 분연히 일어섰으나, 결국 다시 흑산도로 유배에 오르게 되니 하늘이 한스럽고, 바다가 원망스러웠다. 자신 안위 문제가 아니었다. 나라의 미래가 먹구름 속에 휩싸여 있었다. 위정자들은 자신의 뱃속을 채우기에 급급하였으며, 개화니 뭐니 해서 친일파, 친러파, 친청파, 친미파로 나뉘어 국정을 농단하고 있어 그것이 걱정이었다.


바다에 서니 매서운 칼바람이 면암의 가슴을 뚫고 지나갔다. 그는 지난날 ‘황서영백서사건’으로 이곳으로 유배와 이곳에서 죽음을 맞이한 손암巽庵 정약전을 기억해 냈다. 나라의 아까운 인재들이 억울하게 죽어간 사연과 작금의 현실을 생각하니 마음은 나락으로 떨어지는 듯했다. 또한 자신의 상소에 아무도 동조하지 않았던 대신들과, 말로만 떠들던 재야의 유림들 행태 또한 미래가 어두운 까닭이었다. 이런저런 생각이 미치자 그는 진실로 통곡하지 않을 수 없었다.


‘행동하지 않은 양심은 비굴한 것일 뿐, 충의와 지조들은 다들 어디로 갔단 말이던가? 진정으로 하늘은 이 나라 조선을 버리는 것인가? 이 땅의 유림들과 수많은 애국지사들은 어디로 숨어들었으며, 임진·병자 양란을 치루면서 전국 곳곳에서 일었던 그들의 정신은 다 어디로 사라졌단 말인가? 백척간두에 서 있던 삼천리강산을 애국으로 누볐던 그들의 정신은 어디가고, 비굴한 얼굴로 권력에 빌붙어 아부하는 자들이 천지를 호령하고 득세를 하는가? 강자에 약하고 약자에 강한 비루한 모습에 어찌 희망을 기대할 수 있을까?’


면암은 바다를 바라보며 이렇게 한탄하고 있었다. 한양을 떠나 860리 떨어진 다경진多慶津에 도착한 때는 십 여일이 지나서였다. 그리고 그는 다시 흑산도로 들어가기 위해 배에 올랐다. 그는 당시의 심정을 이렇게 읊었다.


좋은 세상에는 버리는 사람이 없는데

먼 지역에 있는 이 몸만이 늙었구나.

노쇠한 몸을 힘겹게 일으키며,

옷 떨쳐 바다로 나아갔네.


노를 저으니 물밑은 푸르고,

돛을 다니 나그네 마음은 서럽구나.

고개 돌리니 산이 점점 멀어지네

아마 남쪽 땅을 향해 가겠구나.

<후략>


면암은 배에 올라 6일이 지나서야 흑산도에 도착을 했다. 섬이 많은 지역이라 이리저리 돌고 돌아 도착을 했던 것이다. 이미 그의 몸은 피죽을 면치 못했지만 올곧은 마음이야 더욱 굳건하게 다지는 계기가 되었다.

흑산도에 도착한 면암은 적소를 정하고 유배생활을 시작했다. 그는 그냥 있지 않았다. 특유의 부지런함과 근면함이 그곳 사람들을 감동시켰다. 주민들은 그를 찾아와 가르침을 받고자 문전성시를 이루었으며, 그의 절개와 지조를 귀히 여긴 수많은 유림 또한 먼 바닷길을 건너와 시국과 국내외 현안에 대해 토론을 벌이기도 했다.


그의 적소에 ‘일신당日新堂’이라는 당호를 걸고 서당을 지어 아이들을 가르치며 삼 년간 울분의 유배생활을 삭여갔다. 그리고 자신의 적소 뒤 바위에 ‘기봉강산箕封江山 홍무일월洪武日月’라 새겨서 ‘우리나라 금수강산, 이 땅의 해와 달은 유구한 역사를 가지고 있다.’는 자신의 생각을 각인시켰다. 그러나 가슴에 품었던 도끼는 왜구와 결탁해 국정을 농단하는 역적들을 생각하며 단 하루도 내려놓은 적이 없었다.





