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을 모으는 행위

by 연의 창가

책을 사는 행위는 거기 들어 있는 정보를 원했던 ‘자신의 사고회로를 표시해둔다’는 의미가 있다.

-사마고 이치로, [나는 매일 서점에 간다] p.81

어릴 때는 정말 책을 많이 읽었지만 요즘은 책을 잘 읽지 않는다. 평범한 현대의 도파민 중독자로써 보통은 핸드폰을 보는 편이고.. 책은 매일 한 번은 읽는 것 같지만 아주 잠깐 몇 페이지를 뒤적이는 게 다일 뿐이다. 그럼에도 책을 사서 모으는 것에는 중독되어 있다. 성인이 되고 책을 내 손으로 사 모으기 쉬워진 이후부터는 집에 책이 계속 쌓인다. 그 동안 사놓고 책을 읽지 않는 자신에 대해 꽤나 두터운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는데 사마고 이치로의 [나는 매일 서점에 간다]를 읽으면서 좀 위안도 되고 공감도 하고.

사마고 이치로는 읽지 않더라도 책을 사는 행위를 적극 추천한다. 나 역시나 그간 나쁘지 않은 소비였다고 생각한다. 집에 5년을 쳐박아둬도 어느 날 마음이 이끌려 결국은 읽게 되는 게 책이다. 그리고 그 책을 읽지 않더라도, 그 책을 읽고 싶어했던 나의 순간을 수집할 수 있다.

그런 의미에서 이번에 제주도에 가서 사온, 아직 읽지는 않았으나 모은 책 3권을 기록한다.


A. 박연준, [쓰는 기분]

평소 기록에 집착해 왔기 때문에 사고 싶어진 책이다. 제주도에서 모슬포라는 작고 조용한 동네에서 머물렀는데, 모슬포의 독서의 입구라는 책방에서 주워 왔다.



사실 작가 소개가 좋았던 것이다.

나 역시나 영원히 무지몽매할 것이기에 그 표현도 좋고,

무언가를 사랑해서 까맣게 탄다는 표현은 내가 그런 이들을 동경해서 좋았다. 나는 온 마음으로 타버리기에는 조금 겁이 많은 사람이다.

이 책을 고르게 된 결정적 계기는

‘시는 슬픔의 것이다. 아니, 슬픔은 시의 것이다.’ 라는 내용이 좋았기 때문.

이 문장이 그대로 적용되는 시집으로는 한강 작가의 [서랍에 저녁을 넣어 두었다]를 추천한다. 눈물 없이 담담히 슬퍼질 수 있다.


B. 한 강, [노랑무늬영원]

한강 작가를 언급한 김에 그 다음은 한강의 ‘노랑무늬영원’.

역시나 모슬포의 독서의 입구에서 구매. 한강 작가의 책을 모아둔 칸이 따로 있어서 살 수밖에 없었다.

사실 이 책은 작년 초부터 읽고 싶던 책이다. 그 당시에는 절판이었다.

노랑색을 좋아하기 때문에 이 책을 읽고 싶어졌다고 하면 조금 황당한가. 하지만 나는 어떤 책을 읽게 되는 계기의 50% 이상이 제목에 있다고 생각한다.

싱가포르에서 땀에 젖은 고통을 살아가던 시기에 엄마에게 한 강의 [작별하지 않는다]를 사서 보내달라고 했었다. 그걸 읽는다고 살만해지는 건 아니었지만, 익숙한 언어의 글자들은 분명 위안이 된다. 이번에 제주도를 간 것도 단순히 힘들어서 어딘가 멀리 가고 싶었기 때문이었기에, 거기서 발견한 한 강 작가의 책을 또 살 수밖에 없었다.

잠이 안 오는 밤에 등불 밑에서 잘게 조각내어 읽어보려고 한다.



C. 마스다 미리, [생각하고 싶어서 떠난 핀란드 여행]

제주 마지막 행선지는 공항 근처의 헌책방인 움트는 책방이었다. 이용료를 내고 앉아서 책을 볼 수 있는 책방이라서 가게 됐다. 대부분의 책방은 앉아서 책을 읽지 못하게 한다.

사실 그렇게까지 헌책방인지는 몰랐는데, 정말 헌책방이었다. 할머니 댁에 가면 있는 정도 느낌의 낡은 책들이 가득... 꽤 최근에 출판된 책들도 있는데 사용감 있는 헌 책 치고 비싸서 별로 사고 싶지는 않았다. 그런데 마스다 미리 책을 오랜만에 보니 반가워서 살 수밖에 없었다(늘 ‘살 수밖에 없었다’는 말로 충동 구매를 포장하는 듯).

어릴 때 마스다 미리의 [어느 날 문득 어른이 되었습니다]라는 그림 산문집을 참 좋아했다. 지금도 방에서 가장 좋아하는 책을 모으는 곳에 꽂혀 있다. 그 책을 읽던 나는 어른이 아니었다. 그래서 그걸 읽으면서 어른이 된다는 게 이런 거구나, 하고 상상하곤 했다. 지금의 나는 어른도 아니고 아이도 아닌, 어디에도 속하지 못하는 애매한 마음이다.

마스다 미리 책이어서 산 건 아니고, 마스다 미리가 쓴 핀란드 여행 책이라서 샀다. 책을 사기 바로 전날, 서귀포의 한 도예 작업실에서 선생님에게 조잘조잘 ‘핀란드와 도예에 대한 로망이 있었어요’ 라고 떠든 게 생각 났기 때문이다.

내가 가장 좋아하는 무라카미 하루키의 소설은 [색채가 없는 다자키 쓰쿠루와 그가 순례를 떠난 해]인데, 다자키 쓰쿠루가 친구 구로노 에리(책에서는 ‘구로’라고 불린다)의 핀란드 집을 찾아가는 부분을 가장 좋아했다.

구로는 힘든 순간을 넘어서기 위해 도예를 배우고, 도예를 배우러 일본에 온 핀란드 사람을 만나 결혼을 하여 핀란드로 가서 살게 된다. 그녀의 핀란드 집 속 도예 공간을 묘사한 부분을 읽을 때는 내가 그 곳에 가서 있는 것 같았다. 그 이후로는 ‘나도 도예를 배우고 핀란드에 가보고 싶어’ 라고 막연히 생각해왔다. 언젠가 막막한 폭풍을 마주한 미래에 그렇게 하면 나도 그녀처럼 조금은 벗어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아무튼 그래서 이 책을 사게 된 것이다.

나는 원래 여행을 가면 원래 가지고 있던 여행 에세이를 가져가고, 여행지에서 다음 여행에서 읽을 책을 사는 것을 좋아한다. 다음에 어디를 갈지 모르겠지만, 이 책은 그 때 읽으려고 잘 모셔두었다. 빵을 좋아하는 사람이 참 좋아할 것 같은 책이다. 책의 시작부터 온통 핀란드 빵에 관한 이야기이다.



무난해보이는 감정들 사이 자기 혐오로 점철된 애매한 연말이지만, 좋아하는 것에 대해 적으며 포장해야지. 매듭만 잘 지으면 그게 반 이상.. 이라고 믿는다.

오늘 눈이 펑펑 왔는데 아주 잔뜩 예뻤다.

눈이 오는 걸 보면서 좋아할 수 있는 마음을 가진 것 만으로도, 지금 참 괜찮은 상태라고 느껴졌다.


함박눈 속 꿋꿋한 작은 아기 나무를 보며 모두 힘내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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