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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민牧民을 위한 실학자-정약용 ②

200년이 흘렀어도 다산 선생의 정신은 살아있네

by 박필우입니다

- 전남 강진 다산초당 터



“... 밤의 씨앗은 밤으로 탄생되고, 벼의 씨앗은 벼가 되는데, 그것을 이루어 내는 것은 씨와 토양이 같은 이치인 것인데, 옛 성인들이 교육과 예를 알게 한 근본은 필시 이것에 연유하는 것이라 생각됩니다.”




다산은 한 순간 정신이 번쩍 들었다. 하늘과 땅 사이 지극히 신묘한 뜻을 이렇게 벽진 곳에서 행인들에게 밥을 팔며 근근이 연명하던 할머니가 깨우쳐 열어준 것이니 어찌 당혹해 하지 않았을까. 그제야 다산은 단절시켜왔던 자신을 세상과 연결시키며 추구해야할 학문이 무엇인가를 크게 깨닫게 되었다. 단순히 술을 파는 주막이 아니라 ‘동문매반가東門賣飯家’의 이름에서 보듯 예사로운 할머니가 아니었던 것이다.


이로 인하여 유배 온 첫 해 다산은 작은 초막을 사의재四宜齋라 이름 짓고 글을 가르치기 시작했다. 사의재란 자신을 경계하는 말로서 ‘생각은 맑아야 하며, 용모는 엄숙해야 한다. 또한 말은 과묵해야 하며, 동작은 묵직해야 한다.’는 뜻이니 그가 추구하는 학문을 대하는 마음가짐에 대한 저변을 깔아놓았던 것이다.


그랬다. 그 후 부터 다산은 ‘미움만을 안고 살아가기엔 인생은 너무 짧다.’는 사실을 깨달았다. 좌절에 뉴한숨과 눈물로 세월을 허비한다면 가문과 아들은 물론이요, 꿈꾸어 왔던 세상과 학문 또한 여기서 멈출 것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곳은


그렇게 사의재에서 보은산 고성사 보은산방으로 옮겨가기까지 이곳에 머물며 학습에 몰두했다. 다산은 4년을 이곳 동문 밖 노파의 주막에 의탁하면서 주막집을 ‘동천여사東泉旅舍’라 일컫고, 그것에서 아전신분이었던 제자 황상黃裳(1788~1870)을 만나게 된다. 제자 황상에게 공부에는 왕도가 따로 있는 것이 아니라 근면함을 강조한다.


훗날 황상은 다산이 죽자 스승의 염을 직접 하였으며, 묘 터도 그가 점지해 주었다. 이처럼 다산은 천민 양반 구분 없이 아울러 화합하며 제자들을 길러내고, 다산이 해배되어 고향으로 돌아간 후에는 다산학당의 학풍을 이어받은 제자들에 의해 계속 이어지게 되는 것이다.


그 후, 주막을 떠나 보은산 자락의 고선사 산방에서 3년간 머물며, 이곳에서 승려들과 <주역周易>과 <예기禮記>를 연구하였으며, 불교의 사상에도 심취하게 된다. 그 뒤 목리 이학래집으로 옮긴 뒤 1808년 다산초당으로 옮길 때 까지 약 1년 반을 머물렀다.



8-5. 원교 이광사가 쓴 '대웅보전'.JPG 백련사 대웅보전(현판 글씨는 원교 이광사사 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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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지배이데올로기였던 주자 성리학을 극복하고자 관념론이 아닌 실천학문으로서의 경학이었으며, 민초의 아픔이 깊숙이 자리하고 있던 터라 그 해결책을 위한 저술에 몰두하게 된다. 때문에 그가 추구했던 실학은 단순히 학문으로만 그치는 것이 아니라 모든 생각과 사상들이 깨어있었던 실천학문의 선구자였다.


다산이 살던 세상은 썩어 악취가 풍기던 혼탁한 세상이었다. 사실 다산은 시대를 잘못 타고나 개인적인 고초를 겪었던 것이었다. 그러나 자신의 학문과 정신세계를 의연히 지켜내며 진취적이고, 양심적으로 행동하는 지식인이었다. ‘상시분속傷時憤俗’ 즉 ‘시대를 아파하고 세속적인 일에 분개할 마음이 없다면 시를 지을 필요가 없다.’고 했다.


