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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牧民을 위한 실학자 정약용 ③

200년이 흘렀어도 다산 선생의 정신은 살아있네

by 박필우입니다

*남양주시 조안면 다산 생가 여유당





쓸쓸하게 가을바람이 부는 날이면 다산은 뒷산에 올랐다. 홀로 사색에 잠기며 세상 이치의 오묘함과 한 점 부는 바람에 자연을 느끼며 배움에 한 발짝 더 다가갔을 때 그는 그냥 있을 수가 없었다.


자연 속에 묻어있는 오묘함을 백련사 혜장선사와 나누어야 직성이 풀렸던 것이다. 이름 하여 지난 날 자웅을 겨뤘던 한 판 승부에 양이 차지 않았다. 해서 지금쯤 천일각을 지나 형제봉 정상의 정자 해월루에 오르면 향기로운 차를 준비한 혜장이 와서 기다릴 것만 같았다. 만약 자신의 생각이 틀려도 좋았다. 해월루에서 바라보는 먼데 지척의 바다에 흑산도가 보이고, 형님의 숨결이 잔잔한 파도에 밀려 자신의 가슴에 다가올 것만 같았기 때문이다.


만추의 색상으로 뒤덮힌 가을날이었지만, 비탈진 산길을 오르는 것은 하루 한 끼 식사만 고집했던 다산에게는 힘에 부치는 일이었다. 다산은 배가 부르면 게으르고 나태해 질 수 있다며 그렇게 실천해 갔다. 얼마를 오르자 어디서 호탕한 웃음 소리가 들리기 시작했다.


“하하하~ 선생님께서 조금 늦으셨습니다. 빈승이 먼저 와서 기다리고 있습니다.”


다산을 고개를 들고 위를 올려다보니 해월루에 우뚝 서있는 혜장의 모습이 보였다. 혜장의 밝고 맑은 모습을 보면 세상의 시름이 씻어지는 느낌이 들었다. 한 순간 그와 마주한 눈빛에는 자신을 뚫어보는 깊고 그윽함이 깃들어 있었다. 혜장이 주석하고 있는 백련사와 다산초당 중간에 위치했던 해월루라 서로 집히는 것이 있으면 누가 먼저랄 것도 없이 이렇게 찾았던 것이다.


“그렇지 않아도 뭔가 당기는 것이 있어 이리 급하게 찾아왔는데 선사께서 한 걸음 빨리 오셨습니다.”


다산은 만면에 웃음을 머금으며 해월루에 올라 혜장의 손을 맞잡았다. 그 아래 어린 학승 하나가 작은 화덕을 준비하며 찻물을 끓여 정자에 올랐다. 둘은 찻상을 앞에 두고 마주 앉았다. 이때 어린 학승의 모습을 지켜보던 다산이 입을 열었다.


“눈빛이 형형해 예사롭지 않은 스님이시옵니다. 온화한 기품이 앳띤 모습에 깃들어 있어 내 마음까지 청아해 지는 것 같습니다.”


혜장선사는 내 그럴 줄 알았다는 듯 미소를 머금으며 차를 들어 입으로 가져갔다. 이때 다산을 올려다보던 학승이 말을 이었다.


“예, 선생님의 명성을 멀리서 듣게 되어 가르침을 받고자 선사님을 졸라 이리 찾게 되었습니다. 초의라 합니다.”


그랬다. 이 학승이 훗날 <동다송>을 집필한 초의草衣다. 이를 인연으로 다산에게 유학과 시문을 배웠으며, 추사 김정희와도 친분이 깊어지게 된다. 초의의 소개로 소치小痴 허유許維는 추사의 제자가 되기도 한다.


다산은 혹독한 귀양살이 중에도 처음 여러 달을 제외하고는 책을 손에서 놓은 적이 없었다. 만권의 책으로 탑을 쌓고 살았으며, 혜장선사와의 인연으로 혜장의 제자 초의草衣, 그리고 추사秋史 김정희金正喜, 자신의 둘째아들 운포耘逋 정학유丁學游 이들은 모두 동갑내기로 문화적 활동과 학문적 토론을 이어가기도 했었다. 또한 추사의 제자가 소치 허유이니 그 예술과 학문적 맥이 그렇게 이어온 것이며, 초의선사 또한 다산에게 학문을 이어받으니 그의 오묘한 문화적 연결고리가 지금의 후대까지 이어오게 되는 것이다.


