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원에서 보내는 시간' - 헤르만 헤세 -
나무를 존경한다는 사람을 발견했다. 1877년에 태어나서 1, 2차 세계대전을 다 겪은 독일 사람
헤르만 헤세다.
고등학교 수업시간, 수업 이외의 에피소드를 들려주는 선생님의 말은 늘 어떤 이야기든 재미있었다. 어느 날 '너희들 우리 학교 교화가 뭔 줄 아나? 교목은 또 뭔 줄 아나?" "지금 화단에 장미가 흐드러지게 피어있는데 누구 하나 바라보는 사람이 없다." 어떤 선생님의 그 말씀은 충격이었다.
나무를 돌아보고 화초를 들여다보고 꽃을 이뻐하게 된 것은 아마 그즈음부터였을 것이다. 중학교 담장에 늘어선 노란 은행잎을 줍기도 하고 박목월이며 조지훈 윤동주의 시를 옮겨 적기도 했지만 고등학교에서는 계절의 변화를 느낄 여유가 없었다. 어느 날 어떤 선생님의 그 한마디 말이 귀에 남았고 이후로 늘 계절의 변화에 따라 나무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무를 내 세계로 안아 들이게 된 것은 굉장한 행운이다. 이제는 산책하다 만나는 길 옆의 텃밭조차도 그 속에 자라는 작은 남새 하나하나도 눈에 들어오고 감동스럽다.
두 해 전이다. 깊은 겨울에 이파리 하나 없이 하늘로 뻗어있는 거대한 가로수에 반해서 유튜브 영상을 시작했다. 사방의 허공으로 실낱같이 퍼져있는 가지 끝은 마치 온몸의 핏줄 같았다. 매서운 한기 속에서도 그 가지 끝은 봄을 찾고 있는 것 같았다. 나무사랑은 꽃나무 사랑으로 이어졌고 집안이며 사무실에 놓고 키우는 화초 사랑으로까지 갔다. 살면서 알게 된 책 세상 책 사랑만큼이나 나무세상 나무 사랑은 한 삶을 더 펼쳐주었다.
헤세가 시골에 정착하든 즈음에 적었다는 '정원에서 보내는 시간'은 통째로 시였다. 화단에서 마른 가지들을 태워 재를 만들면서 이렇게 적고 있다.
"우리가 살아가는 시대에는 아무도 가만히 앉아서 흙에 불을 붙여 태우고 있을 시간이 없다. ~ 시인인 나는 자제와 어쩌면 희생으로 그 값을 지급 한다. ~ 그렇게 하도록 신은 내게 허용했다. 지금 우리들의 시대에 살도록. 종종 시간에서 벗어나 공간 속에서 시간을 느끼지 않고 숨 쉬도록."
"여름의 뜨거운 열기가 마구 날뛰고 숲의 새들도 침묵을 지킬 때면"
"더 푸른 은신처는 항상 흔쾌하고 선량하게 나를 맞아주었다."
"종종 기억을 되살리며 아릿하면서도 달콤하게 나이 들어가는 나의 가슴을 적시는구나"
정원의 텃밭에서 헤세가 빨간 당근을 씹어보면서 하는 말이다.
어떻게 화단을 가꾸면 꽃이 빽빽하게 피어오를 수 있을지 궁금하기도 했다.
"해바라기는 바람에 구부러진 가지 위로 다시 머리를 숙인다. 귀중한 땅 가까이 더 다가가려고 그렇게 고개를 숙인 채 시들어 썩어간다. 줄기가 꺾이면 한때 탐욕스럽고 기운차던 해바라기 줄기는 피로에 젖어 굴복하듯이 몸을 구부린다. 새로운 생명의 순환을 향해서. 자라서 꽃을 피우는 것들은 경이롭다. 모든 생명의 단계는 맹아로부터 시작하여 죽음으로 나아가는 것이다. 봄이 되면 어린아이들을 바라보며 즐거워하듯 그 생명을 바라본다."
"어느덧 잠에서 깨어난 태양이 비쳐든다. 아침의 길을 간다. 이미 꽃잎이 시들어 볼품없이 되어버린 장미덤불을 지나서"
헤세를 따라 정원에서 작은 잡초들도 보았다.
