회색 노트
밤
심호흡을 한다. 생각이 쏟아지는 밤이다.
주변의 흡수자로 오랜 시간을 살면서 나는 내가 스스로 생각하는 방법을 잊어가고 있다는 사실을 눈치 채지 못했다. 누워만 있는 인간은 결국 스스로 걸을 수 없게 되듯이, 점차 죽어가는 뇌가 잘 살아간다고 믿으며 지내 왔다. 아주 흔한 어리석음이다.
그런 시간이 쌓여 나는 어느 새 타인의 생각으로 꽉 차고, 심지어 꽤나 굳어진 자아를 가지게 되었다. 믿어지는가. 나로 이루어졌다 믿은 그 덩어리가 실은 온통 보고 들은 것으로 이루어지게 되었다는 것이. 내가 원한다 말한 것에 나는 별로 없었다.
사람은 변한다.
애초에 정체된 무언가가 아니니 변한다는 표현이 걸맞지 않을지도 모른다. 누가 파도를 변한다고 하는가. 그저 움직일 뿐. 나는 끊임 없이 움직이는 존재이면서 지나치게 확신하고 규정하려 들었다.
방을 정리했다.
과거에 예쁘다고 환호성을 지르고, 내 손에 들어온 것을 자랑스레 여기던 많은 물건을 버렸다. 그것들을 샀으면 안됐다. 그 마음이 빛바랠 것을 내가 정말 몰랐나.
이제는 그 어느 누구에게도 의미가 없어진 것들을 쓰레기통으로 밀어넣으며 내가 도대체 어떤 인간인가 생각했다. 그 마음이 언젠가는 흩어질 것을 모르지는 않았던 것 같다. 그냥 그 순간의 어떤 욕구에 손을 들어 주었을 뿐이다.
어릴 때는 의미 있는 삶을 살고 싶어 했다. 그런 것이 어딘가에 존재한다고 믿었다. 지금은 의미라는 것이 어디에서 생기는지 몰라서 혼란을 겪는다. 오늘 밤이 지나고 나면 가볍던 선택들이 가볍지 않게 될 것 같아, 마음에 새로운 돌덩이를 매달고 걷게 될 것 같아 겁이 나기도 한다.
무언가 늘 욕심이 많았던 것 같은데, 많이 가지고, 많이 알고, 많이 경험하고 싶어 했는데, 그리고 그것들을 인정 받고 싶어했는데 그들에 어떤 의미가 있는지 적어보려고 하면 한 자도 못 적겠다. 바다 건너의 땅을 밟고, 수많은 사진들을 쥐고, 그 감상을 적어내린 노트 한 권을 더 가지게 되는 동안 나는 더 괜찮은 인간으로 성장했나? 아니, 반드시 그랬어야 했나?
짧고 자극적인 정보가 눈 앞을 수 없이 스쳐가는 동안 발목 밑이 서서히 잘려 나갔나보다.
걷고 있다는 착각, 어딘가로 향해 가고 있다는 착각, 그리고 무언가를 쌓아 올려가고 있다는 착각.
스스로 걷는 인간이 되어야겠다. 스스로 생각하고 스스로 걷는 인간.
낮
더 이상은 그 시선이 나에게 중요하지 않다는 생각이 들었다.
누군가가 '너는 어떤 사람이더라', '너는 어떤 특성을 가지고 있더라' 라고 말하는 것에 무게를 실어주지 않기로 한 것이다. 타인의 평가에 힘을 실어줄수록 나의 중심에 실리는 무게가 줄어든다는 것을 오랜 시간에 걸쳐 확인해왔다.
나와 가까운 사람이라고 나에 대해 잘 아는 것은 아니다.
보통 가까운 이들은 오만함을 가진다. 난 널 잘 알아, 너는 이렇잖아, 그런 말들이 나를 가장 위험에 빠트리기 쉽다. 그 말들이 무슨 근거와 신용을 가진 것처럼 착각하게 되므로.
그런 착각의 혼란 속에서 오랜 시간을 보내다보니 더 이상 나에 대해 누군가와 크게 공유하고 싶지 않다는 생각도 들었다. 꿈꾸는 것, 인생의 지향점, 선호, 불호, 두려움, 자신감, 강점, 약점, 사랑하는 것들, ...
그 모든 것을 누군가와 쉽게 공유해왔지만, 거기엔 위험이 따르기도 했던 것이다. 나는 오랫동안 나에 대해 말하고 들으며 나에 대한 중심을 거의 뿌리까지 잃어버렸다.
가까운 만큼, 나를 아끼는 만큼 나에게 도움이 되는 것은 아니다.
사람들은 자신의 가치관과 생각이 옳다는 사실을(착각을) 인정 받기 위해 얼마든지 타인을 삼킬 준비를 한다. 본인이 어떤 영향을 미치고 있는지를 눈치채지 못한다. 나도 눈치 채지 못했다. 쉼없이 가볍게 말하며 누군가를 쥐고 흔들었는지도 모른다.
말은 굉장히 위험한 것이다. 굉장히 날카롭고, 잔인하고, 누군가의 인생을 송두리째 바꾸어 놓을 수도 있다.
그 위험성을 모르는 이들을 누군가에게는 위험한 존재가 된다.
우리는 쉽게 죄책감 없이 사람을 집어삼킨 후 악의 없이 웃는다. 아무것도 모른 채 웃는 얼굴. 서로를 해치는지도 모르고 이어지는 해맑은 대화가 슬프다.
책
노트에 적은 문장들.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지 마라.
스스로의 판단을 따르기 보단 앞선 사람을 따라 걷다 보면 제대로 판단하는 법을 배우지 못하고, 남의 말만 믿고 싶어진다.그렇게 잘못된 선례가 이 사람, 저 사람에게 이어지다보면 결국 모두가 파멸에 이르게 되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무작정 남이 하는 대로 따라 살기 보다는 군중들과 멀찌감치 떨어져 건강한 삶을 회복하려고 애써야 한다.
-세네카
(전략)
그러나 내 행동을 확대할 때는 오로지 내 의사만을 좇는다.
그대가 비굴한지 잔인한지 충실한지 경건한지 아는 자는 그대밖에 없다. 다른 사람들은 그대를 보지 못한다. 그들은 불확실한 추측으로 그대를 짐작한다. 그들은 그대의 기교를 보는 만큼 그대의 본성을 보지 못한다. 그러니 그들의 판단에 매이지 말라. 그대 양심의 판단을 존중하라.
-미셸 드 몽테뉴, [수상록] '어떤 원칙으로 우리의 행위를 조절할 것인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