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0년이 흘렀어도 다산 선생의 정신은 살아있네
세상엔 어둠이 찾아오고 있었다. 하늘엔 달무리가 애절한 증표의 고리처럼 둥글게 떠오르고, 구름이 사랑을 나누듯 지나가는 고요한 저녁이었지만, 맑은 하늘아래 세상은 그렇지가 못했다. 시린 눈으로 올려다보는 하늘은 이들에겐 더 큰 아픔으로 다가왔으며, 투명한 달무리는 가슴에 슬픔의 연결고리로 작용을 했다. 고관대작으로 살다가 하루아침에 죄인의 몸이 된 사람에겐 절망의 나락에 서 있는 것이었으며, 세상에 버림받은 인생으로 전락해 버린 것이었다. 더불어 그해 남도의 겨울은 썩은 세상을 질타라도 하듯 유난히 추웠다.
때는 1801년 12월 초순, 살을 에는 추운 겨울날이었다. 전라도 나주의 밤남정 삼거리 작은 초막에서 형제는 눈물로서 밤을 보내고 있었다. 이 밤이 지나고 아침이면 미래를 기약할 수 없는 절망의 세상으로 서로 떨어져야 했다. 하나는 절해고도 흑산도로, 또 하나는 이 땅의 끝, 극변 강진으로 유배되어 가는 것이다. 형제는 서로를 부여안고 서로를 애통해 하고 있었다. 그러나 누가 알았을까? 이렇게 헤어져 영영 만나지 못하게 되는 마지막 밤이 될 줄은.
이들이 바로 실학을 집대성하여 완성시킨 우리나라를 대표하는 목민학자 다산茶山 정약용丁若鏞(1762~1836)과, 유배지 흑산도에서 <자산어보>를 지은 그의 형 손암巽庵 정약전丁若銓(1758~1816)이다. 8대 연속 홍문관 학사를 배출했던 명문집안은 이렇게 풍비박산이 되어 이제 한치 앞도 알 수 없는 처량한 신세가 되고 만 것이다. 정약용의 나이 불혹의 40세며, 정약전의 나이 44세 때였다.
-율정별리/ 다산 정약용-
22세 때 진사시에 합격하여 성균관으로 들어온 정약용은 28세에 대과에 합격하여 자신보다 10살 연상인 정조를 가까이서 모시게 된다. 그런 정약용에 대한 정조의 믿음은 남달랐으며, 그런 믿음을 한 번도 거스른 적이 없었던 그였다. 그는 정조의 총애아래 승승장구하였으나, 노론벽파의 끊임없는 견제와 음모에 늘 시달렸다. 그러나 그때마다 정조는 한직으로 잠시 물러나 있게 하거나, 정조 자신이 직접 그를 대변해 주며, 정적들로부터 예봉을 비켜가게 해주었던 것이다.
그러나 자신의 정치적 후견인 영의정 번암樊巖 채제공蔡濟恭(1720~1799)이 세상과 이별하고, 뒤이어 1800년에 정조대왕이 승하하면서 정약용의 인생에 어두운 먹구름이 몰려오기 시작했다. 그 당시의 상황을 다산이 기록해 놓은 글을 보자.
(상략)
“아전이 말하기를, 유시를 내리실 때 얼굴빛이 못 견디게 그리워 하셨고, 말씀은 온화하고 부드러워 다른 때와는 달랐다고 했다. 감격하여 눈물을 흘리고 마음이 동요되어 어찌할 줄 몰라 했는데, 그 다음날부터 임금의 건강에 탈이 났다. 28일에 이르러 하늘이 무너지고 말았다. 그날 밤에 하인을 보내 책을 하사해 주시고 안부를 물어 주신 것이 끝내는 영결의 말씀이었다. 임금과 신하의 정의情誼는 그날 밤으로 영원히 끝나고 말았다. 나는 이 일에 생각이 미칠 때마다 눈물이 홍수처럼 쏟아짐을 참지 못하곤 한다.
