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소년

제6화 양을 치는 늑대

by 김하록

가로수길에 쭉 늘어선 노오란 은행나무와 탑산을 붉게 물들인 울긋불긋한 단풍나무로 늦가을의 정취를 자랑하던 풍경도 어느새 교정과 거리에 수북히 쌓이는 은행들과 떨어진 낙엽들이 지천에서 발에 밟히는 소리로 겨울의 초입에 들어섰음을 알려주었다.

그동안 호세와 로드리게스는 각각 필리핀과 리비아로 떠났고, 아프가니스탄에 파견되었던 프랭크가 다시 진해로 돌아와서 예고도 없이 희망원을 찾았다.

"프랭크!"

"재호!"


몇 년의 세월이 흘렀지만, 그들은 서로를 알아보고 격하게 포옹하며 재회의 기쁨을 나눴다. 장난끼 많은 프랭크가 재호에게 더블렉 테이크다운을 노리고 돌진했지만, 재호가 잘 방어해내면서 둘만의 케미를 보여주며 재회의 기쁨을 나누었다. 프랭크의 부재와 그동안 흘러간 시간의 무게도, 세월이 가져다준 성장과 변화의 깊이와 넓이도 둘 사이에 처음부터 어떤 간극도 만들지 못했음을 본능적으로 깨닫고 재호와 프랭크는 진심으로 기뻐했다.

"프랭크 형! 나 이제 곧 만 18세가 되어서 여기서 나가야 해."

"그래? 갈 데는 있어?"

"아니. 이제부터 알아봐야지."

"돈은 있고?"

"내가 돈이 어딨어? 그래서 걱정이야. 관장님 집에 다락방이라도 있으면 얹혀 살까 하는 생각도 들고."

"헤이 브라더! 그건 전혀 걱정하지 마. 나 통제부의 병영에서 나와서 따로 주택을 마련해서 살아. 제법 큰 저택을 얻어서 방도 공간도 넉넉하니까 재호도 같이 와서 살도록 해."

"프랭크! 정말 그래도 돼?"

"당연히 되고말고! 넌 내 동생이잖아. 지금부터 아무 걱정하지마. 넌 이 형이 지켜줄 테니까."

"형! 정말 고마워!"

"고맙긴! 내가 가진 모든 것이 네 것이라고 생각해. 아버진 내가 어렸을 때 월남전에 참전하셨다가 거기서 베트콩의 총에 맞아서 돌아가셨고, 엄마는 얼마 전에 암으로 돌아가셨어."

"형! 미안해. 그말 들으니까 내 마음이 너무 아파."

"네가 왜 미안해? 난 그냥 지금은 나도 가족이 없이 혼자니까 내 동생인 너랑 같이 살겠다는 건데."

"그래도."

"됐어. 그 이야기는 그쯤하고, 나 돈 많으니까 재호 너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만 해."

"지금 당장은 같이 사는 것만으로도 충분히 고마워."

"진짜라니까. 그러지 말고 정말로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해."

"알았어, 형! 진짜로 필요한 거 있으면 다 말할게."

"굳 보이!"

"형은 굳 가이!"

"하하하!"

거리에 구세군이 경쾌하게 흔드는 듣기 좋은 딸랑거리는 종소리와 자선냄비가 등장했고, 어딜 가나 사람들의 마음을 설레게 하는 감성을 자극하는 신나는 크리스마스 캐롤송이 들렸다. 교회와 중원로터리, 진해역 앞 광장, 중앙시장에 설치된 대형 크리스마스트리들의 아름답고 화려한 장식과 조명들로 사람들의 마음은 한껏 들떠있었다. 곳곳의 문구점에는 온갖 화려한 크리스마스카드와 신년 연하장이 사람들의 시선을 끌었다.

재호는 크리스마스가 있는 그 주 수요일에 복싱 체육관에 가기 전에 문구점 중 하나에 들려서 그 중에 마음에 드는 크리스마스카드를 세 장 샀다. 태석이도 재호를 따라서 카드를 몇 장 샀다.

