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5화 쁘라툰남 시장
"지금 입은 그 옷으로는 외국인 티가 너무 나니까 쁘라툰남 시장에 들러서 생존훈련 기간동안 그리고 이후 미얀마 샨주에서 입을 옷가지를 좀 사도록 하지. 여긴 날씨가 일년내내 거의 덥지만, 우기도 있고 건기도 있어. 지금은 건기지만 일교차가 심할 수 있어 긴팔과 긴 바지, 그리고 샨족들이 신는 검정색 장화도 필요할 수 있으니 같이 넉넉히 사두는 게 좋을 것 같아.'
"제가 뭘 알겠어요? 사이롱님 생각에 좋으실 대로 하십시오."
"좋아. 앞으로 굳이 설명 안 하더라도 다 이유가 있을 거라고 생각해줘. 대신 궁금한 게 있으면 언제든지 물어봐도 돼."
"네, 알겠습니다."
강가의 습기와 새벽 안개로 흐린 시야를 뚫고 재호가 탑승한 지프차가 쁘라툰남 시장을 향해 출발하자 안개가 걷히면서 드러난 클롱 토에이 항구의 좌측에는 항만 창고들, 철제 구조물, 그리고 낮은 콘크리트 건물들이 보였고 그 사이에 군데군데 항만 노동자들이 작은 파란 플라스틱 의자에 앉아서 아침 식사로 돼지고기를 얹은 국수를 먹고 있었다. 항구 우측에는 판잣집이 빽빽이 늘어서 있었고, 집집마다 늘어선 전선 위에는 빨래들이 가지런히 걸려 있었다. 그 사이 노점 국수집의 화덕에서는 하얀 연기에 실린 국수 냄새와 함께 석탄 냄새가 새어나왔다.
재호는 무심한 듯 주변 경관들을 살펴봤다. 클롱 토에이항구를 벗어나서 중앙 분리대는 없지만 왕복 4차선 도로인 라마 4세 도로로 진입하자 타이어 더미가 쌓여있는 자동차 정비소, 중국어 간판의 철물상, 그리고 낡은 상가건물들이 보였다. 라마 4세 도로의 우측에는 강쪽으로 연결되는 작은 골목들, 나무로 만든 부두, 그리고 간헐적으로 소형 사원들의 끝이 날카롭게 휘어 올라간 지붕 초파에 장식된 황금색 나가들이 눈에 들어왔다.
사이롱이 모는 지프차가 룸피니 공원 근처로 접근하자 갑자기 공간이 넓어지며 가로수길이 나타났다. 코로 들이마시는 공기의 질이 다른지 재호는 지프차에 탄 후 처음으로 심호흡을 했다. 좌측 공원의 철제 울타리 안쪽에는 운동하는 시민들이 제법 보였고, 우측에는 호텔 건물들과 대사관 구역 일부가 보였다.
"뭘 그렇게 유심히 살펴봐?"
"그냥요. 앞으로 제가 살아갈 세상이니까요."
"네가 살아갈 세상은 여기가 아니라 미얀마 샨주야. 여기와는 완전히 다른 세상이야."
"그렇겠지요. 하지만 전 제가 발을 딛는 모든 곳이 제가 살아갈 세상이라고 생각해요. 여기도 무관하지 않을 거라고 생각해서 잘 담아두려고요. 나중에 여기서 잠깐 살게 될지 누가 알겠어요? 그러니 가만히 있는 것보다 내가 어떻게 이동했고, 주변에 어떤 건물들이 있는지 미리 잘 봐두는 게 낫지 않을까 하는 생각에서 그냥 담아두는 거예요."
"하하하! 꽤 낙천적인 친구로군! 좋아 실컷 구경해둬라고. 이제 대사관들이 밀집한 위타유 지역으로 진입하니깐 말이야."
사이롱이 말한 와이어리스 위타유 지역으로 진입하자 좌측에는 열대 나무가 많은 정원에 경비원이 초소를 지키는 담장이 높은 저택형 건물들이 즐비했고, 우측에는 고급 주택들과 소형 호텔들이 시야에 들어왔다. 지금까지 지나왔던 경로와 달리 소음이 크게 감소한 차분한 동네였다.
위타유 지역을 지나 펫차부리 도로로 접근하자 갑자기 오토바이들과 소형 트럭들이 급증했고 더불어 오토바이 머플러에서 나오는 소음도 폭증했다. 좌측에는 재봉틀 돌아가는 소리와 옷 묶음들을 하역하는 소리로 분주한 봉제 공장 건물들이 즐비했고, 우측에는 간판들이 빽빽이 걸려있는 단추, 지퍼와 원단 가게들이 즐비했다.
드디어 쁘라툰남 시장으로 진입하자 노점들이 의류 더미들을 길가까지 진열하기 시작해서 그런지 도로폭이 상당히 좁아졌다. 도로 좌우 양측에서 배달업자가 트럭 후면을 개방해서 첼제 롤링 셔터가 반쯤 올라간 상점들에게 한참 옷을 하역중인 광경이 여기저기서 눈에 들어왔다.
