때는 통일신라 헌강왕 지방호족 세력이 날로 커지자 퇴폐와 쾌락을 쫓던 궁궐에서는 궁여지책으로 지방 호족들의 자제들을 서라벌로 불러올려 벼슬자리를 하나씩 마련해 주는 정책을 단행했다.
그것도 지방 대학 출신들에게는 언감생심 꿈도 꾸어보지 못할 육두품인 청와대 실 국장의 관직에까지 올라 헌강왕을 최측근에서 보필하게 하였으며, 어디 그것뿐이던가 보너스로 허접하게 촌티가 팍팍 풍기는 시골 아낙이 아니라, 발라당 까지고 세련 덩어리인 아리따운 서라벌 여자까지 품에 안겨주고 보니 처용은 한동안 권력과 여자의 치마폭에 휩싸여 자의 반, 타의 반, 비몽사몽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술과 여자와 권력과 휘영청 밝은 달밤이라. 처용은 그 분위기에 휩싸여 한동안 정신을 차리지 못하다가 어느 때부터인가 문득문득 피폐해지는 자신을 느끼게 되었다. 말이야 벼슬자리지, 기실 지방호족들의 야망을 견제할 목적으로 인질로 잡혀있는 신세인지라 집에 두고 온 부모형제들의 그리움이 가슴을 헤집기 시작했다.
아리따운 아내는 나를 포섭하기 위한 미끼였으니, 아내 또한 진정으로 나를 사모하는 것이 아님에야 무슨 의심이 있으랴! 처용은 상념을 잊어버리기라도 하듯 자신과 처지가 비슷한 벗들을 찾아 그렇게 밤마다 술로 세월을 죽이고 있었다. 그러길 몇 년 하고도 몇 달.
모월 보름, 하늘엔 밝은 달이 휘영청 떠오르고, 밤인지 낮인지 아리송한 대낮같이 밝은 밤. 여느 날처럼 벗들과 달빛에 흠뻑 취해 밤새 노니다가 게슴츠레한 눈을 하고 비틀비틀 집으로 돌아왔다. 그런데 아뿔싸! 감히 누가 내 아내를 범하고 있다. 아니, 범한다는 것은 힘이 센 남성이 무력으로 상대의 반항 의지를 꺾어 강제로 욕을 보인다고 하지만, 이것들은 합의를 보고, 숫제 교교한 음성까지 내뱉으며 교접하는 꼬락서니를 보자니 피가 거꾸로 치솟았다.
속마음이야 ‘이런 쳐 죽일 년 놈들!’ 하고 흥분했을지 모를 일이나, 가만히 보니 '엄마야!' 봉당에 벗어둔 놈의 신발 크기가 항공모함만 하고, 아내에게 용을 써대는 모습을 보니 따라갈래 갈 수 없는 기력이 넘쳐흐른다. 발바닥 또한 울퉁불퉁한 것이 힘깨나 쓰는 장사 같은지라, 취기가 덜 가신 처용의 눈에서 불빛이 추르르 돌았지만, 그것도 잠시 곧바로 꼬랑지를 내리고 말았다.
이참에 차라리 잘된 일일지도 모른다는 생각이 들었다. 어쩌면 핑계 삼아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다는 희망이 가슴속에 꿈틀거리고 있었다. 떠나올 때 동신목 아래서 눈물을 훔치며 뛰어가던 순박한 정혼녀의 얼굴이 뇌리를 스쳤다. 세련되진 않았지만, 순정이 있었고 복사꽃 볼그레한 얼굴빛 수줍음을 타던 그녀 모습이 그리웠다.
떡 본 김에 제사 지내고, 넘어진 김에 쉬어가자는 생각이 처용의 머리를 스치고 지나갔다. 그러나 그냥 모른 척 내버려 두기엔 자존심이 허락하지 않았다. 두 연놈이 남녀상열지사에 심취한 나머지 처용이 마당 안으로 들어선 줄도 모르고, 아니 문이나 처닫던가, 문이 열려 있는지도 모른 채 이 밤을 황홀하게 불태우고 있었다.
