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바라기 소년

제13화 타협

by 김하록

재호가 탈출한 그 시각에 이연옥 원장은 소연이 있는 해군 진해병원을 방문해서 소연과 진지하게 대화를 나누고 있었다.


"소연아! 니 임신 한 거 알고 있나?"

"네? 엄마 다시 한번 말해봐요. 제가 정말 임신을 했대요?"


소연은 전날밤 성폭행으로 인한 임신인 줄 알고, 하늘이 무너진 듯 두손에 얼굴을 파묻은 채 절규하기 시작했다. 이연옥 원장은 그런 소연의 등을 토닥여주며 위로했다.


"이 어린 것이 무슨 죄가 있다고? 착하고 여리기만 한 네게 세상이 왜 이렇게 얄궃게 구는 건지. 참 야속하네 마. 어제 일은 고마 말벌한테 한번 된통 쏘였다고 생각하고 다 잊어뿌라 마."


대답없이 계속 통곡하는 소연을 위로하며 이연옥 원장은 갑자기 궁금한 듯 물었다.


"그라고 니 임신 2개월이 넘었다고 카는데, 누구 애고? 내가 생각하는 거 맞나?"

"임신 2개월이라고예?"


소연은 울음을 뚝 그치고, 놀람과 기쁨이 교차된 마음으로 이연옥 원장을 똑바로 쳐다보며 물었다.


"재호 맞제?"

"맞아예. 하나님 감사합니더. 하나님 감사합니더."

"야가 지금 뭐라고 해쌌노? 니 지금 뭐가 감사하다는 기고?"

"전 어제 그 나쁜 형사들때문에 임신한 줄 알았어예. 그런데, 2개월 됐다고 하니까 저도 모르게 막 속에서 감사한 기라네."

"하이고 야야! 니 앞 길이 구만리 같은데, 지금 그 애를 낳을 생각이가?"

"낳아야지예. 전 무조건 이 아이 낳을 겁니더. 그건 그렇고 재호 오빠는 어떻게 됐어예?"

"아직 나도 소식을 들은 바가 없다."


바로 그 시각에 정한길과 배일도 형사는 해군 진해병원 응급실에서 산탄총에 터져나간 오른손과 오른 무릎을 지혈하고 꿰매고 붕대로 싸매고 나서 지속적인 치료를 위해 자신의 입원실로 이동하던 중에 익숙한 목소리를 듣고 소연이 입원한 병실 문을 발칵 열고 들어갔다.


"캬! 원수는 외나무 다리에서 만난다 카더만, 타이밍 한번 기똥차네예."

"이게 무슨 짓이고? 어제 밤에 그런 짐승같은 짓을 하고 여가 어디라고 함부로 들이닥치노? 니들이 사람 새끼더나?"

"하이고 원장님요. 지금 그렇게 큰소리 칠 때가 아니라예. 저 가시나가 지가 김승환이를 정당방위로 죽였다고 거짓말을 해서 진범인 연재호를 숨겨준 기라예. 그게 무슨 의미인지는 압니꺼?"

"그게 야랑 무슨 상관인데?"

"하 참! 세상을 순진하게만 사셔서 그런가 당췌 뭘 모른다 아입니꺼? 그게 범인은닉도피죄에 해당한다 안 캅니꺼. 야 지금 콩밥 먹어야 한다 이말입니더. 우째 이제 실감이 됩니꺼?"


정한길 형사의 말에 갑자기 피가 거꾸로 쏟는 느낌을 받은 소연과 연옥은 잠시 할 말을 잃었으나, 이연옥 원장이 바로 정신을 차리고 정한길 형사의 말을 되받아쳤다.


"그랬다가는 니들도 무사하지 못할끼다. 내 그렇게 되모 절대로 가만 안 있을끼다."

"그래서 말인데예, 어제 일은 절대로 입밖에 내지 않는 걸로 하입시더. 그라모 재호 근마가 단독으로 저지른 일로 처리하겠십니더. 치안감이 나서신다케도 살인죄의 범인도피죄 공범이 될 각오 없이는 어제 일을 문제 삼을 수는 없을 낍니더. 우짜실랍니꺼?"

"안됩니더. 재호 오빠가 감옥에 가는 건 절대로 못 봅니더."

