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7화 운명의 실타래
소연은 끔찍한 불면의 밤을 보낸 후 다음날 재호를 만나서 간밤에 있었던 일을 이야기해줬다.
"오빠! 나 너무 불안해. 김승환 과장이 언제고 날 덮칠 것 같단 말이야. 나 어떻게 해?"
"너무 걱정하지마. 오늘은 내가 같이 있어줄게."
재호는 주먹을 불끈쥐고, 이를 뿌드득 갈면서도 먼저 소연을 안심시켰다.
"그래도 돼?"
"응. 내가 날이 어두워지면 아무도 몰래 네 방에 찾아갈게. 그리고 새벽까지 같이 있어줄게."
"알았어. 이따가 내방에 오면 노크를 똑똑똑 똑 이렇게 세번 짧게 하고 잠시 멈췄다가 다시 한번 더 해줘. 그러면 오빠가 온 줄 알고 내가 열어줄게."
"그래. 알았어."
재호는 태석이랑 관장님께 말하고 이날은 복싱도 건너뛴 채 어둠이 내리기를 기다렸다가 희망원으로 들어가서 몰래 소연의 방으로 움직였다.
단단단 장! 마치 운명 교향곡의 모티브처럼 소연의 방을 노크하자 소연이 재호가 온 줄 알고 문을 열어주었다. 둘은 언제 소연의 방을 침범할지 모르는 김승환 과장을 기다렸다.
어제 소연을 범하려다가 불발된 승환의 욕정은 더욱더 달아올라서 어린 아이들의 숙소에 불이 꺼지자마자 부리나케 별채에 있는 소연의 숙소로 그의 발걸음을 옮겼다.
창문을 통해서 김승환 과장으로 추정되는 사람이 그 건물을 향해 다가오는 것을 보자 소연은 재호에게 침대 밑으로 들어가 있으라고 말했다.
"오빠! 김승환 과장이 내 몸에 손대기 전에 나오면 안 돼. 알았지?
"알겠어. 걱정하지 말고 혹시라도 오면 문 열어주지 말고 그냥 어떻게 나오는지 지켜봐."
"그럴게. 어서 침대 밑으로 들어가."
김승환 과장이 다가오는 발자국 소리가 점점 더 가까워지자 소연의 심장은 미친 듯이 쿵쾅거리며 뛰기 시작했다. 어느새 발자국 소리가 멈추고 소연의 방문 손잡이를 돌리는 소리가 들렸다. 어제와 다른 것은 한 번만 문손잡이를 돌려보더니 곧 부드럽게 문을 열고 들어오는 것이었다. 그의 손에는 어디서 만들었는지 일종의 마스터키가 들려있었다.
"들어오지 마세요. 이러면 안 되잖아요?"
소연이 떨리는 목소리로 말하자 김승환 과장은 음흉한 미소를 지으며 능글맞게 대꾸했다.
"뭘 그리 놀라? 누가 잡아먹는데?"
"노크도 없이 다 큰 여자 방을 함부로 열고 들어오고서 그게 할 말이에요?"
"말 잘했네. 너 다 컸지? 그러니까 이제부터 우리 어른답게 대화해볼까?"
"무슨 대화요?"
"너도 내년 3월이 되면 여기서 나가야 하잖아. 갈 데는 있어?"
"아직 생각해보지 않아서 몰라요. 그건 제가 알아서 할 거니까 하실 말씀 없으면 그만 나가주세요."
"왜 할 말이 없어. 이제부터가 진짠데."
그러면서 김승환 과장은 소연의 침대에 걸터앉으면서 소연을 보고서 자기 옆에 오라고 침대를 손바닥으로 툭툭 쳤다.
"싫어요. 하실 말씀 없으면 그만 나가주세요."
"왜 이렇게 빡빡하게 굴어? 앉아봐. 안 잡아먹는다니까. 내 말 잘 들으면 너 대학교 졸업할 때까지 여기서 계속 지낼 수 있게 해줄 수 있는데. 어때 솔깃하지?"
그러면서 소연의 손목을 잡고 강제로 침대로 데려가려고 했다.
"악! 이 손 놔요. 아프단 말이에요. 어서 놔요."
"앙탈 부리는 것도 귀엽네. 뭐 파닥거리는 맛도 있어야 재밌지."
"뭐 뭐라고요? 지금 그걸 말이라고 하는 거예요."
"아. 이게 말 같지 않구나. 그럼 우리 진짜 대화를 시작해볼까? 몸의 대화 말이야."
김승환 과장의 비열한 말과 소연의 비명소리를 듣고 재호는 번개같이 튀어나와야 하는데, 왠지 아무런 움직임이 없었다. 재호와 소연이 모두 전혀 상상도 할 수 없었던 상황이 벌어졌다. 그 순간 하필이면 재호의 호흡이 가빠지며 까마득하게 잊고 지냈던 아주 어렸을 때의 트라우마가 떠올랐던 것이다.