"배고프지? 뭐 좀 먹고 둘러보자."
"네, 좋아요."
사이롱은 쁘라툰남 시장을 잘 아는지, 차를 한 곳에 주차하고는 성큼성큼 걸어서 국수를 파는 한 노점상으로 갔다.
"빠 수리! 여기 돼지고기 국수 2개에 고기 추가로 얹어주세요. 그리고 빠통고 1세트에 카페엔 2잔 주세요."
"네, 잠시만 기다려 주세요."
"빠 수리는 뭐고 빠통고는 뭐예요?"
"빠는 아줌마를 뜻하는 말이고, 빠통고는 튀김빵을, 그리고 카페옌은 연유 아이스커피를 말해."
"아! 감사합니다."
"자네 생각보다 꽤 철학적인 친구로군!"
"철학적이요?"
"지혜를 사랑하는 친구라는 말이지. 하하하!"
"자 여기 있습니다."
수리 아줌마가 국수가 담긴 그릇에 육수를 붓고 돼지고기를 듬뿍 얹어 주었다. 빠통고에 튀김빵 1세트도 원래는 2-3개 들어야 하는데, 수리 아줌마가 사이롱을 잘 아는지 5개를 넣어주었다. 김이 모락모락나는 국수를 한 젓가락 듬뿍 잡아서 입에 넣는 순간 재호는 우왝! 소리와 함께 그대로 국수 그릇에 뱉어냈다.
국수에 들어간 소스의 역한 비린 냄새도 그랬는데, 파란 이파리를 국수와 함께 입에 넣는 순간 비누를 씹은 듯 뭐라고 형용할 수 없는 거북하고 역한 맛에 그냥 국수 그릇에 먹었던 그대로 토하고 말았다. 완전히 새로운 문화에 접촉해서 처음 맛보는 국수 맛에 거북하기 이를 데 없는 이질감이라니! 그러나 재호는 순간 정신을 차리고 사이롱과 수리 아줌마의 눈치를 살폈다. 다행히 그들은 그 상황을 자주 봐왔던 듯 좋다고 박수까지 치며 웃으며 즐기고 있었다.
"저런! 고수때문인가 보군!"
"고수요?"
"국수에 들어 있는 그 작은 이파리 말야. 그게 고수야. 고수를 처음 맛본 사람들는 으레 그런 반응을 보이지만, 나중엔 국수를 먹을 때마다 고수를 듬뿍 넣어 달라고 할 정도로 고수를 좋아하지. 어떻게 고수를 빼달라고 할까?"
"아뇨. 그게 이 세상의 맛이라면 저도 그냥 고수와 함께 먹겠습니다."
어떻게든 새로운 세상에서 살아남겠다는 각오로 생각을 고쳐먹자 처음의 역한 맛은 점차 흐려지고 점점 국수가 맛있게 다가왔다. 그 순간부터 재호는 국수를 마파람에 게눈 감추듯 걸신들린 듯이 먹기 시작했다.
"하아 그친구 누가 보면 며칠을 굶은 줄 알겠군?"
"너무 허기가 져서 아무리 먹어도 배가 부르지 않아요."
운명에 떠밀리다시피 낯선 땅에 도착해서 처음으로 접한 고수가 들어간 외국 음식에 강한 거부감을 느꼈지만, 재호는 소연에 대한 상실감으로 가슴에 크게 뚫린 구멍을 음식으로 채워 넣어서 메우려는 듯 국수와 빠통고를 마구 먹어댔다. 하지만, 그런 음식으로는 아무리 배를 채워 넣어도 상실감에서 오는 허기는 가실 줄을 몰랐다.
그런 재호가 측은했는지 사이롱은 자신의 국수를 들어주려고 하자 수리 아줌마가 사이롱을 말리고 새롭게 국수 한 그릇을 내어주었다. 재호는 새로 내어준 국수마저 정말이지 순식간에 다 먹어치우고는 마지막으로 카페옌을 맛있게 원샷으로 마셨다.
"천천히 먹어요. 그러다 체하겠어요."
"괜찮아요. 빠 수리! 제 나이때는 돌도 씹어먹을 만큼 위가 튼튼하니까요. 잘 먹었습니다."
"하하하!"
"호호호!"
사이롱과 빠 수리는 어이가 없으면서도 천진난만한 재호의 성격에 절로 웃음이 터져나왔다. 사이롱은 아침 식사를 마치고 수리 아줌마에게 총 34바트를 건네주고는 시장 안쪽으로 들어갔다.
밖에서 봤을 때 아주 작은 규모의 시장처럼 보였는데, 그 입구로 들어서서 조금 들어가 보자 마치 개미굴처럼 엄청나게 복잡한 미로속에 수많은 옷도매상들이 빼곡히 들어서 있었다. 엄청난 규모의 복잡한 미로속을 사이롱은 마치 자기 집 안방 드나들듯 여유롭게 헤치며 나아가 단골 옷 도매상 중 하나인 Chokchai Clothing Wholesale 가게 앞에서 멈춰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