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4화 순수를 파괴하는 손!
세월은 유수처럼 흘러서 어느덧 재호와 소연 모두 고등학생이 되었고 몰라볼 정도로 몸과 마음이 성장했다. 재호는 진해고등학교에, 태석은 진해남자고등학교에, 그리고 소연은 진해여자고등학교에 다녔다. 태석은 고등학교가 다른데도 불구하고 수업이 끝나기도 전에 학교를 나와서 진해고등학교로 와서는 재호를 맞이했다. 마창진 연합의 통은 여전히 한태석이었으나, 그 위에는 언제나 재호가 있었다.
둘은 여전히 짱구 복싱 체육관에 다녔고, 도장에 가기 전에는 진해대로 충장로 일대를 돌아다니며 새로운 신발과 옷들을 구경하기도 하고, 분식집에서 떡볶이, 오댕, 라면 등을 사 먹으면서 계속해서 그들만의 브로멘스를 키워갔다.
희망원 안에서는 김승환 과장이 어느 순간부터 음흉한 욕망을 드러내기 시작하면서 여자아이들에게 손을 댄다는 말이 나돌기 시작했다. 하지만 소연의 주변에는 늘 재호가 눈을 시퍼렇게 뜨고 지켜보고 있었다. 재호의 덩치가 이미 자신보다 훨씬 커진데다 재호의 권투 실력을 잘 알고 있기에 이젠 재호와 힘으로 맞설 엄두가 나지 않았던 터라 지위로 간신히 그를 제어하고 있는 정도였다.
김승환 과장은 재호가 빨리 만 18세가 되어서 희망원을 떠나기만을 기다렸다. 그러면 자신이 그토록 탐내던 소연을 가질 수 있을 거라는 생각을 하면서 음흉한 미소와 함께 군침을 삼켰다.
소연은 중학교 때부터 두드러진 미모로 진해 전역에 소문이 났고, 고등학생이 되자 진해여고의 퀸으로 여기저기서 대시하는 남학생들로 넘쳐났다. 호르몬이 폭발적으로 성장하는 시기이다 보니 그 기운을 주체하지 못하고 위험한 짓을 대놓고 벌이는 이들도 있었다.
어느 날 재호와 태석이 진해대로 인근 가게들을 구경하고 있는데, 근처 분식점 입구에서 덩치가 산만한 운동부 학생들 십여 명이 두 여자를 둘러싸고 위협하고 있었다.
"니들 두 명 오늘은 우리랑 좀 놀자."
"내가 와 그래야 되는데요?"
"뭐 같이 맛있는 것도 묵고, 또 괜찮으면 술도 한잔 빨고, 그렇게 님도 보고 뽕도 따자는 거지. 서로 재미있고 좋자나?"
"고마 우리 보내주이소. 상미야 우리 오늘은 그냥 돌아가자."
"오데! 이 가시나가! 학 마 오빠들이 좋은 말로 초대하면 와야지 꼭 손으로 끌고 가야겠나?"
"악!"
소연의 비명소리가 들리자마자 재호는 번개처럼 그 현장으로 뛰어들어서 주먹을 날리기 시작했다. 소연의 머리카락을 움켜쥐었던 이의 손목은 꺽여서 부러졌고 동시에 턱은 박살이 났다. 주변을 에워쌌던 네다섯 명도 복부를 맞고 고꾸라진 놈에서 낭심을 가격당하고 두 손으로 자신의 낭심을 움켜쥐고 거품을 문 놈, 이미 팬더곰처럼 눈덩이가 퍼렇게 피멍이 든 아이들까지 그야말로 순식간에 아작이 났다.
그러나 혈기 왕성한 나이에 더군다나 운동을 해서 덩치와 힘이 장사인 이들이 십여 명이나 되다보니까 상대에 대한 상황판단이 제대로 되지 않았다. 병을 깨고 각목과 쇠파이프 등 무기를 들고 재호에게 다구리를 가하려던 찰나 한태석이 나서면서 그들을 모두 진정시켰다.
"동작 그만! 니들 내 누군지 알제? 나는 몰라도 이 얼굴에 난 칼자국에 대해서는 들어봤을 끼다. 나 마창진의 통 한태석이다. 여기 재호는 평화주의자 아이가. 그런데 난 아이다. 내가 나한테 대든 놈들한테 어떻게 했는지 다들 들어봤을 끼다. 니들 집에 우리 아이들 데리고 찾아가서 한따까리 하까마? 니 여동생이나 누나 있으모 시집도 못갈 낀데. 괘안켔나? 앞으로 운동 그만하고 싶으면 계속해라. 맨날 우리 애들한테 시달리기 싫으면 고마 무릎꿇고 잘못했다고 빌어라."
한태석의 서늘한 한 마디에 모두들 무릎을 꿇고 잘못했다고 빌기 시작했다. 그들도 소문은 들어서 알고 있었다. 마창진의 실질적인 통은 한태석이 아니라 재호라는 것을. 다만 재호는 대놓고 아이들을 괴롭히지 않으니 누군지 몰라봤을 뿐이었다. 한태석의 협박도 무서웠지만 자기들을 순식간에 아작낸 이가 재호라는 말을 듣는 순간 전의가 꺽인 것이었다.
"소연아! 괜찮아?"
"손대지 마. 놔! 누가 오빠보고 주먹질하래?"
"난 그냥 네가 몹쓸 짓을 당하는 것 같아서."
"이 가시나가 너무하네. 구해줬으면 고맙다고 해야..."
재호의 살벌한 눈빛을 마주한 한태석은 뒷말을 채 잇지 못했다.
"소연이한테 욕하지 마라. 다 이유가 있을 거야."
"난 오빠가 나 때문에 주먹질하는 게 싫어. 지난번 희망원에서도 그렇고, 그러다가 일이 잘못되면 영영 오빠를 다시는 보지 못할 수도 있다는 생각에 내가 얼마나 두려운 줄 알아?"
소연은 갑자기 엉엉 울기 시작했다. 재호는 말없이 소연을 안아서 다독여주며 소연을 위로해주었다.
"약속해. 손가락 걸고 약속해. 절대로 주먹질하지 않겠다고. 난 오빠 없는 세상이 너무 무서워. 그러니까 절대로 내게서 멀어질 행동은 하지 않겠다고 약속해줘."
"알았어. 앞으로 무슨 일이 있어도 내 절대로 주먹질하지 않을게. 그러니까 그만 울어."
태석은 그제서야 재호에 대한 미스테리가 싹 다 풀리는 느낌이 들었다. 이래서였구나! 그렇게 압도적인 무력을 가지고 있으면서도 항상 웃고 다정한 성격으로 다른 아이들에게 절대로 주먹질을 하지 않고 괴롭히지도 않은 이유가 바로 이 여자아이 때문이었구나!
그 무력만으로도 세상을 종횡하면서 호탕하게 살 수 있는데 한 여자 때문에 그 모든 걸 포기하고 순한 양처럼 평범하게 사는 재호가 도무지 이해되지 않았지만, 재호에게 소연은 이미 세상 전부와도 같은 존재였다. 또한 소연이 소중한 만큼 재호에게는 무엇보다도 치명적인 아킬레스건이었다. 태석이의 부재시 재호는 소연으로 인해서 언제든지 터질 수 있는 시한폭탄 같은 존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