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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Aug 20. 2022

퇴직보다 은퇴

은퇴일기 1 - ‘인생 2막을 위한 심리학’ 읽기1

퇴직보다 은퇴

 33년 6개월간 정박했던 삶의 무대를 접으며 25년 넘게 살던 동네를 떠나 이사를 했다.

그리고 이듬해 60세라는 나이로 새해를 맞았다.

 은퇴의 의미나 자각이 와 닿지 않아 물리적인 변화를 서둘렀으나 묵지룩한 마음에 저절로 원하던 볕이 들진 않았다강아지들의 산책코스가 좀 더 푹신해지고 걷기 좋은 호수가 만보기앱을 들려 나를 불러냈으나 헛바퀴를 굴리는 느낌이 지워지지 않았다. 60이라는 나이 앞에서 현타 운운하며 엉구렁을 떨었던 것도 나의 좌표를 보고 싶지 않은 외면이었을 것이다

 엊저녁 늦게 귀가하다가 현관 비번을 세 번이나 에러를 냈더니 갑자기 비상사태 발생이라는 째지는 경고음이 도둑을 잡으러 올 때까지 계속하겠다는 기세로 연속 울리는 것이었다멀찌감치서 흡연하는 사람의 눈초리가 원격 레이다로 나를 잡고 있는 동안 그 사람에게 들릴만한 큰 소리로 집에 전화를 걸어 우리 라인 맞아?”하는 소리를 듣기까지 그 기시감 넘치던 당혹감이라니.

 그날 밤 꿈속에선 깊은 바닥이 들여다 보이는 물에 뛰어들어 건너편 기슭으로 가는데 수영을 못해 연신 허우적거리면서도 가라앉지 않는다는 게 왠지 좀 안심이 되었다그런 꿈은 무의식의 범람을 상징한다고 어디선가 읽은 기억이 있는데 오냐그래 무의식이여 어서 나를 덮쳐다오잠이 덜 깬 새벽 어디선가 버짐처럼 말라버린 목소리가 들리는 듯했다. ‘다른 삶은 가능하다라는 카톡 상태 메시지를 입력하고 주문처럼 되뇌기로 했다

 

 60이면 육십갑자 한 바퀴를 채우는 나이다. 60을 맞는 마음이 이 지경인 것은 노인으로의 진입도 두렵지만 인생 1막의 여행이 아귀가 맞게 매듭지어지는 완성의 느낌 때문일 것이다.  마음은 종잡을 수 없는 벌판을 여전히 헤매고전화를 받다가 집으로 들어가는 라인을 못 잡고심지어는 전화를 받으면서 가방을 뒤져 분명히 챙겨 온 전화기를 찾는다사실 그런 건 봐 줄 만한 애교에 속한다앞으로는 더 잘 넘어질 것이고감정에는 점점 더 취약해질 것이며 어쩌면 야박하고 옹색한 잔돈푼을 세고 있을지도 모른다

 

 퇴직을 하며 무엇을 하고 살 것인지에 대한 우려 섞인 질문을 많이도 받았다질문하는 사람 대부분은 그 순간 자신의 노후를 투영하느라 나의 대답은 귀담아 듣지 않았으며나 또한 아무 생각도 계획도 없이 매번 다른 대답을 흘리곤 했다일이 없는 시간에 대한 공포가 질문의 주를 이뤘던 것 같다어쨌거나 현직에서 물러난다는 퇴직보다는 물러나 한가히 지낸다는 의미를 포함한 은퇴라는 말이 더 좋다.

 

 두 번째 바퀴를 시작하는 진정한 인생 2막을 앞두고 미뤘던 고전 몇 권과 융의 분석심리학을 해설한 제임스 홀리스의 신간을 읽다가 인생 2막을 위한 심리학을 만났다어려운 융 심리학보다는 풀이를 곁들인 해설서들이 친절해 좋았다왠지 이번에는 내 바닥의 검은 거울을 언뜻언뜻 마주하면서 들여다보기 싫은 지하 계단 아래 케케묵은 기억들을 은밀하게 만날 수 있을 것도 같았다소심하고 부끄럼 많은 내가 누가 볼세라 내다 버리지도 못하고 쌓아놓은 더미를 헤칠 때가 된 것인지 치밀고 올라오는 냄새와 구역질과 쓰라린 쾌감을 외면할 수 없었다기어코 나를 분석할 합당한 이론을 찾아 더 이상 헤매지 말고멋있는 남의 말을 앞세우거나 그 뒤에 숨지 말고나와의 관계를 우선 정리해 보자남은 시간이 언제 나를 배신할지 믿을 수 없으니

 

 어린 시절부터 살아남기 위해 몸에 밴 적응의 왜곡된 기제들을 헤치고 들어가 눈 맞추고 알아봐 주고 잘 이별해야지밖으로 거품 물었던 투사와 전이와 질투와 온갖 콤플렉스들을 떼 보낼 수 있을까애써 그런들 그것들은 또 얼마나 재빨리 나에게 다시 숨어들 것인가요요를 통해 장착되는 지방덩어리들처럼 한층 집요하게 나의 일부임을 주장하겠지그럼에도 불구하고 용감히 메스를 들고 나를 해부하는 핏자국을 남길 사람도그러지 않고는 못 배길 사람도 나라는 사실을 거부할 수 없는 인생 1막의 정산 타이밍이 온 것이다이러려고 퇴직했구나.     

그 무렵 고군산군도 바닷속에서 뻘에 묻힌 청자다발이 나왔다는 사진 기사가 떴다난파당하기를 자처했던 나의 파편도 다만 일부라도 건져 올려지기를운이 좋다면 나에게만 의미 있는 그 작업이 인생 2막의 오프닝 앞에서 수시로 오타를 내며 방향 잡지 못하는 나와 같은 이들을 만나는 작은 부표가 되기를그리하여 처음으로 나서는 이 낯선 길에서 너무 외롭지 않게 되기를.     



우리 모두는 어린 시절에 각인된 인상과 자신을 얕보게 만드는 패러다임이나 과거의 폭군에 가까운 메시지 때문에 힘들어한다그를 몰아내지 않으면 정돈되지 않은 역사의 침대에서 졸고 있을 것이다.”

                                                                                         -‘인생 2막을 위한 심리학에서 발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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