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장

by 최수현

흐르는 강물처럼 일상이 지나간다. 시간을 붙잡을 순 없지만 빛나는 찰나들을 포착해서 카메라로 담았다. 그리고 인스타그램에 개시하며 나의 조각들을 맞춰나갔다. 이제 제법 내 모양새가 갖춰져 간다. 나는 인간 이예진은 이렇습니다,라고 묵직한 책 한 권 정도는 쓸 수 있을 분량의 인생을 살고 있다.

더 이상 타인의 그림자도 아니고, 누군가를 원망하면서 인생을 허비하지도 않는다. 과거에 붙잡혀 현재를 놓치는 일은,

사장님의 표현에 의하면


“템핑 망한 거죠!”


이다.

커피를 내리려고 템핑을 할 때도 지난번의 맛과 기억에 얽매이면 안 된다.


“로스팅이 매번 균일할 순 없어요. 생두 상태는 날씨에 따라서도 다르고 매번 체크해야 해요.

원두도 마찬가지예요. 템핑 할 때마다 이번 원두의 감을 익혀야 해요.

최상이란 것은 매 순간 달라질 수 있어요.

커피 장인이 되는 길은, 지금 여기에 충실한 거예요. “


아직도 푸른 하늘은 생생히 기억난다.

그날 비가 왔던 게 분명한데도 내 머릿속에서 새파란 맑은 하늘이 펼쳐져 있었다.

그건 하나의 징조였다. 내가 반드시 나에게로 돌아가리란 일종의 확증이었다.

그 무지개를 쫓아 나는 열심히 살고 있다.

나의 인스타 친구들도 잘 지낸다.


지금도 김지현 씨는 내 인스타그램을 보고 좋아요를 누른다. 종종 문자도 온다.


”오늘도 커닝! 요즘 꽤 빡세네요. 그런데 기분은 좋아요. 예진 씨도 좋은 하루 보내세요!”


김지현 씨의 문자가 오면, 전원이 딱 들어온 사럼처럼 빛이 나기 시작하네요라고 말하며 사장님은 날 알전구라고 부르기 시작했다. 나는 사장님을 커피를 통해서 인생을 성찰하는 도사님이라고 부른다.


사장님의 형은 아직도 병원에서 지낸다. 하지만 내 얘길 들은 후, 사장님은 형을 조금 이해하게 된 것 같다고 말했다.


“이번에 갔을 땐, 형은 엄마, 아빠랑 있어서 좋겠다, 행복하겠네,라고 말해줬어요. 그런데 내가 소리를 인정해 주니까 정말 좋아하더라고요. 그리고 나에게 이렇게 말했어요.

엄마, 아빠가 나만 찾아와서 미안해. 내가 널 돌봐줘야 하는데 병원에서 지내는 것도 미안하고. 하지만 엄마, 아빠와 약속했어.”


“뭘?”


“책 만권 읽고 똑똑해지면 너에게 돌아가겠다고 말이야.”


우린 책 만권이 인간이 읽어낼 수 있는 분량인지 한참 이야기했다. 그러다가 만화책의 무한한 가능성을 발견하고 형에게 태블릿을 사주기로 했다. 의기양양해진 우린 책 만 권의 위용을 정복한 사람답게 너그럽게 가능성이 있다는 결론을 내렸다. 사장님의 형은 돌아올 것이다.


한참 잊고 지냈는데 도연 씨에게서 문자가 왔다.


“술 고픈 날이네. 상무님과 갔던 이자카야 나도 데려가주지 않을래요?”


나는 도연 씨에게 말한 기억이 없어서 깜짝 놀랐다가 도연 씨 대답을 듣고 배를 쥐고 웃었다.


“얼마 전에 상무님이 부사장실을 다녀가셨거든요. “


우리는 종종 만나서 술을 마신다. 자연스럽게 술친구가 되었다. 그러다가 유명 맛집도 찾아가고, 카페도 가고, 가끔 영화도 같이 본다.

나는 심야 영화를 좋아하는데 의외로 도연 씨도 그랬다.


”영화는 가리지 않고 다 봐요. 단 리클라이너관이어야 해요. “



내 동화책도 점점 모양새를 갖춰나가기 시작했다. 인스타 친구들의 자문을 얻고 영감도 얻는다. 내가 쓰는 이야기는,


거인 두 사람이 만나서 함께 해지는 풍경을 보려는 시도를 다룬다. 그들은 평화로운 시간을 기대하고 있었다. 하지만 만남은 소란스럽고, 힘들었다. 그 이유를 두 거인이 생각해 보니……

사람은 작은 섬이 아니라 대륙이라 그 안에 많은 다른 사람들이 살고 있고 사회를 이루고 문화가 형성된다. 그래서 두 사람이 만나면 정신적, 물리적 충돌이 동시에 일어난다. 분쟁, 전쟁이 일어나기도 하고, 대륙 충돌로 지진과 화산 분출이 극심할 수도 있다.

두 사람이 나란히 함께 있기 위해서는 그 모든 것을 끌어안아야 한다. 매일 전쟁이 일어나고, 평화 교섭을 해야 하며, 자연재해도 수습해야 한다.

거인들은 한참 고민을 한다. 함께 해지는 풍경을 꼭 보고 싶었기 때문이다. 결국 고요함을 포기하고 대신에 함께 해가 지는 것만 보기로 했다. 시끌벅적했지만 활기차고 유쾌한 시간이었다.


아직 초안을 잡았을 뿐이다. 하지만 매일 꿈이 선명해진다. 내가 오늘 여기서 살아온 모든 시간이 꿈의 골격을 잡는다. 이야기는 내 삶으로부터 성장해 나간다. 나는 그 조각을 잡을 뿐이다.


오늘 밤에도 글을 쓸 것이다. 그전에 인스타그램에 이 이야기를 업로드하고……


참, 지금 만약에 사랑이 이루어지거나, 꿈을 이뤘거나, 내 자아 발견이 일련의 마무리를 지었다면 어땠을까?

그래도 변함없는 것은 삶이 계속되고 있다는 사실일 것이다. 인생에 결말이나 정답은 없다.

동화책은 종종

“그리고 그들은 행복하게 살았습니다.”

로 끝을 맺는다.

나는 내 동화책에서 이렇게 마무리 짓고 싶다.

“그리고 인생은 계속됩니다. 거인들은 지금은 즐겁지만 조만간 크게 다툴지도 모릅니다. 인생은 종잡을 수 없어요. 그러나 지금 잡은 두 손을 놓지 않을 거예요. 왜냐하면 우린 친구니까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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