"그 세 장 중에 내 꺼도 있나?"

"꿈도 꾸지 마. 니 껀 없으니까. 남사시럽게 남자끼리 무슨 카드고."

"그란나? 난 니 꺼도 샀는데, 아 어쩌지?"

"뭘 어째? 그냥 생각나는 대로 써서 나 주면 돼지."

"야 그란 게 어딨노? 니도 나 한 개 주라."

"니 걸뱅이 아니라메?"

"그 머시라더라. 맞다. 기브앤테이크. 우리도 그거 하자 마."

"찼뿌라. 난 이미 줄 사람 정해져 있다."

"하나는 소연이 일 거고, 나머지는 누꼬?"

"하나는 이제 희망원 나와야 하니까 그동안 친부모처럼 돌봐주신 우리 이연옥 원장님께 줄 거고, 또 하나는 나한테 같이 살 방을 내준 우리 프랭크 형한테 줄 끼다. 됐나?"

"아 그래도 뭔가 찝찝한데. 하나 더 사서 나도 주면 안 되겠나?"

"아 4는 말이제. 어감이 안 좋다 아이가. 한 장 더 사면 [죽을 사]자가 되어서 괜시리 불안해서 난 싫다."

"마 천하의 재호가 그런 것도 믿나? 그거 다 미신 아이가?"

"그래도 마 싫다. 나도 마음이야 진짜로 니한테도 진짜 주고 싶지. 그래도 괜히 불안해서 그라니까 니는 고마 나한테 받은 거로 해라. 내 니한테는 그날 직접 말로 할게."

"크리스마스 날 나한테 직접 말로 한다는 그 약속 꼭 지켜라."

"아라따. 친구야!. 내 그 약속 꼭 지킬게."

"그래. 그라모 됐다. 난 어차피 니 줄라꼬 샀으니까. 그날 카드에 써서 줄게."

"이해해줘서 고맙다. 친구야!."

"친구 아이가!"


재호는 크리스마스를 4일 앞두고 희망보육원에서 나와 프랭크의 집으로 들어왔다. 짐이라고 해봐야 프랭크가 가져온 더플백 하나에 다 들어갈 정도로 교복을 비롯한 옷 몇 벌과 낡은 신발 그리고 교과서와 학용품 외 개인용품 몇 개가 전부였다.

이연옥 원장은 재호를 꼭 안아주며 좀처럼 놓아주지 못하다가 결국 재호를 보내며 깊은 이별의 눈물을 흘렸다. 가끔씩 치매 증상이 있긴 했지만, 정신이 멀쩡히 돌아온 날에는 여전히 총명하고 지혜롭기 그지없는 여인이었다.


"재호야! 프랭크 형한테 가서 잘 살아야 한다. 넌 공부도 잘하고 운동도 잘하니까 잘 살 거라고 믿는다. 이 엄마가 생각나면 언제든지 보러 온나. 알았제?"

"네, 엄마! 자주 보러 올게요."

"프랭크! 우리 재호 잘 부탁합니다. 정말 착한 아이라예. 세상에 이런 아이는 진짜 보기 드물다 아입니꺼."

"네, 어머님! 걱정하지 마세요. 제가 친동생처럼 아끼고 보살펴 주겠습니다."

이연옥 원장님 아이들 한 명을 보낼 때마다 겪는 슬픔이었지만, 재호를 떠나보내면서 정말 펑펑 울었다. 재호도 소연도 희망원에 있던 아이들도 재호를 배웅하면서 모두 펑펑 울어서 이날 희망원은 그야말로 눈물바다가 되었다.


프랭크의 저택은 정말 당시로서는 엄청 화려한 대리석으로 지어진 집이었다. 마당과 정원도 굉장히 넓고 컸으며 침실도 꽤 많았고, 욕실도 2개나 있는 3층짜리 대저택이었다. 프랭크는 그날 재호가 온 것을 축하해주려고 지인들을 불러서 파티를 열어주었다.