임금이 승하하신 날 급보를 듣고 홍화문弘化門 앞에 이르러 조득영趙得永을 만나 서로 목 놓아 울었었다.(중략)
공제公除의 날이 지난 뒤부터 점차 들리는 소리는 악당들이 참새 떼 뛰듯 날뛰며 날마다 유언비어와 위험스러운 이야기를 지어내고 사람들을 현혹시키고 있다. “이가환 등이 앞으로 난리를 꾸며 4흉 8적四凶八賊을 제거한다.”는 이야기까지 꾸며대고는 그 네 명과 여덟 명의 이름에 절반은 당시의 재상들과 명사들의 이름이 끼여 있었고, 절반은 자기네들 음흉한 무리들의 이름을 끼워 넣고는 당시의 사람들에게 분노를 유발시키게 하고 있었다. 나는 화란의 낌새가 날로 급박해짐을 헤아리고 곧바로 처자를 마현으로 돌려보내고 혼자 서울에 머무르며 세상 변해 가는 것을 관찰하고 있었다. 겨울에 임금의 졸곡卒哭이 지나자 영영 열상洌上으로 낙향해버리고는 오직 초하루나 보름날의 곡반哭班에 참가할 뿐이었다.
-정약용. <자찬묘지명自撰墓誌銘>(집중본集中本)-
그의 염려처럼 정조의 뒤를 이어 11살이던 순조가 즉위하자 순정대비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노론벽파들이 전권을 장악했다. 그들은 남인이며 시파의 핵심이었던 정약용을 그냥 둘리 없었다. 친가의 아버지와 형제들을 제거했던 정조에 앙심을 품었던 순정대비는 노론벽파의 주장에 동조하면서 신유사옥(1801, 순조1년)①이 일어나게 된다. 즉 ‘사학금지교서’를 내리면서 사학의 씨를 말리기 시작했던 것이다. 기실 말이야 사학처벌이었지만, 한 때 서학을 접했던 정약용과 남인시파들을 제거하기 위한 음모였다. 결국 재능은 뛰어났으나 닫힌 시대, 당쟁의 혼탁한 시류에 인재들은 아까운 희생물이 되고 말았다.
위 좌측부터 손암 정약전 선생이 흑산도에서 쓴 '자산어보', 강진 다산초당에 걸린 다산 선생 영정, 제주도 정난정 묘, 공재 윤두서 자화상(다산 선생의 외증조이다)
이 사건으로 조선 최초의 영세천주교도 다산의 매형 이승훈이 처형당했으며, 다산의 학문적 연결고리인 성호星湖 이익李瀷(1681~1763)의 종손 이가환李家煥도 이때 죽음을 면치 못했다. 또한 다산의 셋째형 약종은 진실한 신앙으로 떳떳이 죽음으로써 순교했으며, 그의 아들 철상, 하상, 딸 정혜도 천주교로 인해 요절하고 말았다. 그러나 혐의가 없음에도 형 약전은 신지도로, 자신은 경상도 장기땅으로 유배되나 이것이 끝이 아니었다.
그해 10월 ‘황사영백서사건’② 이 터지자 다시 서울로 불려와 다시 감옥에 갇히게 된다. 정조가 없는 세상의 다산은 자신이 쓴 서학이 아님을 밝히는 상소, 즉 <자명소>를 문제 삼아 끝까지 물고 늘어진 노론벽파들의 음모를 피해갈 수 없었다.
결국 자신의 조카사위였던 황사영은 능지처참을 당했으며, 황사영의 어머니는 거제도로, 아내인 다산의 조카 정난주는 전라도 제주목 대정현의 관비로, 아무것도 모르는 두 살배기 아들③은 어머니의 품과 떨어져 추자도로 보내졌다.
그러나 다산은 모진 고문에도 꿋꿋이 자신의 결백을 주장했다. 결국 그들은 다산에게 아무런 혐의를 밝혀내지 못했으나, 악연 서용보④의 주장대로 그들은 다산을 그냥 내버려두지 않았다. 다산의 정적 공서파의 홍희윤은 ‘천사람을 죽이고도 정약용을 죽이지 못하면 아무 소용이 없다.’고 할 정도였다. 결국 그의 형 약전과 함께 또다시 유배길에 오르게 된 사연이었다. 이토록 집안이 몰락해 버리고 앞날이 캄캄한 두 형제의 마지막 밤은 유수와 같이 지나가고 말았다. 아침이 되자 둘은 서로 눈물로 이별을 하고, 각자의 귀양지로 향했다. 흑산도로, 또 강진 땅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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혹독한 겨울이 지나고 봄은 또 마법처럼 그렇게 찾아왔다. 비록 유배된 몸이라 하여도 밥은 먹어야 했으며, 잠은 청해야 했다. 그러나 노론벽파의 정적인 자신을 달갑게 맞아줄 곳은 아무 곳도 없었다. 시시 때때로 모함에 빠졌으며, 다산의 주변사람들에게 고초를 안겨주었다. 어느 누구도 다산을 반겨줄리 만무했다.