자신은 부모의 얼굴도 모른 채 희망원으로 들어왔다고 생각하고 살아왔지만, 침대 밑에서 김승환 과장을 기다리는 동안 아주 어렸을 때 아빠가 엄마를 무자비하게 폭행해서 죽이는 걸 침대 밑에서 숨죽이며 지켜보았던 바로 그 장면으로 인해서 재호는 그때 느꼈던 극단적인 공포와 일시적인 호흡곤란 상태에 빠졌다.
김승환 과장은 강제로 소연을 침대로 끌고 온 다음 그녀의 옷을 벗기려고 했으나, 생각보다 소연의 반항이 심하자 결국 그녀의 상의를 손으로 우악스럽게 찢어버렸고, 그 순간 잘 익은 복숭아처럼 탐스러운 소연의 하얀 속살이 드러나자 김승환 과장은 더욱 음흉하고 흡족한 표정으로 혀로 입술을 적시며 소연의 가슴을 향해 손을 뻗어왔다.
그 순간 소연은 사람이 절체절명의 순간이면 내지를 수 있는 엄청난 비명을 질렀고, 그 비명소리에 정신을 차린 재호가 쏜살같이 튀어나와서 김승환 과장을 주먹과 발, 무릎, 팔꿈치 할 것 없이 온몸을 사용해서 무자비하게 구타하기 시작했다. 이미 김승환 과장의 얼굴은 형체를 알아볼 수 없게 되었지만, 그래도 분이 풀리지 않은 재호는 그의 머리카락을 잡고 벽에다가 그의 머리를 강하게 쳐박았다. 그러자 소연에게서 또다른 안타까운 비명소리가 터져나왔다.
"안돼!"
소연의 비명소리와 동시에 김승환 과장의 숨골이 벽에 옷걸이용으로 박아두었던 못에 퍽하고 박히는 소리와 함께 벽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김승환 과장이 축 늘어지자 방안에는 숨막힐 듯한 정적이 흘렀다. 너무도 당황스러운 일이 벌어져서 재호도 소연도 무슨 말을 해야 할지 몰랐다. 극단적인 상황에서 먼저 정신을 차린 소연이 말했다.
"오빠! 진정하고 내 말 잘 들어. 오빠는 오늘 여기 없었던 거야. 저 짐승 같은 놈이 나를 덮쳤고, 내가 강하게 저항하는 과정에서 그를 벽으로 밀쳤는데 그게 하필 옷걸이용 못에 뒤통수가 박혀버린 거야. 이런 경우는 정당방위에 해당해서 처벌받지 않을 수도 있다고 들었어."
"그러면 네가 경찰 조사과정에서 험악하고 모진 조사를 받아야 하는데 어떡하지?"
"지금 그게 문제야. 오빠가 살인자로 감방에 가지 않는 게 중요하지."
"하지만, 나 때문에 네가 그런 고초를..."
"나도 알아. 경찰서에 불려가면 얼마 못 가서 사실을 말할 수밖에 없을 거라는 거. 그러니까 오빠는 그사이에 무조건 해외로 달아나. 난 더이상 생각하지 말고 무조건 해외에서 살아."
"소연아!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살라고?"
"오빠! 그래도 살아있으면 언젠가 한 번은 볼 날이 오지 않을까? 아주 오랜 시간이 지나서 오빠가 살인한 것에 대해서 더이상 처벌받지 않는 그런 날이 오지 않을까? 나 그때까지 이 악물고 살아볼게."
"소연아. 나 그냥 자수하고 감방 갈래. 그러면 조금이라도 널 더 볼 수 있는 거잖아."
"정신 차려! 오빠 바보야? 난 오빠가 나 때문에 감방에 가는 거 도저히 못 봐."
"난 그래도 괜찮아. 나한테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건 너무 과한 꿈이었나봐."
"누가 그래? 평범한 가정을 이루고 사는 게 그게 뭐 대수라고? 오빠가 감방에 가면 내가 안 괜찮다고. 내가. 좀 모질게 들리더라도 이게 오빠 마음을 정하는 데 도움이 될 것 같아. 나 평생 오빠 옥바라지나 하고 살 수는 없어. 차라리 죽어버리면 죽었지 난 그렇게 비참하게 살고 싶지는 않아."
"그래, 알았어. 내가 해외로 달아날게. 그러니 죽는다는 소리는 하지 마. 네 말대로 살다 보면 언젠간 다시 볼 날이 올지 모르잖아. 연락할게."
"아니 이 순간 이후로는 절대로 아무한테도 연락하지 마. 경찰들이 눈 시퍼렇게 뜨고 오빠 잡으려고 혈안이 되어 있을 텐데, 그랬다간 모든 게 끝이야. 먼 세월이 지나서 다시 볼 희망조차도 사라지는 거야. 그러니까 내 말 잘 들어. 어서 도망가서 절대로 연락하지 마. 알겠어?"
재호는 말 대신에 힘없이 고개를 끄덕였다. 둘은 마지막으로 서로를 끌어안고 입 맞추며 못내 안타까운 이별을 했다. 그동안 자신의 삶을 온몸으로 떠받쳐주었던 재호가 희망원을 빠져나가서 시야에서 사라지자 소연은 두 다리에 힘이 풀려서 그 자리에 주저앉은 채 하늘이 무너진 듯 서럽게 울어대며 폭풍 같은 눈물을 흘렸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