어차피 방안의 그놈과 힘으로 붙어봐야 승패는 불 보듯 빤한 노릇이고, 또한 제 여자 하나 제대로 간수 못 하는 신생 사대부 처신이 오히려 세상에 쪽팔릴 것이 빤하니, 시끄럽게 해봐야 득 될 게 없다는 생각이 빠르게 지나갔다. 그리곤 취기가 덜 가신 몸뚱아리로 달밤을 조명 삼아 한바탕 놀기를 자처하였다.
처용은 그때부터 노래하며 춤을 추기 시작했다. 그것이 [처용가]였고 처용무다.
노랫소리에 화들짝 놀란 두 연놈은 밖에서 춤추며 노래하는 처용을 확인하곤 하던 짓을 멈추고 급하게 옷깃을 여미는 둥 마는 둥 밖으로 나온 놈은 기골이 장대한 그 사내였다. 처용의 아내는 막 윗옷을 추스르고 이불을 목까지 감아올려 아직 잔재가 가시지 않은 애욕의 숨을 다스리며 고르기에 들어갔다.
밖으로 나온 사내는 역지사지라. 만약 자신의 아내를 범하는 자가 있다면 돌로 쳐 죽일 법하나, 이 놈은 오히려 노래하며 춤을 추고 있다니? 술에 취해도 보통 취한 것이 아니로구나! 하며 생각하였다가, 술에 고주망태가 되어 조용히 넘어가주는 처용이 고마웠다. 감히 육두품의 벼슬아치 아내를 범하다가 현장에서 들켜 버리고 말았으니 힘으로야 어찌해볼 도리가 있다지만, 어차피 쫓기는 신세가 될 터이고, 저놈은 지금 나라 안팎의 사정으로 보아 정략적 이용 가치가 무한한 자본이니 오히려 조용한 것이 안심되었다.
팀 버튼 작.
그러나 놈도 인간인지라, 한편으론 미미하게나마 부끄러워지기도 하였다. 상대가 춤과 노래를 멈추자, 놈은 얼른 할 말이 생각나질 않아 쭈뼛쭈뼛 서 있다가 그만 민망하여 고개를 숙였다. 그러다 무엇이 생각난 듯 다시 무릎을 꿇고는 머리를 땅에 처박았다. 그런 후 그 특유의 시나리오를 읊조리기 시작했다. 아마도 취기가 무진장 남아 있는 처용의 모습에 용기도 생겨났거니와, 처용의 아내를 이렇게까지 만들었던 평소 자신의 달변에 자신감이 충만했던 터라 막힘없이 줄줄 엮어냈다.
“선생님 오늘 저의 무례를 용서하여 주소서! 저는 사실 사람이 아니오라 역병을 창궐하는 잡귀 이옵니다. 선생님의 하해와 같이 넓으신 마음 씀씀이와 대범함과 아내를 사랑하는 마음은 물론이요,(이 대목에선 목소리를 깔아 힘을 주며) 지혜를 겸비한 너그러우신 인성으로 그 명성이 지하세계에까지 닿아있어 잡다한 역병들과 내기를 하였사온 즉, 내 오늘 천연두 마마 홍역 몽달귀신 처녀귀신 총각귀신 할배귀신 할매귀신 한 많은 전쟁귀신 그리고 변소귀신 달걀귀신 저 멀리 수입품인 일본뇌염과 홍콩 독감 콜레라와 장티푸스 에볼라 바이러스는 물론 매독 에이즈 메르스 사스 우한독감 코로나 바이러스를 대표해서 님의 명성을 확인코자 들려 감히 선생님을 실험하였습니다.”
이쯤에서 말을 멈추고 침을 꼴까닥 삼키며 처용을 올려다보았다. 구름을 희롱하며 유유히 흐르는 달빛을 등지고, 그 아래 게슴츠레한 눈으로 자신을 굽어보고 있지만, 비틀비틀 몸을 가누기 힘든 처용을 재차 확인한 후 다시금 말을 빠르게 이어갔다.
“이로써 오늘 확인한 바, 역시 선생님의 명성이 허황된 것이 아님이 드러났습니다. 이후로 다시는 선생님 집 근처에는 얼씬도 하지 않을 터이니 부디 용서를 구합니다!”
