원래 뭔가 특별한 일이 있을 때 글을 쓰는 편이다. 오늘 만난 사람이 대단히 인상적이었거나, 무언가를 봤는데 너무나 아름다웠거나, ‘오늘 하루는 정말 완벽했어’ 하고 감탄하게 되거나. 이 정도면 쓸 만하지, 할 때.
그런데 나는 지금 아주 무료한 오후를 보내고 있다. 핸드폰을 들여다봐도, 최근 재밌게 읽고 있던 책을 들여다봐도, 어딘가 재미가 없다. 한 가지 행동을 5분 이상 지속하지 못한다. 낮잠은 아까 실컷 자두었다. 해야만 할 일들이 등 뒤에 줄을 지어 달라붙어 있지만 잠시 외면해보고자 한다.
글을 쓰는 행위에 대한 약간의 집착이 있다. 생각나면 적어야 해, 적으면 그럴싸해지지, 그런 생각. 사실 오늘은 키보드를 두들겨 글을 쓰고 싶지는 않았고, 늘 글을 쓰는 낡은 회색 노트를 꺼내 만년필로 떠오르는 대로 휘갈겨 써볼 요량이었다. 그런데 회색 노트가 보이지 않는다. 아, 어디에 뒀더라. 잘 들고 나가지는 않는 물건인데. 설마 잃어버렸나. 그럴 리가 없는데. 그러다가 그냥 결국 컴퓨터 앞에 앉았다.
무언가를 쓴다는 행위는 질리지 않는다. 나는 생각이 많은 편이다. 쓸모 있는 생각을 하는 편은 아닌데, 그냥 별 것도 아닌 생각이 머리 속을 둥둥 떠다니면 잘 주워 모아다가 어딘가에 붙여두면 쓸모가 생길 거라고 믿는 편. 그래서 읽는 것보다 쓰는 게 더 몰입도가 높고, 읽는 게 지루해도 쓰는 건 지루해지지 않는다. 웬만하면. 나는 아마도 ADHD가 있는 것 같은데, 글을 쓸 때만 한 자리에서 집중을 잘하고 다른 일에 한 눈 팔지 않는다.
문득 대학교 1학년 때 글쓰기 수업 과제로 북한 이탈 주민에 대한 짧은 논문을 썼던 것이 생각난다. 기숙사의 세미나 룸에서 밤 12시가 되도록 한 문단도 제대로 적지 못하다가, 얼마 남지 않는 시간에 쫓겨 밤 12시부터 아침 6시까지 6시간 만에 뭐라고 가득 쓴 다음에 제출했었다. 살면서 가장 글쓰기로 고통 받았던 시간이었다. 평소 관심을 기울이지도 않던 부분을 주제로 잡은 것이 문제였다. 교수님의 피드백을 받는 날 교수님은 씨익 웃으며 ‘너 쓰기 싫었지?’ 라고 하셨다. 글은 거짓말을 못한다. 쓰기 싫은데 쓰면 다 티나고, 관심 없는데 있는 척 하면 밑천이 다 보인다. 결국 그 이후에는 진심으로 관심을 가지려 노력하며 잘 고쳐 썼다. 꽤나 만족했던 시간.
그런데 회색 노트를 진짜 어디에 뒀더라?
머리 속에 구름이 낀 것 같다. 복잡하게 엉킨 머리카락 속에 숨겨진 머리통이 혼자 온도가 좀 높은 것 같기도 하고. 몇 년 전에 처음으로 겨울을 마음에 들어하던 순간, ‘아 겨울에는 머리가 맑아지는구나’ 하고 생각했던 기억이 난다. 여름은 반대로 머리가 멍해진다. 너무 더워. 똑바로 생각할 수 없는 기분이다. 물론 핑계에요. 안 감은 머리를 질끈 올려 묶고 대충 아무거나 주워 입은 다음에 역 앞에 있는 카페라도 가야 괜찮은 하루가 시작되려나 싶지만, ‘가서 할 것도 없는데’ ‘커피가 마시고 싶은 것도 아닌데 돈이 아깝잖아’ 이런 생각을 하며 구름 낀 방 안에 앉아 있다. 생각해보니 커피 값 보다 이렇게 흘러갈 하루가 더 아깝네.
결국 지저분한 얼굴에 선크림을 대충 얹고 집을 나선다. 걷다 보면 하루가 재밌어질지도. 혹시 모르니, 일단 나가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