*

하지만 진정으로 그의 학문을 알아주는 이는 다산과 한배에서 태어나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는 둘째 형 약전이었다. 그 또한 학문적으로 뛰어난 사람인데다 다산의 학문적 지기知己였다. 지난 날 나주 율정점에서 눈물로 헤어진 뒤로 16년 동안 한 번도 만나지 못했지만 서로 편지를 주고받으며 형제간 정을 나누었다.


그러나 결국 약전이 그의 나이 59세, 1816년 유배지에서 한 많은 생을 마감하고야 만다. 다산의 충격이 얼마나 컸을까? 유배지에서 들려온 비보悲報 중 막내아들을 잃었고, 또 비록 몸은 떨어져 있었지만 자신과 정신적 교감을 이루었던 형의 죽음은 다산에겐 큰 충격이 아닐 수 없었다. 그는 적소 옆 천일각에 올라 흑산도를 바라보며 피를 토하며 울부짖었다.


더 아쉬운 것은 형 약전이 다산을 만나러 흑산도를 떠나려 할 때, 그곳 주민들이 몸으로 막아서며 자신들을 위해 더 머물러 달라고 눈물로 호소를 했다. 그런 모습을 본 약전은 그토록 순한 주민들의 희망을 뿌리칠 수 없어 결국 주저앉고 말았다. 흑산도 근해의 수산물을 채집하고 기록한 책 <자산어보茲山魚譜>의 집필보다 민초들에게 더 큰사랑을 나누어 주는 진정한 ‘사랑의 전도사’가 아니었을까?


다산은 ‘자신의 고을로 유배온 사람들이 빨리 떠나기를 희망하는 경우는 있어도 더 있어 달라고 길을 가로막는 백성들은 일찍이 없었다.’ 라고 하며 형 약전의 인품을 더욱 아까워했었다. 지난 날 정조 또한 ‘약전은 준수함과 뛰어남이 아우보다 낫다.’라고 평할 정도로 재능과 인품을 겸비한 정약전이었다.




목민심서(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약전이 죽고 이 년이 지나서야 결국 유배에서 풀려나게 된다. 그것은 서용보와의 악연으로 해배되지 못하다가 서용보가 정계에서 물러나 있을 때에 유배 18년이 되어서야 풀려나게 된다.(서용보와 악연은 다산 1편 각주에 소개해 놓았다)


고향으로 돌아와 북한강을 유람하며 유유자적한 생활을 보내며 자신의 미완작 <목민심서>를 완성시키고, 또다시 <흠흠신서>를 집필하였으며, <아언각비>등을 저술하여 세상에 내 놓았다. 또한 다산에 대한 사면 복권의 논의가 있었으나, 돌아온 영의정 서용보의 강력한 반대에 이루어지지 못했다. 한 인물과의 악연이 이토록 집요하게 다산을 괴롭혔던 것이다.


악연이라면 또 한 인물을 빼 놓을 수 없다. 자신과 함께 과거에 합격한 동방친구 이기경李基慶이 있다. 다산과는 서학을 함께 읽으며 우정을 나누었던 벗이었으나, 정조가 다산을 비롯한 신서파를 총애하자 위협을 느낀 공서파가 그들을 몰아내기 위한 모략으로 일관했다. 그 핵심에 이기경이 있었는데, 그는 끊임없이 다산가문을 공격하며 괴롭혔다.


그는 서학에 연루된 이승훈이 감옥에서 이기경의 무고였다고 주장함으로서 풀려나자, 초토신草土臣으로 상소하여 불공정한 조사였다고 영의정 채제공을 비롯한 대신들을 헐뜯었다. 그러나 정조는 재 조사를 하는 것이 아니라 상소를 올린 이기경을 함경도 경원으로 유배를 보내버렸다. 주위에서 통쾌하게 여겼으나 다산은 그렇지가 않았다. 때때로 이기경의 집을 찾아가 어린 자식들을 어루만져 주며, 그의 어머니의 소상 때 돈을 보내 도와주기도 했었다.


다산초당 영정

또한 대사면이 있을 때 이기경만 명단에 빠져있었는데, 다산이 구명에 힘써 풀려나게 되었다. 그러나 아무도 이기경을 대하려 하지 않았지만 다산은, ‘친구란 친구로 삼았던 것을 없앨 수 없다.’며 평상시처럼 가까이 했다. 그런데 이기경은 그가 주모한 신유사옥에서까지도 끝까지 다산을 죽여 없애려했다.


끝까지 그랬던 까닭을 자세히 알지 못하지만 서학을 탄압하는데 앞장선 그로선 다산이 시기와 질투의 대상이었을 수도 있었을 법하다.


