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를 머금고 하얗게 구름이 내려앉은 출근길은 간만에 공기가 머금은 수증기로 한껏 살아난 가로수들과 더욱 진해진 동네가 품은 냄새들로 날 것 같이 쌀쌀하다. 내 발길을 시공간을 넘어 어디론가 밀어내는 것 같다. 나는 어리둥절한 기분으로 이방인처럼 걷는다. 쓰레기더미와 으깨진 은행나무 열매, 어디론가 오고, 가는 찌푸린 얼굴의 사람들, 사람들......
비둘기들은 어제 밤 동네 한량들이 술 취해서 먹고, 마시며 흘린 부스러기를 열심히 주워 먹는다. 출근길에 있는 작은 도서관 앞엔 조그만 마당이 인도에서 계단 하나만큼 올라 서 있는데, 동네 술꾼들이 그냥 둘 리가 없다. 어디든 사람이 모일 수 있고, 흥이 나면 술판을 벌인다. 달리 할 일이 없기 때문이다. 새벽에 벌어졌을 소란이 상상된다. 도서관 문을 닫고 나면 밤의 주인은 한량들이다.
대로변 아이들 등교길에 교통 지도를 하는 성실한 어른들이 서 있다. 아침부터 타인을 위해서 봉사하는 특별한 심성의 소유자들은 때때로 정의감에 휩싸여 진짜 경찰처럼 어지러운 무질서를 진두지휘하여 정돈한다. 그들이 소릴 지를 때, 한량들의 왁자지껄함과는 다른 뉘앙스에서 사람들은 발걸음을 재촉하며 조용히 곁을 지나간다.
사람들이 걸어 간다. 버스 정류장에 서 있다. 버스와 자동차들이 지나다닌다. 그들의 목적지는 모르나 하나는 알 것 같다. 우리에겐 여전히 유목민의 피가 흘러서 끊임없이 이동한다는 것. 출근하고, 공부하러 가고, 집으로 돌아가고, 또 나간다. 그리고 살아간다.
말과 낙타를 타는 대신에 버스나 자동차, 오토바이, 자전거.... 그리고 지하로 기어들어가서 지하철에 몸을 싣는다. 이동 본능이 만들어낸 이 모든 것들은 어떻게 보면 꿈의 수단이다. 우린 이동을 꿈꾸니까. 유목민의 후손들은 조상들이 그랬듯이 움직이는 꿈을 꾼다. 아무것도 될 수 없어도, 그저 한량이라도 방 안에 처 박혀 뿌리내리지 않는다. 나는 지하철을 기다릴 때 초조하다. 가만히 서 있는 게 내 본능은 아니니까.
맑진 않지만 가을 바람을 품은 하늘이 벌써 그립다. 지하에선 이동의 본능만 남아서 이동을 꿈꾸며 이동을 하고 있다. 우리는 하늘 아래 살도록 만들어진 지도 모른다. 우리의 본적은 길이고, 집과 일터, 학교 등은 꿈의 수단일지도 모른다. 나는 마음껏 걷고 싶다. 가을 바람이 깊어져 옷깃을 여며야 외로움이 감춰질 때가 오면 가을 코트를 걸치고 평소와 다른 곳으로 가고 싶다. 미술전시를 예매해 두었다. 단지 어딘가 가고 싶었고, 인류가 캔버스 위에 기록한 벽화의 이미테이션 속에서 인류의 열망을 읽어낼 때, 나는 수 많은 인류의 길들과 꿈들을 떠올리고 지혜로워질지도 모른다. 그리고 조상들의 완성된 꿈들은 아직 방황 중인 내 꿈들을 달래준다. 얼마나 더 많은 길들을 걸어야 인생이 끝날까. 그 끝에는......
지하철이 거대한 공룡처럼 움직인다. 나는 공룡을 길들인 자부심보다는 위기감을 본능처럼 느끼며 길 위에 날 어서 토해내기만을 기대한다. 더 큰 존재가 되고 싶지 않다. 어서 길 위에 나를 내려놓으면 좋겠다. 나는 길 위에 미미한 존재가 되어서 서둘러 사라질 것이다. 그건 두 발이 꾸는 꿈이다. 인류의 꿈은 두 발로 생각한다. 나는 지하철에서 내리며 두 발의 한숨을 토해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