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얀 몸체에 위아래가 새까맣고 미끌미끌하던
아마 0.7mm 굵기가 아니었나 싶다. 그 하얀색 펜은 그 옛날 우리에겐 볼펜의 대명사였다. 연필을 사용하다가 중학교에 가게 되면 자연스럽게 우리는 그 볼펜을 사용했다. 그 미끄러지는 필기감이란 놀라웠다.
손에 힘을 주지 않아도 스르륵 밀리던 필기감은 대신 필체를 흩어놓는 역할도 하지 않았나 싶다. 그러다가 잉크가 뭉텅 묻어나면 낭패스럽기도 했는데 이른바 '잉크 똥'이 번질 때다. 글자에 신경을 쓸 때는 별지 종이를 옆에 두고 잉크 똥을 닦아가며 필기를 했었다.
세월이 흐르면서 참 다양한 펜이 나왔다. 연필을 사용할 때의 절반만 힘을 줘도 원하는 대로 글이 써진다. 글자체의 굵기는 또 얼마나 다양한가. 펜의 크기와 디자인 색상까지 어찌나 여러 종류던지 문구점에 가면 눈이 아슴해질 정도로 예쁜 펜이 많다.
가까운 지인은 알고 있을지 모르지만 나는 펜 금단 현상을 가지고 있다. 어디를 가나 그 펜을 지참해야 마음이 놓이는데 이른바 나의 애 펜이 있다. 21세기 노트가 등장한 시대에 무슨 말인가 싶겠지만 펜을 들고 종이에 무언가를 쓰고 싶은 마음을 이해할 수 있을까.
그래서 고민이었다. 좋아하는 공책을 펴놓고 무언가를 쓰고 싶은데 너무나 잘 써지는 필기감이 더한층 뭔가를 써보라고 부채질하는데 막상 뭘 써야 할지 헤매는 것이다. 그래서 나는 일기를 쓴 것 같다.
모*미 볼펜은 아버지가 늘 사용하시던 펜이기도 했다. 해가 바뀌면 달력을 잘라 그 뒷면에 한자를 빼곡히 쓰시고 버리셨는데 아버지 가시고야 알게 되었다. 그 달력의 뒷면도 미끈미끈했고 그 볼펜의 필기감도 어지간히 힘을 주지 않으면 미끄러운데 늘 한자를 연습하시던 아버지는 얼마나 힘들여 글을 쓰셨을까.
작은 힘만으로도 글자체를 자유자재로 쓸 수 있는 애 펜에 홀려서 글을 쓰다 보면 A4 한 장은 순식간에 채운다. 그러면서 늘 마음 한 곳이 아쉬워졌다. 이 펜을 아버지께도 한번 드렸으면 얼마나 좋았을까. 미끄러운 펜으로도 멋있게 한자의 획을 그으셨지만 손에 힘을 덜 들이고도 원하는 대로 글을 쓸 수 있는 펜이 있었다면 얼마나 좋아하셨을까.
펜의 신기루를 경험하게 해드리지 못했다. 두툼한 손으로 작은 펜을 들고 힘들여 쓰셨을 생각을 하면 미안해진다. 어느 날엔가 공책 몇 권을 사다 드린 기억이 있고 종이를 한 박스 사다 드린 기억은 있지만 좀 더 일찍 여러 가지 펜도 사다 드릴 걸 그랬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