아무튼 우리는 유배객 본인들에겐 고통과 슬픔의 날들이었지만, 고립된 생활 속에서 보석 같은 우리의 문학과 학문을 세상에 내 놓으니 우리 후손들이 그들을 존경하고 흠모해 마지않는 까닭이다.


권력의 무상함과 모든 것들과 이별하며, 죽음보다 더한 멸문의 파도를 넘고 낮선 환경에서 질병과 혹독한 추위와 배고픔과 싸워야 했던 유배객이 이토록 주옥같은 명작을 이뤄낼 수 있었던 것은 그들이 추구하고자 했던 절개의 사상과, 목민관과 예술관, 그리고 앞선 정치철학이 있었다.


뼈에 사무친 절대고독도 그들의 학문적 문학적 예술적 열정 앞에서는 힘을 쓸 수 없었다. 때문에 그들은 몇 백 년의 세월이 흐른 지금까지도 우리들에게 참된 스승으로서 가슴 깊숙히 담겨 있는 까닭이다.



* 18이라는 경이로운 수


필자는 다산에 관한 자료를 찾으며 재미있는 것을 발견할 수 있었다. 다산 정약용과 ‘18’이라는 숫자와의 인연인데, 우리는 ‘18(십팔)’이라 하면 어휘상 부정적 욕지거리를 연상하곤 한다. 저급한 인생들에만 적용되는 터라 가만히 따져본 사연이지만, 그러나 다산 선생에게 남다른 의미가 분명하다.


숫자 18과 다산과의 인연은 이렇다.


22세(1783) 때 처음 다산이 진사시에 합격하고부터 정치적 동반자였던 정조와의 인연이 18년(정조가 승하한 해 1800년) 동안 이루어졌다. 그리고 다산의 나이 40이 되던 해, 1801년 유배 당한 후 해배되는 1818년(이것은 18이라는 숫자가 두 번씩이나 들어간다)까지 강진에서 18년 동안 유배되어 있었다.

그리고 해배되어 고향에서 집필에 몰두하며 18년의 여생을 보낸 후 세상을 떠났다. 또한 16세 때 처음 성호 이익의 서책을 접하고 18년 후(1795년) 금정찰방의 한직에 있을 때 온양 봉곡사에서 ‘성호학술대회’를 개최한 것. 또한 강진에서의 그 제자가 18명이었다.


참 쓸데없이 스토리텔링을 하지만 이것이 어쩌면 우연이 아닌 그 무엇이 있지 않을까? 하는 관심에서 생각해본 것이다. 문득 십팔(18)이라는 경이로운(?) 숫자를 무지막지한 욕지거리로 변질하여 다시는 입에 담지 말라는 뜻은 아닐까?


18이라는 숫자 말고도 이와 비슷한 인연이 다산에게는 또 있다.


처음 신유사옥 때 경상도 장기현으로 유배간 곳이 마현리이며, 다산이 태어나고 생활하다 조용히 묻힌 곳 이름 또한 마현마을이다.

다산 선생이 다산초당으로 적소를 옮겨가기 전에 생활했던 보은산 자락의 산 이름이 소의 귀를 닮았다 하여 우이산으로 다산이 서울에 거주할 당시 주변 산봉우리 이름과 같다. 또한 형 약전이 유배간 흑산도 이름이 우이섬이다. 또한 우이산 봉오리 이름이 형제봉이니 그들의 형제애가 남달라 더욱 애달프게 다가오는 것인지도 모른다.



임금의 은총을 한 몸에 안고서

궁궐의 은밀한 곳에 들어가 모셨으니,

참으로 임금의 심복이 되어

아침저녁으로 가까이 섬겼네.

하늘의 은총을 한 몸에 받은 데다

못난 충심衷心까지 가지게 되어,

정밀하게 육경六經을 연구하고

정미한 이치도 오묘하게 해석했네.

간사하고 아첨하는 무리들이 권세를 잡았지만

하늘은 버리지 않고 곱게 다듬으려 했으니,

시체를 잘 거두어 매장해 둔다면

장차 높이 또 멀리까지 들려 올리리라.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 (광중본壙中本)-








* 부디 필자의 어설픈 눌문訥文으로 조선의 석학을 넘어 우리 민족 최고의 지성을 감히 평하는 것에 누가 되지 않기를 간절하게 바란다.

* 또 하나 다산초당에서 백련사로 넘어가는 다산 정상 해월루 사진이 몇 번의 답사에도 불구하고 간곳 없다. 이 또한 선생께서 미련한 후손에 대한 질타로 받아 들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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