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용기도 없었다.
어린 시절 나는 할머니에게 돈까스가 먹고 싶다 한 적이 있었다. 할머니는 내가 닭발이 먹고 싶다 하면 바로 다음날 하얗다 못해 뽀얀 닭발을 다라이(대야)로 가득 채워 손질해주셨고, 감자탕이 먹고 싶다 하면 들통이 넘치도록 한솥 가득히 끓여주셨다. 할머니는 내가 먹고 싶은 것은 뭐든 뚝딱뚝딱 만들어 주시는 만능 요리사였지만 그때 나는 '밖에서 사 먹는 돈까스'를 먹어야겠다며 땡깡을 부렸었다. 나이가 정확히 생각나지 않을 정도로 어린 나에게 할머니는 그래 그러자며 집 앞 작은 분식집에서 커다란 돈까스를 시켜주셨다.
'돈까스 두 개 주세요.'
뜨겁게 튀겨진 돈까스, 작은 밥, 드레싱이 가득 뿌려진 양배추 샐러드가 커다란 접시 위에 서빙되어 우리 식탁에 올려졌다. 나는 그 맛있어 보이는 돈까스에 마음을 홀랑 빼앗겨 허겁지겁 먹었다. 그렇게 정신없이 먹던 중 옆자리에서 킥킥대는 목소리가 들렸다.
그 소리의 근원지를 따라 옆을 돌아보니 남학생 둘이서 우리 테이블을 힐끗힐끗 보면서 키득대고 있었다. 그들은 교복을 입고 있었으니 나보다 나이가 많았을 것이다. 어린 맘에 무섭기도 하고, 적잖은 당황스러움도 있었고, 왜 저렇게 웃지? 의아함이 들었다.
'저 거봐 더러워.. 킥킥'
작지만 다 들릴 정도로 짧고 굵은 그들의 말이 나의 귀를 타고, 내 앞에 있는 할머니의 모습을 바라보게 만들었다. 나는 우리 테이블을 보았다. 할머니는 돈까스와 밥, 샐러드를 모두 섞어서 드시고 계셨다.
이걸 보고 웃는 거구나!
나는 그들의 눈치를 보았고, 얼굴이 붉게 올랐고, 내 목소리는 내 뱃속 깊은 곳까지 잠겼다. 나와 할머니는 그들의 비아냥 속에서 묵묵히 돈까스를 먹었다. 집으로 돌아오는 나의 마음은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뜨거움으로 가득 찼다. 내가 아까 한마디 했어야 했는데! 분노와 아쉬움이 몰아 쳤다. 너네들 인성이 더 더럽다며 다다다 쏴 붙이지 못해 울화통이 터졌다. 하지만 겉으로는 아무 내색도 하지 않았다. 할 수 없었다는 표현이 맞을 것이다. 그저 조용히. 할머니와 나는 아무 말도 하지 않았다. 분식집과 우리집과의 거리는 5분도 되지 않았지만 그 순간만큼은 5년의 거리처럼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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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날 나는 두 명의 남학생의 지껄임이 무례하다 말하지 못한 것의 아쉬움도 있었고,
그들처럼 되지 않기 위해 도덕적으로 살고 말조심을 해야겠다는 경각심도 들었다.
그리고 그들을 말리지 않은 주변 어른들에 대한 원망도 아주 조금.
후에 비슷한 상황이 생기면 나는 꼭 도와주리라 다짐도 했었다.
그러나 내가 진짜 후회되는 일은 따로 있었다. 나는 말을 하지 않았다.
아쉬움도, 경각심도, 원망도, 다짐도 모두 스르르 녹여낼 말.
할머니와 있어서 좋다는 말을 하지 못했다.
'할머니랑 먹으니까 더 맛있다.'
'돈까스 사줘서 고마워요'.
'지금 너무 행복해요!'
나는 그 말을 해야 한다는 것도 몰랐고, 용기도 없었다. 우리는 서로의 상처를 바라본 채 그냥 있었다.
그리고 끝내 그 문장을 전하지 못했고, 할머니는 돌아가셨다.
나는 말하는 법을 몰랐다.
어린 시절 나는 누가 말을 걸면 입만 삐죽거리다가 눈물로 대답했고, 소심해서 말을 잘 못하니 억울한 일을 당해도 그저 웅얼거리며 속상해할 수밖에 없었다. 손과 발을 합쳐 세어도 모자랄 만큼 말하지 못한 순간들이 많지만, 대부분의 순간들은 시간이 지나면서 자연스럽게 잊혔다. 그런데 나는 할머니와 둘이서 돈까스를 먹던 그날만큼은 잊을 수가 없다.
나의 땡깡으로인해 평소에 가지도 않던 장소에 가서 그런 못난 말을 듣게 한 것도, 그 순간 아무 방어도 하지 못한 것에 대한 죄책감도 컸다. 그리고 이중에 가장 후회스러운 것은, 이 모든 걸 못해서 미안할 만큼 내가 할머니를 사랑한다고 말하지 못한 것이다. 표현하고 싶지만 어떻게 표현할지 몰라서 안 했더니, 평생 후회가 되었다.
입에서 나오는 말은 화살과 같아서 다시 돌이 킬 수 없다. 그래서 그만큼 신중하고 또 진실되어야 한다.
말할까 말까 할 때는 최대한 참으라고, 침묵은 금이라고 모든 위인들이 입을 모아말한다. 그런데 그렇다고 말해야 할 것을 하지 못해 후회하라는 뜻은 아니다. 말은 목소리 언어로 표현하는 게 일반적이지만 글이나 그림으로 표현할 수도 있다. 그리고 그조차도 어려우면 작은 행동으로도 말할 수(표현) 있다. 말을 안 하면 바보가 된다. 괜찮은 줄 안다. 누군가와 싸웠을 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왜 그때 말하지 않았어'다. 말하지 않으면 아무도 듣지 못한다. 그리고 전하지 못한 그 말은 내 안에 후회로 묵직하게, 영원히 존재하게 된다.
나는 할머니와 살면서 나의 사랑을 좀 더 열렬히 표현한 지 않은 것을 후회하고 있다. 우리는 서로에게 표현해야 한다. 고맙다는 말도, 미안하다는 말도, 사랑한다는 말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