친일파 이완용(위키백과)

그렇게 생활하기를 삼년, 유배에서 풀려나 고향으로 돌아온 면암은 오랜 세월 동안 칩거에 들어갔다. 1904년 고종은 ‘나라가 위태로우니 대궐로 돌아와 자신의 뜻을 이룰 수 있도록 도와 달라’며 밀지密旨를 보냈으나 듣지 않았다. 1895년 일본 낭인들에 의해 명성왕후가 살해되고 단발령이 내려지기까지 근 20년 동안 침묵했던 이유를 알 수 없다. 그사이 임오군란이 일어났으며, 전봉준을 위시한 화난 농민들에 의해 갑오년에 농민전쟁이 일어났다. 또한 우리나라를 전쟁터로 청일전쟁 등 여러 국내외적 사건들이 일어나 더욱 복잡해진 국내외 정세였다.



면암은 그동안 수많은 사건들을 보면서 무슨 생각을 했었을까? 결국 자신이 염려했던 대로 흘러가는 나라를 보며 지금까지 지켜왔던 위정척사사상이나 주자의 논리들이 현실과 동떨어진 태평 하 세월에 사치가 아니었을까? 과연 정읍에서 불같이 일어난 농민항쟁을 보면서, 또한 그들이 관군과 보부상들로 구성된 연합군, 양반유생들로 구성된 민보군이 일본군 토벌대에게 괴멸당하는 안타까움을 지켜보면서 침묵할 수밖에 없었던 이유는 여전히 알 수가 없다.



양반상노 계급 논리를 떠나 애민애족의 신념과 믿음에 혼란스러웠던 것은 아닐까? 감히 상상의 논리를 펴본다. 과연 그의 바람처럼 동양 세 나라가 서로 화합 합심하여 서구열강의 야욕을 지혜롭게 헤쳐가길 희망했을까? 여기서 일본의 열여섯 가지 죄를 성토한 그의 격문을 보면 그가 20여 년간 침묵을 지켜왔던 이유가 설명되어 있다.


“아! 나라에 충성하고 사람을 사랑하는 것을 성性이라 하고, 신의를 지키고 의리에 밝은 것을 도道라고 하니, 사람이 이 성이 없으면 그 사람은 반드시 죽고, 나라가 이 도가 없으면 반드시 망한다.(중략)……지나간 병자년에 사신 흑전청륭黑田淸隆이 와서 통상을 간청할 적에 익현이 배척하는 소장을 올려 항거하였다. (중략) 믿을 수 없는 귀국의 정상情狀을 익현이 유독 알고 있기 때문에 미리 걱정하여 말한 것이다. 그러나 천하의 대세는 이미 예전과 달라져서 동으로 뻗치는 서방의 세력을 혼자 힘으로는 막아낼 수 없으므로, 반드시 한국, 청국, 일본 세 나라가 서로 보거輔車와 순치脣齒가 되어야 동양의 대국을 보전하게 된다는 것은 지혜 있는 자가 아니라도 족히 알 것이며, 익현도 역시 이렇게 되기를 매우 바라는 바였다. 그러므로 귀국을 반드시 미덥게 여기지 않았으나, 또한 심하게 나가서 양국의 화기를 상하고 싶지는 않았다. 그래서 20년 동안 침묵을 지키고 세상일을 말하지 않았던 것이다.”(후략)


윗 글을 보면 서구열강을 대적하기 위해서는 동양 3국이 서로 협동하여 힘을 합쳐 지혜롭게 펼처갈 것이라 바랐다. 그러나 이는 심하게 순진한 마음이었다. 명성왕후 시해사건이 일어나고 일본을 등에 업은 김홍집내각이 정권을 잡으며 단발령이 내려졌다. 봉건유생들이 분노하여 들고 일어나자 그들은 대쪽 같은 면암을 본보기로 삼으려했다. 유길준兪吉濬이 면암의 머리칼을 자르려 하자 ‘내 머리는 자를 수 있어도, 내 머리칼은 자를 수 없다!’며 일갈했던 그의 일화는 유명하다. 결국 그의 기세에 눌린 유길준은 물러날 수밖에 없었다.

