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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다래울 Jul 08. 2024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정미조 노래, 이주엽 노랫말을 따라서 


빗자루병에 걸린 대추나무 수십 그루가
어느 날 일시에 죽어자빠진 그 집
십오 년을 살았다


빈 창고같이 휑뎅그렁한 큰 집에
밤이 오면 소쩍새와 쑥꾹새가 울었고
연못의 맹꽁이는 목이 터져라 소리 지르던
이른 봄
그 집에서 나는 혼자 살았다


다행이 뜰은 넓어서
배추 심고 고추 심고 상추 심고 파 심고
고양이들과 함께 
정붙이고 살았다


달빛이 스며드는 차가운 밤에는
이 세상의 끝의 끝으로 온 것 같이
무섭기도 했지만
책상 하나 원고지, 펜 하나가
나를 지탱해주었고
사마천을 생각하며 살았다


그 세월, 옛날의 그 집
그랬지 그랬었지
대문 밖에서는

짐승들이 으르렁거렸다
늑대도 있었고 여우도 있었고
까치독사 하이에나도 있었지
모진 세월 가고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 박경리의 마지막시 '옛날의 그 집' 2008년 4월 현대문학발표 - 


 박경리 유고시집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에 나오는 시다. 이 시집을 선물해 주고 선물도 받아 단숨에 읽던 때가 엊그제 같은데 벌써 17년 전이다. 묵직하고 뻐근한 감동에 버리고 갈 것을 가볍게 해야겠다고 생각한 지도 17년이 지났으나 쓸데없는 짐은 그만큼 늘고 머릿속은 더 엉켜있다.

'아아 편안하다 늙어서 이리 편안한 것을/ 버리고 갈 것만 남아서 참 홀가분하다'

 

 토지문화관에 들어가 히말라야 등반 체험으로 산악 소설을 쓰던 작가 박범신에게 들은 이야기로 쓴 시도 실려있다. '히말라야에서/ 짐 지고 가는 노새를 보고/ 박범신은 울었다고 했다/ 어머니!/ 평생 짐을 지고 고달프게 살았던 어머니/ 생각이 나서 울었다고 했다' -히말라야의 노새 중-

 

 10년째 혼자 사시는 어머니의 일상은 챙기면서도 휑뎅그렁한 집에 혼자 사는 마음은 헤아리지 않는다.

 '바람같이 살다가'의 이 노랫말도 내 바람일 뿐이다.


'저 바람같이 자유로운 날을 살다 어느 날 문득 바람같이 떠나가게 

나 바라는 것 없이 남기고 갈 것도 없이 어떤 후회도 미련 하나 없이 

내가 떠나는 그 날에 내가 두렵지 않도록 오직 자유로움만이 내 마지막 꿈이 되길, 

사라지길 그냥 잊혀지길 내 그리운 추억들도 다시 오지 못할 나의 사랑 그 모두'


김훈과 박래부 전설의 한국일보 문화부 기자의 맥을 이었을까, 지금은 기자가 아니지만 한국일보 기자였던 이주엽 작사가의 노랫말은 좋은 곡의 멜로디를 타고 마음 깊은 곳까지 찾아 들어온다. 



섬진강에서 만난 사람 / 강물인 양 말이 없고

온종일 몸만 뒤척이다

섬진강에서 만난 사람 / 강물 되어 말을 잊고

햇살 가듯 흘러가네


나는 바람 부는 언덕 / 흔들리는 나뭇잎처럼

멀리 떠나지도 못하고

부끄러워 서성이다 / 얼굴 붉힌 노을 받으며

말없이 돌아섰네


섬진강 섬진강에서 만난 사람 / 별빛처럼 고요하고

밤 새워 홀로 속삭이다

섬진강에서 만난 사람 / 별빛처럼 반짝이다

어둠이 찾아드네


나는 이 어두운 강변 / 사연 하나 띄워두고서

마른 그 추억들 사이로

밤 깊도록 서성이다 / 창백한 새벽빛 받으며

말없이 말없이 돌아섰네

말없이 말없이 돌아섰네


 이주엽의 섬진강 여행을 통해서 탄생한 이 노래 '1994, 섬진강'에서 만난 사람도, 그토록 애태우게 하며 말없이 뒤돌아 떠나게 했던 사람도 바로 자기 자신이었다고 한다. '섬진강 삼백리'에서 느껴지는 그리움이 옛사랑을 향한 것이었다면 이 노래에는 욕망을 내려놓고 자신의 맨얼굴과 만나는 일의 외면할 수 없음과 힘겨움이 드러난다. 나이들어 가며 궁극의 자신을 그리워하며 만나고자 하는 얘기를 말로의 목소리와 그녀가 만든 재즈 선율과 전제덕의 하모니카 연주에 자유롭게 실어낸다. 말로는 '정말로'라는 예명을 줄인 것이라고 하는데 내게는 末路라고도 들렸다. 모르긴 해도 마지막 가는 길에 대한 조망은 인생의 어느 길목에서나 확보해야할 시선이라고 생각한다.


언젠가 말로의 <벚꽃지다> 음반을 들으며 다시 섬진강 벚꽃길 삼백리를 걸을 날이 있으려나, 내친 김에 최백호의 <다시 길위에서> 앨범을 이어듣는다. 

'긴 꿈이었을까 / 어디만큼 왔는지

문을 열고 서니 찬 바람만 스쳐가네'


이주엽을 따라 우기의 꿉꿉함을 지나는 방식이다.

'바람같은 날을 살다가' '어느날 문득 바람같이 떠나가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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