감시의 눈길을 피할 수 없었던 다산은 결국 초라한 밥집 한 귀퉁이에서 궁핍한 생활을 하며, 술과 한탄으로 세월을 보내고 있었다. 멀리 흑산도로 귀양간 형님이 유난히 그립고, 화사한 봄날 떨어지는 꽃잎에도 한숨지으며 눈물을 떨구는 까닭이었다. 또한 밤이란 놈은 낙락의 맛을 극대화 시켜 주었으며, 밝은 대명천지의 대낮은 슬픔으로 억눌렀다. 세월을 먹을수록 과거의 여파는 더 모질게 밀려오곤 했다.
그러던 어느 날이었다. 때 이른 봄비가 내리자, 다산의 가슴은 처연하게 슬픔으로 밀려오고 있었다. 그러다 아무도 반기지 않은 이곳에서 작은 둥지를 틀수 있게 배려하며, 안부가 걱정되어 한 번씩 들여다보는 주막의 노파가 마당을 가로질러 건너왔다. 노파는 그렇게 세월을 허송하고 있는 다산을 향해 의외의 말을 건넸다.
“그렇게 빈둥대며 헛되이 세상을 살지 말고 제자라도 키우시구려.”
다산이 이곳 강진으로 유배온 것에도 어쩌면 우연이 아니라는 생각이었다. 이 노파와의 인연을 비롯하여, 가까운 곳 해남은 자신의 외가가 있는 곳이었다. 바로 어머니 윤씨는 역법, 천문, 지리, 서화에 능통했던 공재恭齋 윤두서尹斗緖의 손녀딸이었으며, 멀리는 고산 윤선도의 후손이었으니 외가의 기운을 이어받았다고도 할 수 있었다. 그러니 후에 가까운 그곳에서 수많은 서책을 얻어다가 공부할 수 있었던 것이다.
각설하고, 다산은 무지하게만 생각했던 노파의 입에서 나온 말에 깨달은 바가 있었다. 유배인의 처지가 된 후 학문이란 한낱 바람과 같은 것이라 생각했었으나, 이어서 나온 자연의 순한 이치를 이루는 노파의 말은 더욱 당혹하게 만들고 말았다.
(계속)
① 신유사옥/ 1801년, 정조가 승하하고 11살의 어린 순조가 왕위를 이어받자 영조의 비였던 순정대비가 대리청정을 하면서 서학, 즉 천주교 박해가 일어나게 된다. 당시의 조선은 ‘오가작통법’이란 것이 있어 다섯 집 중 한 집에만 천주신자가 있으면 모두가 처벌을 받게 되는 연좌제가 실행되었는데 이 옥사로 죽은 신도만 300여명이나 되었다.
② 황서영백서사건/1801년에 일어난 천주교인 박해사건. 당대의 천재라 소문난 황서영은 다산의 맏형 정약현의 딸 명련과 결혼했다. 조선사람으로 변복을 하고 조선땅에 들어온 주문모신부와 상종하면서 서학에 빠졌으며, 신유년 천주교 박해의 전말과 향후 조선의 천주교재건을 위한 방책을 흰 비단에 적어 북경의 교주에게 보내려 한 사건이다.
③ 황사영의 아들 황인보/ 우리나라 가장어린 유배자(두살). 추자도에 버려졌으나 소풀을 먹이러 왔던 오상선씨가 아이를 발견하고 친자식처럼 키웠다. 지금도 오씨와 황씨는 혼인을 하지 않고 한 집안처럼 지내고 있다.
④ 서용보와의 악연/ 다산 정약용이 경기도 암행감찰시 서용보의 비리를 밝혀내 정조에게 고하였다. 이로 인해 서용보는 다산에게 앙심을 품게 된다. 신유사옥 때에도 모든 대신들이 다산의 두 형제를 풀어주라고 하였으나 유독 서용보만이 강하게 반대하여 이루어 지지 않았으며, 강진에 유배된 뒤에도 정순대비가 정약용의 해배명령을 하였으나 서용보가 반대하는 바람에 이루어 질 수 없었다. 결국 1818년 그가 정계에서 물러난 뒤 정약용은 풀려날 수 있었다. 또한 정약용의 사면복권 논의가 이루어 졌을 때에 서용보는 영의정에 발탁되어 끝내 반대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