이후 아관파천에 성공한 고종은 즉시 친일관료체포령을 내렸다. 김홍집은 저자거리에서 성난 시민들에게 돌멩이에 맞아 죽었고, 어윤중은 용인으로 도망하던 중 지방민에게 맞아죽었으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평양을 점령하기 위해 대동강에 주둔한 일본군(위키백과)



일본은 메이지유신으로 칼날을 빼앗겨 버린 사무라이들을 다독이기 위해서는 모든 초점을 국외로 돌려야 했다. 그들에게 총과 칼을 함께 쥐어주며 일본의 야욕을 채워갔다. 즉 죽이고 싶어 하는 쪽발이 낭인들의 심리를 기똥차게 이용했으니, 청일전쟁과 러일전쟁을 승리로 이끈 원동력이 그것이었다.


이토록 집요한 그들에 의해 대한제국은 환란이 다가오고 있었다. 그때 최초로 조선과 국교를 맺은 서방국가 미국은 이 나라의 안전과 이익을 존중하겠다는 약속을 저버리고 1905년 7월 29일 일본과 ‘가쓰라-태프트 비밀협약’을 맺음으로서 대한을 일본의 수중에 넘겨주었으며, 미국주차공사 몰간은 일본공사관에서 샴페인을 터트리며 축배를 들었다. 안일한 조선은 그렇게 허물어져 내렸던 것이다. 또한 일본이 러일전쟁으로 러시아의 남하를 막아준 대가로 영국과 ‘제2차 영일동맹’을 맺어 조선의 보호국화를 승인하고 말았다.


집요하고 정교하게 계획을 세우고 뻗쳐오는 일본의 마수는 그렇게 왔다. 더불어 무능한 왕조와 붕당을 당파로 규정하고 스스로 무너져 내렸다는 그들의 일반화된 식민사관 역사인식과, 우리 어용사가들을 이용해 일본의 한국침략을 정당화하게 만든 그들에게도 경의(?)를 표할 수밖에 없는 이유이기도 하다.


이렇게 되자 일본은 거칠 것이 없었다. 송병준, 이용구 등을 이용하여 ‘일진회’라는 친일단체를 만들어 보호조약의 필요성을 선전하고, 이토 히로부미를 조선에 파견하여 조약체결을 서둘렀다.


1905년 11월 17일 일본군이 왕궁을 포위한 가운데 이완용, 박제순, 이근택, 권중현, 이지용 등 ‘을사오적’을 내세워 조선의 외교권을 박탈하는 ‘을사늑약(제2차 한일협약)을 강요했다. 고종이 끝까지 서명을 거부하자 일본군은 외무대신 박제순의 직인을 훔쳐서 날인했다. 고종의 재가를 받지 못한 이 조약은 당연히 무효였으나 힘없는 백성은 울분만 토할 수밖에 없었다.


그리고 며칠 뒤 장지연은 <황성신문>에 ‘이날을 목 놓아 우노라!’라는 ‘시일야방성대곡是日也放聲大哭’이라는 사설을 실었고, 박은식도 <대한매일신보>의 사설에서 조약 체결의 불법적 과정을 상세히 폭로하고 일제 침략을 규탄했다.



면암은 이제야 자신이 나설 때라는 듯 20년 침묵을 깨고 분연히 일어났다. 그는 1905년 12월 3일 조약의 위법성과 이에 참여한 을사오적의 처단을 당당하게 요구하며 <청토오적소請討五賊蔬>를 올렸다.


을사오적 박제순




" -…… 박제순 이하 여러 역적은 외적의 앞잡이로서 매국을 예사로 알아 기탄없이 하면서 조금도 부끄러움을 모르니 진실로 능지처참해도 오히려 죄가 남을 것입니다…….(중략) 그러니 빨리 박제순 이하 다섯 역적의 목을 베어 매국한 죄를 물으시옵고, 일본 공사관에 서둘러 조회해서 맹약을 강요한 거짓 문서를 없애도록 하시옵소서!……- "


그리고 통분함에 못 이겨 민영환이 자결하고, 백두서생이었던 황현이 <절명시>를 남기고 목숨을 끊는 등 죽음으로 일제의 간사하고 악랄한 무력에 대항했으나 면암을 그렇지가 않았다.


“죽는 것은 두렵지 않으나, 모두 죽으면 누가 나라를 위해 싸울 것인가?”


하며 탄식하고, 즉시 행동에 옮겼다. 1906년 정월 충남 노성의 궐리사闕里祠에서 수많은 유림들을 모아 국권회복을 위한 동참을 호소하며, 시국의 절박함을 통변하기에 이른다. 이때 그의 나이 일흔넷의 노학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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