합정역에서 성수역 쪽으로 좀 더 들어가면 일본인이 운영하는 이자카야가 나온다. 대로변에 있지 않고 골목을 몇 번 꺾어 들어가야 하는데도 늘 사람이 북적이는 곳이다.
가게 문을 열고 들어서니 입구에서 마주 보이는 곳에서 상무님이 손짓을 하셨다.
회사 밖에서 만나는 것은 처음이라 정장이 아닌 까만 목티에 카키색 비니를 쓴 상무님을 보고 깜짝 놀랐다. 외국계 IT 회사 임원 같다고 말하고 웃으며 말을 걸었다.
”제 컨셉은 목감기 걸린 은퇴자입니다. 반가워요, 예진 씨.”
라고 말하고 그는 환하게 웃었다.
어릴 때부터 좋아한 배우인 휴 그랜트를 닮은 서글서글한 미소가 여전히 끌린다.
그는 회사에서 알아주는 로맨티시스트였다. 회계 부서에서 일하던 사모님은 직급차와 나이차로 계속 거절을 하다가 상무님의 삼 년간의 구애에 결국 마음을 열었는데, 사모님이 여섯 살 연상이었다. 말이 없기로 유명한 사모님은 상무님과 있을 때면 표정부터 달라져서 얼음 공주의 마음을 녹였다며 다들 놀라워했다. 사모님만 바라보는 상무님의 표정과 아이처럼 즐거워하며 이야기하는 사모님은 특별히 요란스러운 연애를 한 게 아닌데도 모든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갑자기 연락해서 놀랐죠?”
“아니에요. 반가웠어요. 다만 상무님이 일을 그만두셨다는 소식엔 정말 깜짝 놀랐어요.”
상무님은 서글서글한 눈웃음을 지으며
“이제 상무직이 아니니 김지현이라고 다시 소개하겠습니다.”
라고 말하며 손을 내밀었다.
“안녕하세요. 반갑습니다, 김지현 씨.”
우리는 오랜 세월 함께 호흡을 맞춰 온 그때처럼 편안하게 마주 보고 웃었다.
“어떻게 지내셨어요?”
상무님은 어머님이 운영하시는 복지재단을 이어받으라는 말씀에 회사를 그만두셨지만 선뜻 결정을 내리기가 힘들어서 생각할 시간을 가지려고 여행을 다니셨다고 했다.
인스타그램이 떠올랐다.
“인스타그램에 풍경 사진이 많더라고요.”
”여행을 원래 좋아해요. 그리고 젊었을 땐 사진을 찍으며 살고 싶었어요. “
”하지만 최근 사진은 없던데요. “
”최근엔 어떤 분의 자아 찾기를 지켜보는 게 인스타를 하는 이유였어요.”
나는 내 이야기구나 짐작하고 쓰게 웃었다.
”제 정체가 다 폭로되었다는 걸 잊고 있었네요. 완벽한 비서 이예진은 회복될 수 없는 거겠죠? “
”지금이 더 나은 걸요. 예진 씨는……“
그냥 하는 말인 줄 알면서도 설렜다. 나는 술을 마셔서 얼굴이 빨갛게 달아오른 거라고 생각하길 바랐다.
상무님은 누구에게나 편안하고, 따뜻한 사람이어서 종종 착각을 하게 만든다. 그러나 눈매 끝에 걸려 있는 슬픈 표정은 사별한 남자와 이혼한 여자에 대한 망상과 약간 들뜨던 마음을 가라앉혔다.
나는 술을 쭉 들이켰다. 평소 술이 세지 않아서 조금 어지럽다. 상무님은 눈치채지 못했는지 내 잔이 빌 때마다 다시 채워주셨다. 한 동안 말없이 술잔만 오갔다.
“사실 예진 씨를 꼭 만나고 싶었어요.”
나는 또다시 혼자 소설을 쓰지 않으려고 머리를 흔들어 술기운을 떨쳐냈다. 그리고 소설을 쓰더라도 우리의 장르는 로맨스가 아니라 다큐멘터리나 드라마라고 마음을 다잡았다.
조금 마음의 여유가 생겼다.
상무님은 진지한 목소리로 여행에 관한 이야길 이어나갔다.
“여행지에서 예진 씨 인스타그램을 보면서 처음엔 많이 웃었고, 재밌었고요. 그다음엔 점점 마음이 따뜻해지더니 여행지가 지낼만해지더라고요. 처음엔 맘 붙일 데가 없어서 여기저기 떠돌 뿐이었어요. 그런데 예진 씨의 발상이 영감을 줬는지 풍경과 사람들이 보이기 시작하더라고요. 그러고 나서는 새로운 삶도 나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난……”
상무님은 따뜻한 표정으로 날 바라보며 말했다.