성호를 통해 실학의 기초를 다졌던 다산은 공리공론의 성리학이 부패와 타락을 가속시키고 있을 때, 성리학의 본질적 기틀인 경학經學연구에 온 힘을 기울인 일련의 학자였으며, 사상가였다. 그는 성호를 통해 실학사상을 정립하였지만 그를 뛰어넘고자 노력하였으며, 탄압과 수탈의 늪에 빠져있던 백성들의 아픔을 가까이서 직접 보고 느낀 다산은 조선사회를 개혁하고자 노력해 왔다. 즉 학문의 헛된 이론에만 치우친 것이 아니라 사람들의 복된 삶을 위해, 병든 조선의 사회를 치유하고자 노력해 왔던 것이다. 바로 힘없는 백성을 착취하는 시대를 고발하고, 세상의 아픔을 자신의 아픔으로 느끼며, 그 아픔을 어떻게 치유하느냐? 하는 목적된 화두였다.


그리고 그의 사상들이 곧 집필로 나타났다.


관제와 군현제도 전제 부역 등 국가 경영을 위한 주제로 집필한 오늘날 개혁의 논리에도 손색없는 <경세유표經世遺表>가 있으며, 지방장관이 백성을 다스림에 있어 다해야할 덕목을 논리 정연하게 묶어놓은 오늘날 위정자들의 필독서(?)이며, 오늘날 부패와 타락을 방지할 집약체 <목민심서牧民心書>가 있다. 옥사에 관한 형행의 원칙인 형법서<흠흠신서欽欽新書>등을 포함해 500여권에 이르는 방대한 저술을 펼쳤다. 이것이 18년간의 전라도 강진 땅 유배지에서 체계화 시켰거나 집필한 유배의 학문이다. 다산의 유배학문은 그렇게 빛을 발했던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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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물을 평가할 때 계급이나 이해관계를 떠나 민民을 위하는 마음을 가진다면 선한 정치인이라 평한다. 그런데 위민爲民은 당시 유교정치이념에 들어가는 내용이므로 누구나 겉으로는 내세우고 있었다. 그러나 말로만 하는 위민이 아니라 실천하는 위민이어야 하는데, 다산이 위대한 점은 바로 학문적으로 뛰어났을 뿐 아니라 위민을 실천하는 인물이었다. 그의 위민의식이 얼마나 철저했는가를 잘 알려주는 실례가 있다.


다산 (8).jpg 다산초당 천일각. 다산은 저곳에 서서 바다를 바라보며 흑산도에[서 귀양살이하는 형 정약전을 떠올리며 눈물을 훔치곤 하였다

정조의 배려로 노론벽파들의 칼날을 피해 황해도 곡산군수로 발령을 받아 갔을 때였다. 당시 곡산은 큰 읍으로 도호부가 설치되어 있었으며, 이 일대는 탐관오리가 심하게 설쳤던 곳이었다. 이곳의 농민 이계심은 ‘백성들이 당하는 괴로움에 대해 말하기를 좋아하는 성격’이었다고 한다. 이른바 농민 지도자였다. 전 부사 때에 군포 값은 마구 올려서 거두어들이자 이계심은 농민 1천여 명을 이끌고 관가에 들어와 항의를 하였다. 농민 1천여 명을 이끌 수 있었다니 대단한 인물임에는 틀림이 없었다. 한편으로는 당시 농민들의 결집력이 커질 수 있었던 시대적 상황도 엿볼 수 있다.


그러나 농민의 항의를 제대로 들어주는 수령은 드물었다. 부사는 이계심을 잡아다 형벌에 처하려 하였지만 농민들이 벌떼처럼 일어나 지도자 이계심을 보호하며 소리를 질렀다. 이사이 이계심은 도망을 칠 수 있었고, 그러다가 다산이 부임하려고 곡산 땅에 이르자 이계심은 백성들이 괴로워하는 폐단 10여 조목을 기록하여 다산에게 비치고는 길가에 엎드려 자수하였다. 민란의 주동자를 엄하게 처벌하는 것이 관례였는데 이계심은 자신의 희생을 무릅쓴 것이었다. 호위무사들은 그를 체포하려하자 다산은 ‘그러지 말라, 한 번 자수한 사람은 스스로 도망가지 않는다.’는 이유였다. 이어 다산은 10개 조항을 읽고는 다음과 같은 말을 하였다.


“관장이 밝지 못하게 된 이유는 백성이 자기 몸을 위해서만 교활해져 폐막을 보고도 관장에게 항의하지 않기 때문이다. 너 같은 사람은 관에서 마땅히 천 냥의 돈을 주더라도 사야할 사람이다.”


다산의 이 한마디는 시대를 뛰어넘어서도 새길만한 중요한 의미가 담겨있다. 농민도 관을 두려워하지 않고 잘못한 일에는 비판을 하고 나서야 옳은 일이라는 주장이다. 따라서 이계심은 처벌의 대상이 아니라 장려되어야 할 포상의 대상이 되어야 했다. 당시 농민들은 지배층이 탐학을 하더라도 스스로 나서서 비판을 한다는 것은 주제넘고 악한일이라 처벌의 대상이 되었지만, 다산은 거꾸로 매우 옳고 정당한 행동으로 평가를 한 것이다. 이것이 진정한 앞선 위민의식이다. 후에는 다산은 서울 군영에 상납해야 할 모든 포목은 자신이 직접 면전에서 자로 재어 받아들였다.