이른 봄 새벽에 뒷산에 올라 풋복숭아를 따오던 아버지가 떠올랐다. '피복숭아'라고 했던 것, 한 입 베어 물면 벌건 속살이 달콤했던 붉은 복숭아는 봄마다 아버지가 따다 주셨다. 그 뒷산이 개발되어 거대한 건물이 들어서기 전까지. 그 복숭아가 독일에도 유럽에도 있었나 보다.
헤세가 그리는 복숭아나무다.
"3월 중순이 지나면 분홍빛을 띤 거품 같은 왕관이 피어났다. 비가 오는 계절에는 축축하고 흐린 날들이 계속되는 가운데 마치 꿈을 꾸듯 조용히 서 있었다. 약간 몸을 구부린 채 발치의 풀들이 비가 내릴 때마다 초록이 짙어가고 윤기가 더해가는 것을 내려다보았다."
그 거대한 복숭아나무를 한 밤 폭우가 뿌리째 뽑아놓았다.
"나무들도 어느 날 갑자기 사람들을 홀로 둔 채 커다란 어둠 너머로 사라져 버릴 수 있다니!"
해세는 그 자리를 비워두었다. 새로이 나무를 심지 않았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기라는 부제에 단 내용은 이렇다.
"나무는 늘 나의 관심을 가장 많이 받는 설교자이다. 나는 나무를 존경한다. ~ 고독한 존재와 같다. 나약함 때문에 현실을 벗어나 은둔하려는 사람과는 다르다. 베토벤이나 니체처럼 고독하게 버텨낸 위대한 사람 같다."
"나무들의 속삭임에 귀 기울이는 법을 배운 사람은 나무가 되려고 갈망하지 않는다. 자신이 아닌 다른 존재가 되려 하지 않는다. 바로 그것이 고향이다. 그것이 행복이다."
헤세는 정원에 앉아 구름 낀 하늘도 바라보았다.
"바람은 구름조각들을 실 가닥처럼 흐트러뜨리고 있다."
"나는 세상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알고 있다."
"우울함에서 벗어날 수 있는 좋은 방법이 있다. 노래를 부르고 경건하게 행동하고 술을 마시고 곡을 연주하고 시를 쓰고 방랑하는 것이다."
"우리 같은 시인들은 무엇보다도 동시대의 사람들이 겪은 것들을 표현해야 할 사명이 있다. 그것은 직접 체험해서 알게 될 때에만 할 수 있다. "
"견디기 어려운 것일지라도 그것을 극복하기 위해서는 말로 표현되어야 한다."
무르익은 향기
정오의 느낌
무언가에 대한 기다림
가장 무상한 것이야말로 가장 아름다운 것
빛깔 색깔
웃음을 터뜨리듯 쾌활한 빨간색과 경이로운 자줏빛
거무스레한 것이 소리 없이 그림자처럼 날아오르는 것을 보았다. 새가 아니었다. 한 마리 나비였다. 내 주위에서 비밀스럽게 하늘거리더니 멀리 날아갔다 다시 돌아와 내 왼손 위에 사뿐히 내려앉았다. 수천 가지의 사소한 일들에서 작은 기쁨들을 찾아내 밝게 꿰어서 우리의 삶을 엮어갈 수 있다. 누군가를 부드럽게 대하고 배려하는 것은 그렇게 대하는 것을 스스로 필요로 하는 사람만이 잘할 수 있다.
시체였던 모든 것들은 부패하여 땅속으로 들어가 그 땅을 기름지고 검고 비옥하게 만든다. 썩어 해체되었던 모든 것들은 힘을 얻어 다시 색채를 띤 아름다운 형상으로 되돌아온다. 그와 같은 순환에 대해 모든 종교는 예감으로 가득 차 그 의미들을 해석하며 숭배한다. 지난해의 죽음에 의해 양분을 얻고 소생하지 않는 여름은 없다. 어떤 재배식물도 조용하고도 확실하게 땅과 결속되지 않은 것이 없다. 땅 위의 모든 창조물 가운데 유독 인간들만이 사물들의 순환으로부터 어딘지 제외되어 있다. 사물들의 덧없음에 만족하지 못하고 자신을 위해서 개인적이고 개성적인 특별한 무언가를 갖고 싶어 하는 욕구가 너무도 기이하게 여겨지는 것이다.
전쟁과 폭력, 비인간화에 대항하는 헤세의 정원 이야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