”조금 지나치게 들릴 수도 있겠지만 구원받은 기분이었어요. 지난 삶을 놓을 용기를 얻었어요, 예진 씨한테……“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것 같았다.
위로를 원하는 게 아니란 걸 안다. 당연히 사랑도 아니다. 나는 조금 아쉬웠지만 괜찮다. 그가 이해가 된다.
확인받고 싶고, 조금 기대도 괜찮다.
너무 오랫동안 혼자 안고 온 삶의 무게를 이제야 내려놓을 용기를 낸 그가 옳았다고 말해주고 싶었다.
나는 휴지를 한 장 뜯어서 가방에서 꺼낸 펜으로 결재란을 쓱쓱 그렸다. 그리고 참 잘했어요, 개구리 도장을 그려 넣었다.
그걸 건네며 씩 웃는 나에게 상무님은
“이제야 제대로 결재를 받았네요.”
라고 말하고 환하게 웃었다.
누군가를 구원해 준 것 치고는 쓸쓸한 밤이다.
입사 초기에 난 어렸고, 의욕이 넘쳤으며, 호기심도 많았다. 그리고 사랑에 불가능은 없다고 생각할 나이였고, 나는 예쁘고, 유능했다. 상무님이 유부남인 건 알았지만 상관없다고 생각했다. 그땐 상무님과 사모님의 관계도 잘 몰랐기 때문에 더 거침없었다.
상무님은 그런 날 알아주지 않았지만 언제나 친절했다. 시간이 지나 내가 회사에 적응하고, 상무님을 알아갈 때까지 기다려 주었다.
후에 나는
“제가 입사 초기에 너무 어려서 결례를 범했습니다. 죄송합니다.”
라고 사직을 각오하고 사과를 드렸는데, 상무님은
“사람이 사람을 알아가는 과정이죠. 괜찮습니다.”
라고 말할 뿐이었다.
나를 무시하는 게 아니었다.
상무님은 완성된 사람을 쓰면 자기 일만 한다며, 사람을 가르치고, 만들어 나가는 게 더 즐겁다는 이야기를 자주 하셨다.
“그건 기다려주는 거예요. 어렵지 않습니다. 사람들은 시간과 상황 안에서 성장하기 마련입니다. 아니면, 자기가 갈 다른 길을 비로소 찾든가요. “
나는 그때에서야
”저는 성장하겠습니다. “
라고 진심으로 돌이킬 수 있었다.
내 롤모델, 멘토, 그리고 첫사랑이었다.
사람은 사람으로부터 희망을 얻는다. 사장님과 사장님의 형도, 상무님과 나도. 서로가 서로에게 기대고, 버팀목이 되어 주며 불완전한 생을 견뎌내는 것. 그것은 완벽하고 아름다운 그림은 아니고 때때로 서글프고, 애잔하기도 하다. 뭔가 목적이 있고 결과가 선명한 것도 아니다. 하지만 우리에게는 꼭 필요한 일이다.
헤어지고 난 뒤, 나는 습관적으로 카페로 향했다. 늦은 시간이라서 불 꺼진 카페 지붕 위엔 아직 녹지 않는 눈이 쌓여 있었다.
나는 안으로 들어가서 커피 머신을 켜고 기다렸다. 그리고 그라인더로 원두를 곱게 간 후, 포터필터에 담고 사장님의 가르침대로 순간적인 힘을 실어서 템핑을 했다.
너무 생각이 많으면 안 된다고 했다.
“힘을 주려고 하지 말고 몸을 실으세요. 꾹 누른다는 느낌보다는 치고 돌아온다고 생각하세요. 그 결과는 추출해 보면 알아요.
원두가 가장 최상의 맛을 내려면 그걸 몸이 기억해야 해요. “
에스프레소를 잔에 담은 후 우유 스팀을 시작했다.
”기포 소리가 나면 안 돼요. 부드럽게 롤링시켜 주세요. “
그러고 나서 표면에 있는 거품은 적당히 걷어주고 잔에 스팀 한 우유를 거품이 깨지지 않도록 기울여서 부었다.
”끝. 이제 나머지는 고객의 몫이에요. “
”아, 맞다. 우린 하나가 더 있죠? “
나는 혼자 중얼거렸다.
“사장님, 그게 뭐였죠?”
“행복하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