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5화 포도 수확
시끄럽게 울어대던 매미 소리가 어느 순간 싹 사라지고, 무성하던 녹음도 옅어지면서 색이 바래고, 한여름 뜨거웠던 태양의 열기와 정열도 꺽이면서 어느덧 가을이 성큼 다가왔다. 희망원에 있는 꽤 큰 규모의 포도원에도 가을이 다가왔음을 알리는 신호로 캠벨포도와 청포도가 탐스럽게 익어서 달콤한 향기가 사방에서 진동했다.
"오빠! 곧 포도 수확이야."
"응! 그런데, 포도를 수확하면..."
재호가 예년과 달리 수심에 찬 표정으로 말을 하다가 말았다.
"걱정하지 마. 오빠! 우리 다 잘될 거야."
"그렇겠지? 우리 괜찮겠지?"
"응. 내겐 오빠가 있으니까 아무것도 무섭지 않아."
"그래, 내가 희망원에서 나가도..."
"쉿! 오빠! 아무 말 하지 말고 우리 지금 이 순간을 소중하게 보내자. 아까도 말했지만, 포도를 수확하는 날엔 포도를 따는 손들에게도 그 포도의 단맛을 누릴 기쁨이 실컷 주어지잖아. 게다가 그날은 특별히 포도주도 맛볼 수 있고. 나 그날 오빠에게 작은 선물 하나를 줄 거야."
"어 선물?"
"응. 그런 게 있어."
재호는 그 주 내내 콧노래를 흥얼거리며 다녔다. 태석은 재호가 그렇게 싱글벙글하면서 자신에게 끝내 이야기해주지 않아서 서운하기도 하면서 궁금해 미칠 지경이어서 결국 참지 못하고 물어봤지만, 돌아오는 대답은 더욱 가관이었다.
"아 뭔데? 혼자만 좋아하지 말고 나도 좀 알자."
"그런 게 있어. 넌 몰라도 돼."
"니 진짜 그럴 끼가?"
"응. 그럴 거야. 이건 다른 사람과 나눌 수 없는 거거든."
"야! 우린 둘도 없는 친구이면서 피를 나눈 사이보다 진한 형제 아이가."
"응, 맞아. 하지만 그래도 안 돼!"
포기했다는 듯이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면서 한태석도 재호를 그냥 내버려 뒀다. 월화수목금이 순식간에 지나가고 드디어 재호가 그토록 기다려왔던 포도를 수확하는 날인 토요일이었다.
희망원에서 기르는 포도나무는 키가 그리 크지 않아서 초등학교 고학년이나 중학생 정도만 되어도 포도를 수확하는데 한 손 거들 수 있었다. 아직 키가 자라지 않아서 이를 구경하는 아이들도 포도를 수확하는 아이들도 모두 기쁨과 설레임으로 웃음꽃이 만발한 날이었다.
재호와 소연은 포도 따는 가위로 탐스럽게 익은 포도를 수확하면서 서로 마주보며 뭐가 그리 좋은지 연신 웃고 떠들면서 즐거워했다. 수확한 포도 중에서 도매상에게 넘길 것은 따로 저장고에 옮기고, 남은 포도로 그날은 희망원의 아이들도 실컷 포도를 맛볼 수 있었다. 게다가 몇 년 전에 담아두었던 포도주를 원장님이 아이들에게 아주 조그만 잔에 한 잔씩 나눠주었다.
약간 알딸딸한 기분에 취해 소연은 재호를 따로 한적한 곳으로 불러내어 보자기에 싼 제법 커다란 선물을 건네주었다.
"오빠! 이거 오빠를 향한 내 마음이야."
"어?"
"치! 뭐가 그래? 내 마음이라는데 궁금하지 않아. 어서 열어봐."
"어어 알았어."
재호가 보자기를 열자 액자 속에는 태양을 향해 고개를 든 아주 무성하고 큰 해바라기들의 생동감 넘치는 그림이 있었다. 소연은 희망원 위에서 기르던 해바라기밭의 해바라기들을 그려서 재호에게 선물해주었다.
"우와! 소연아! 그림이 너무 예뻐. 씨앗이 탐스럽게 영글은 이 큰 해바라기 꽃좀 봐. 마치 나를 보고 미소 짓는 것 같아."
"오빠! 이 해바라기는 기쁨과 감사를 상징한대. 그러니까 오빠를 향한 내 마음과 딱 맞아. 미술 선생님이 말해주던데 네덜란드 문학에서 해바라기는 충성과 헌신에 대한 은유래."
"어 그 그래."
재호는 소연의 그 조각 같은 입술로 쏟아내는 아름다운 말에 정신이 혼미해졌다.
"난 오빠가 있어서 행복하고 늘 감사하면서도 오빠가 언제나 내게 헌신했으면 해. 나도 오빠에게 그럴 거야. 그리고 이게 내 진짜 선물이야."
그러면서 소연은 기습적으로 자신의 입술을 재호의 입술에 갖다 댔다. 아주 조심스럽게 서로 입술을 맞대며 탐색하다가 둘은 어느 순간 격정적으로 키스를 했다. 서로를 진심으로 갈망하면서 짙은 키스를 나누는 동안 재호와 소연은 순간 정신이 아득해지고 온몸에 피가 다 쏠려서 세상 태어난 이후 가장 강렬하고 짜릿한 기쁨을 느꼈다. 둘은 이 순간이, 이 행복이 영원하기를 바라고 또 바랐다.
재호와 소연은 서로에 대한 마음을 확인한 후에 밤잠을 설쳤다. 그날 키스로 엄청난 양의 도파민이 분비되어서 온몸이 그것에 지배된 상태이기도 하면서 또 같이하기로 한 앞날에 대한 설렘과 기대로 도저히 잠을 잘 수가 없었었다. 이젠 같이 있고 싶다는 생각이 더욱 강해져서 한시도 떨어져 있기가 힘들다는 생각과 함께 재호와 소연은 생의 열정을 가진 이래로 지녀왔던 순수함이 무르익어서 서로를 향한 강렬한 욕망을 갖게 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