그리고 다산은 상당히 과학과 물리적 사고에도 뛰어난 식견을 갖추고 있었다. 분수分數와 소장消長에 밝았으며, 역법이나 산수에도 능하였다. 즉 자연과학의 훌륭한 업적을 제대로 원용하여 한강의 부교를 설계하였으며, 아버지 삼년상 중에 정조의 명령으로 수원화성을 설계하여 바쳤다. 토목공학의 원리로 거중기擧重機를 이용하여 무려 4만냥의 건설비를 절약하였으며, 공사기간을 반으로 줄일 수 있었다. 지금의 수원화성은 옹성과 치 그리고 해자 등 성곽의 부속시설을 설치하였으며, 화살과 창검을 방어하는 구조뿐 아니라, 총포를 방어하는 근대적 성곽의 구조를 완성시켰다. 또한 재료를 규격화 하고, 기계장치를 이용해 만든 성곽의 완성도에서 그의 근대적 열린 사고를 확인할 수 있다.


또한 실학에 대한 관심이 무척 높았던 구체적 사례가 있다. 정조의 배려로 금정찰방金井察訪이란 한직으로 잠시 물러나 있을 때였다. 아산 봉곡사에서 성호 심포지엄을 연 것이다. 16세 때 처음 성호가 남긴 저술을 보고 실학을 결심하였으며, 18년 후 1795년 32살의 젊은 나이에 인근의 젊은 선비들과 목재木齋 이삼환李森煥 선생을 모시고 열흘 동안 성호의 유저를 교정해가며, 서로 실학에 열띤 토론을 벌이기도 했었다. 밤이면 뒷산에 올라 벗들과 호연지기를 나누며 자연의 이치를 논하였고, 아침이면 찬 얼음물에 냉수마찰을 하면서 정신을 맑게 가졌었다. 이렇게 하여 부족하지만 성호 이익의 <가례질서>를 교정하여 완성할 수 있었던 것이다. 이 외에도 그의 실학적 열린 학문의 세계는 수 없이 많지만 그만 접는다.


다산초당 터 뒤편 바위에 다산 선생이 새긴 '정석'. 비로소 정씨가 정을 붙일 만 한 곳이라는 뜻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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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세상의 인연은 무릇 따로 있는 것이었다. 18년이란 기나긴 유배생활 중에 다산은 우연히 백련사에 들렸다가 해남 대흥사의 혜장선사를 만나게 된다. 대선사와 당대의 석학이 서로 만났으니 10살 연하의 혜장이었지만 서로 뜻이 통하고 학문이 통하니 유儒·불佛 경전을 함께 연구하였으며, 서로의 학문만을 주장하지 않고 서로를 인정하면서 열린 사고로 함께 나누었다.


둘은 백련사와 다산초당을 오가며 서로에 대해 정을 나누고 지식을 탐하였으며, 세상의 이치를 깨달아 갔다. 때마침 다산이 유배온지 8년, 1808년 봄. 윤박이라는 사람이 백련사 뒤 정자를 내어주어 이후 10년간 그곳에서 유배생활을 하게 되면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바로 그 뒤의 산이 다산茶山이었고, 그곳에 초당을 지어 살았으니 ‘다산초당茶山草堂’이 된 것이었으며, 다산茶山은 남들이 그를 부르던 호칭이었다. 다산은 초당 뒤에 작은 우물을 파고, 앞의 작은 마당에 자연석을 놓아 찻물을 다렸다.





인공연못을 만들어 물고기를 기르고, 천일각天日閣을 지어 멀리 바다를 바라보며 ‘혹여 천일이 지나면 해배될 것인가?’ 상념에 흑산도로 유배간 형 약전을 그리며 한숨을 놓기도 하였다. 또한 뒤편 큰 바위에 정석丁石이라고 글을 쓰고 이곳이 자신의 생활근거지라는 뜻으로 자신을 다독였다.


귀양살이에도 정신을 맑게 하여 차분한 마음으로 자연과 벗하며, 학문에 정진하게 된다. 바로 그렇게 하여 이곳에서 그의 학문이 완성된다. 1817년<경세유표>를 완성하였으며, 1818년<목민심서>를 집필하였다. 그리고 그 기반으로 하여 해배된 후 고향에서 <흠흠신서>를 완성시키니, 학문적 업적이 빛나게 되는 까닭이다.(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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