말을 마친 놈이 머리를 바닥에 쿵! 하고 찍고는, 멍청하게 서 있는 처용의 대답도 듣지 않고 쏜살같이 밖으로 도망치듯 나가버렸다. 처용도 속으로 ‘그놈 참, 억시기 똑똑하나 말이 많구나!’ 이렇게 생각하고 있을 때쯤 이미 그놈은 삽짝 밖으로 사라지고 난 뒤이니, 처용은 허허로운 가슴이 되어 한참을 그렇게 서 있었다.
이렇게까지 쉽게 풀려버릴 줄은 몰랐으나, 너무 쉽게 마무리된 것에 대한 아쉬움이 남았다. 그리고 현장을 목도했으나, 그것은 사람이 아니라 귀신이었다는 말이고, 비틀대며 방 안으로 들어가자, 어질러진 방은 아내가 깔끔하게 정리 한 뒤였다. 처용의 아내는 새침하게 내숭을 떨며 전부터 그렇게 있었다는 듯 자수 놓기를 하고 있다가 방 안으로 들어서는 처용을 보자, 발딱 일어나 오매불망 기다리던 서방님 반기듯 반갑게 맞이하게 되니, 처용도 그만 어안이 벙벙하여 사실인지 꿈인지 취기에 헛것을 보았는지, 도저히 감이 오질 않더라!
만약 사실이었대도 별도리가 없지만, 그놈이 자신의 자존심을 한껏 치켜세우고 도망을 갔으니 그로써 만족할 수밖에 없었다. 하여간 처용은 점점 기분이 좋아지는 자신이 이상하다? 이상하다? 생각하며 휘감겨 오는 아내 힘에 이부자리에 쓰러지고 말았다.
아침에 일어난 처용은 머리가 빠개질 듯 아팠다. 어젯밤 일이 꿈이었는지 생시였는지 알쏭달쏭 한 마음이 되어 기억을 더듬으려 애를 쓰던 그때, 아내가 묘한 표정으로 배시시 웃음을 흘리며 꿀물 한 대접을 타서 들고 방으로 들어왔다. 처용은 평소와 다른 행동을 하는 아내를 의심스럽게 바라보았지만, 야릇한 미소를 흘리는 아내를 보며 인정하고 싶지 않은 현실에서 갈등과 자존심이 뒤섞여 바보처럼 가슴만 막혔다. 그리고 아내의 말에 처용은 다시금 머리가 어벙해졌던 것이다.
“어젯밤에 마당에서 혼자 춤추며 노래하고 자알~ 놀던데예!”
“어. 내가 그랬나? 이히히…, 니 봤나?”
그 이후 그날 밤 처용이 불렀던 노래는 누구의 입을 통해 서라벌에 퍼지게 된다. 얼마가 지난 후 그날 밤에 있었던 일이 꿈이 아니라 모두 사실이었음을 깨닫게 되지만, 이미 자신의 초상이 귀신을 물리치는 부적으로 변한 후였으니 오호통제라! 세상 쪽팔려 이를 어이할꼬?
이때부터 처용의 초상이 악귀나 질병을 물리치는 '벽사'의 반열에 올랐으니 그리 억울해할 일도 아닌 것을.
* 우리 민족 전통을 지키려 애쓰는 '처용무 보존회'에 용서를 구한다. 이 글은 상상력에 재미를 더하며 꾸민 허구다.
- 음력 섣달 그믐 악귀를 몰아내고 새해 평안을 기원한다는 '처용무'는 현재에도 재현되고 있다. 궁중의 춤으로 알려진 처용무는신라 49대 헌강왕 설화에서 기반하지만, 역사적 흐름으로 볼 때 처용이 서역인이라는 설이 유력하다. 이미 통일신라 경주는 당시 실크로도 동단기점으로 서역의 문물들이 밀려들기 시작했고, 울산 바다를 통한 무역이 활발하게 이루어졌다. 새로운 문화를 받아들인 신라인은 우리 민족 특유의 아름다움으로 재 가공해 서역에 송출했던 것이다. 경주 괘릉의 원성왕릉 무인석상이 이를 잘 설명해주고 있다. 이 외에도 왕릉 면석의 서역인상이나, 왕릉 부장품에서도 알 수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