"누가 감옥에 간다 카대? 연재호 근마 그거 어제 부산에서 배타고 해외로 떴삤다. 고마 이대로 기소중지 될끼다. 우째 고마 우리 이렇게 정리하는 게 어떻게노? 이게 바로 누이 좋고 매부 좋고 아이겠나?"


소연은 어젯밤의 후유증으로 정한길과 배일도 형사를 똑바로 쳐다보지 못하고, 대신에 연옥과 눈을 맞추고서 고개를 끄덕였다.


"마 그렇게 하는 걸로 하고, 두번 다시는 그 쌍판떼기 보기 싫으니까 길가다가도 부딪히는 일 없도록 하입시더. 고마 나가주이소."

"그렇게는 힘들겠는데예. 저희들도 많이 다쳐서 여기서 몇일은 입원해 있어야 한다 아입니꺼."

"뭐라꼬?"


이연옥 원장의 목소리 피치가 확 올라가는 그 순간에 병실 문을 확 열어젖히고 한태석이 들어섰다. 한태석은 들어서자마자 손에 들고 있는 걸 급하게 소연의 침대에 내려놓고 정한길의 멱살을 잡았다. 주먹을 불끈쥐며 정한길의 눈을 똑바로 쳐다보며 협박했다.


"여가 어디라고 들어오노? 니들 내가 가만 안 둔다고 했지?"

"태석아! 고마 내보내줘라. 더이상 입씨름 하는 것도 신물난다 아이가."

"원장님예! 이런 놈들은 혼꾸멍이 나야 정신차린다 아입니꺼?"

"그만! 태석이 오빠! 나 그 사람들 한 순간도 더 보고싶지 않아예. 고마 빨리 내보내이소."

"그래. 알았다. 내가 고마 내 생각만 했네."


한태석은 정한길의 멱살을 쥐었던 왼손의 힘을 풀고, 대신에 정한길과 배일도의 등을 강하게 밀쳐서 그들을 병실 밖으로 내보냈다. 쿠당탕 소리와 정한길, 배일도의 신음소리가 났지만 더이상 소란을 피우진 않았다. 한태석의 뒤에 보안사 출신 국회의원 한동준이 버티고 있는 걸 너무나 잘 알고 있었기 때문이었다.


정한길과 배일도 일행이 나가자, 이연옥 원장은 태석이 들고 온 까만 비닐 봉지를 열어보았다. 그 속에는 용기 중간이 배불뚝이처럼 생긴 뚱딴지 모양의 빙그레 바나나 우유 3개와 삼립 땅콩샌드, 소보루빵, 단팥빵, 보름달 카스테라 등 다양한 종류의 빵이 들어있었다.


"뭘 이리 많이 사왔노? 참 맛있게도 생겼네."


이연옥 원장은 말을 하면서 빙그레 우유 뚜껑을 벗겨서 소연에게 건네주었다.


"자 이거 마시고 좀 진정해라. 이제 니를 괴롭힐 사람은 없다 아이가."

"뭘 좋아하는지 몰라서 이것저것 사왔는데, 입맛에 맞을 지 모르겠십니더."

"그란게 어딨노? 다 마음 아이가."

"아 예. 그렇지예."

"그라고 니 여 좀 앉아봐라."


이연옥 원장은 태석에게 의자 하나를 건네주며 숨을 골랐다.


"예, 무슨 하실 말씀이라도 있으십니꺼?"

"그게 말이다. 소연이가 임신한 건 알 끼고, 야가 임신중절 대신에 그 아를 낳겠다고 하는데 그러면 고등학교도 중퇴해야 하는데 어떻게 살아갈지 막막하다 아이가."

"아를 낳는다꼬예?"

"그렇단다. 그라고 그동안 소연이를 지켜주었던 재호는 해외로 달아나서 야를 봐줄 사람이 없다 아이가. 해서 하는 말인데, 니가 야 좀 지켜봐주면 안되겠나?"

"아이 원장님요! 당연한 말씀을 와 그렇게 정색을 하고 말하십니꺼? 그게 뭐 대수라꼬?"

"참말이가? 니 참말로 재호만큼 소연이를 지켜봐줄 수 있겠나?"