마당에 여러 개의 식탁을 붙여서 마련한 연회장에는 피자와 스파게티, 미트볼, 치킨 수프 등 다양한 음식들이 풍부하게 놓여있었고, 마당에서는 그릴 위에서 소고기와 돼지고기 바베큐를 직접 구워서 접시 위로 날랐다. 돔페리뇽 샴페인과 버드와이저, 하이네켄 등 미군 부대에서 쉽게 구할 수 있는 맥주와 코카콜라 등 음료들도 잔뜩 준비되어 있었다. 프랭크는 지인들에게 재호를 소개하며 무척이나 자랑스러워했다. 재호도 영어로 그들과 소통을 하면서 정말 즐거운 시간을 보냈다.

그날 밤 재호는 프랭크와 함께 가족이 되어 이런 대저택에 사는 게 꿈만 같아서 쉬이 잠을 이루지 못했다. 그러나 재호가 잠을 이루지 못한 주된 원인은 희망원에 두고 온 소연에 대한 걱정 때문이었다.

재호라는 방해꾼이 없어지자, 김승환 과장은 물 만난 고기처럼 그 야욕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그동안 소연은 재호로 인해서 자신의 손이 닿을 수 없는 높은 곳에 있는 신 포도로 생각했으나, 재호가 사라진 지금의 소연은 자신이 손만 뻗으면 언제든지 따먹을 수 있는 탐스럽고 달콤한 포도송이로 다가왔다.

승환은 소연이 자는 방으로 가서 슬며시 문을 열어보았으나, 문은 안에서 잠겨있었다. 몇 번이나 달그락거리는 소리로 인해 소연은 숨 소리도 내지 않은 채 문손잡이를 두 손으로 꼭 잡고 있었다. 그러다가 일순 소연의 방을 향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에 이내 소연의 문손잡이를 잡아 비트는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졌다.

"아이 젠장! 저 할망구가 지금이 몇 신데 아직도 잠을 안 자고 여기로 오는 거야? 괜히 입맛만 다셨잖아. 아쉽지만 내일로 미뤄야겠군."


승환이 소연의 방문을 열려고 문손잡이를 돌리면서 낸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사라지고 얼마 후 누군가가 소연의 방을 조심스럽게 노크했다. 재호를 희망원에서 내보내고 그 후유증으로 잠이 오지 않았던 이연옥 원장이 소연을 달래주려고 온 것이었다.

"소연아! 자니? 나 엄마야."

"엄마? 진짜 엄마예요?"

"응, 엄마야."

"잠깐만요."


소연은 잠시 뒤에 문을 열어주고는 이연옥 원장을 자신의 방으로 들였다.

"엄마! 혹시 조금 전에 엄마가 제 방문을 열려고 문손잡이를 돌리며 문을 달그락거렸어요?"

"아니! 내가 방에 있는 사람 허락도 없이 함부로 문을 열고 들어갈 사람으로 보이니?"

"아뇨. 엄마! 나 너무 무서워요."

"왜? 왜 그러는데?"

"조금 전에 누가 와서 여러 번 제 방문을 강제로 열려고 문손잡이를 돌려서 달그락거리는 소리가 났어요. 그래서 제가 필사적으로 문손잡이를 잡고 있었어요. 그러다가 갑자기 그 소리가 멈추고 엄마가 노크하면서 말하는 목소리를 듣고서 문을 열어준 거예요."

"저런! 그런 일이 있었다고? 정말 무서웠겠구나! 내 요즘 꿈자리가 싱숭생숭해서 우리 원에서 무슨 안 좋은 일이 일어나는 건 아닌지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는데, 아무래도 좀 알아봐야겠구나. 엄마가 오늘은 여기 있다가 갈 테니까 아무 걱정하지 말고 어서 자렴."

"네, 엄마!"


소연은 걱정과 불안으로 계속 뒤척이며 밤이 이슥하도록 잠을 이루지 못했고, 이연옥 원장은 그런 소연의 등을 아기처럼 토닥여주었다. 그렇게 한참의 시간이 지나고 소연은 새벽녘에 겨우 잠이 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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