"그람요. 재호랑 지는 둘도 없는 친구 아입니꺼? 걱정 마이소. 제가 재호가 했던 것 이상으로 지켜주겠십니더."

"그게 말이다. 생각보다 힘들고 고되다 아이가. 야도 3개월 후면 만 18세가 되어서 희망원을 나가야 하는데, 당장 갈 데도 없고 그 사이 배는 불러올 낀데 살펴줘야 할 게 한두가지가 아이다. 내가 신경을 쓰겠지만, 희망원에 있는 아이들도 돌봐야 하고 내도 좀 막막해서 그런다 아이가."

"엄마! 걱정하지 마. 내가 어떻게든 살아갈 테니까."

"야가 세상이 얼마나 혹독하고 험한 곳인데 그라노? 니 당장 나가 살 집과 생활비는 우짤라꼬? 고등학교 중퇴하면 천상 공장이나 시장 아이믄 공판장에 나가서 일해야 카는데 그게 무자게 힘들다 아이가. 그라지 말고 우리 대책을 좀 세우보자."


셋이 머리를 맞대고 앞날을 고민하고 있던 때, 병실문을 노크하는 소리가 들렸다. 태석이 열어주자, 프랭크가 음료수 1박스와 하얀 히아신스, 연분홓 장미, 그리고 해바라기로 꾸민 꽃송이를 들고 들어왔다.


"아이고, 이게 누꼬? 프랭크 아이가?"

"Yes, Mother!"

"그래, 재호는 잘 보내줬더나?"

"어디서 들었어요?"

"형사들이 좀전에 다녀갔다 아이가."

"네, 재호는 안전한 곳으로 잘 보냈어요. 그러니 너무 걱정하지 마세요."

"프랭크, 아저씨! 재호 오빠 어디로 갔어요?"

"그건 재호를 위해서도 너를 위해서도 말해줄 수 없어. 벽에도 귀가 있는 법이니까. 만날 인연이면 결국 만나게 되어 있어."


프랭크는 그러면서 태석을 보며 말했다.


"너가 태석이지?"

"네, 맞십니더."

"재호가 떠나기 전에 너한테 꼭 전해달라고 하더라. 소연이를 잘 좀 부탁한다고."


무슨 말인지 몰라서 소연을 바라보자, 소연은 그 내용이 쑥스러워서 차마 제입으로 말하지 못하고 망설이자 보다 못한 이연옥 원장이 대신 통역을 해주었다. 태석은 코를 찡긋하며 감정을 억누르고 먹먹한 목소리로 대답했다.


"근마도 참! 내가 어련히 알아서 할 낀데. 걱정 마이소. 제가 무슨 일이 있어도 소연이 잘 지켜줄게예."

"고마워. 재호가 소연이 내년에 희망원을 떠나서 갈 곳이 없다고 걱정이 이만저만이 아니었어. 그러니까 내 집에서 살도록 해."

"잠깐만예. 지금 남자 혼자 사는 데, 소연이를 오라 카는 겁니꺼?"

"나도 곧 한국을 떠날 거야. 그러니 소연이가 들어올 때 쯤이면 집은 텅 비어 있을 거야. 그러니 아무 걱정하지 말고 마음껏 쓰도록 해. 너희 둘에게 주는 집이니까."

"저한테도 주는 집이라꼬예?"

"그래, 소연이를 잘 지켜달라는 의미에서 주는 선물이야."


프랭크의 말에 셋은 의안이 벙벙했다. 진해 최고의 갑부나 살 듯한 그런 저택을 아무렇지도 않게 소연에게 주는 그 배포란 어떤 논리나 계산으로도 설명할 수 없는 일이었다. 소연과 연옥은 당장 희망원을 나가서 살 집 걱정은 없어져서 안심이 되면서도 이래도 되나 싶었고, 한태석은 그야말로 갑자기 소연과 함께 살 집이 생겨서 도대체 무슨 일인가 싶었다.


그런데 프랭크는 미군 장교라고 하지만, 장군도 아니고 이제 대위 계급에 불과한 그가 과거에 도대체 어떤 사연이 있었길래 이렇게까지 돈이 넘쳐날 정도로 부자가 된 것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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