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7화 새로운 신분
"지금부터 너는 새로운 신분으로 살아가게 될 거야."
"새로운 신분요?"
"그래. 쿤사의 의심을 피하기 위해서 철저하게 숙지해야 될 부분이니 잘 듣고 외우도록 해라."
"외우면 되는 거죠?"
"그냥 외워서는 안되고, 쿤사가 수긍할 정도로 아주 자연스럽게 말할 수 있어야 한다. 그 말에 담긴 문화적인 맥락이나 분위기 등도 자연스럽게 잘 표현할 수 있어야 해."
"알겠어요. 암튼 외우는 거라면 자신 있어요. 어떤 내용을 말할 때 어떤 분위기와 태도로 말해야 하는지만 자세히 코칭해주세요."
"외우는 데는 자신이 있단 말이지. 좋아 일단 네가 숙지해야할 내용이니 잘 들어라. 이제부터 넌 미얀마 샨주 남칸 마을의 귀족 사오 쿤터와 샨주 북부의 귀족 무세 가문 출신의 어머니 낭쉐옹 사이에 태어난 유일한 후손이다. 네 부모는 미얀마의 정국이 불안해지자 미얀마 내전이 일어나기 몇년 전에 티크 원목의 수출을 통해서 알게된 부산에 있는 동명 목재의 강석진 회장에게 너를 의탁했다. 강석진 회장은 당시에 직접 세운 학교가 없어서 너를 성창기업의 정태성 회장이 세운 부유층들이 다니던 사립중학교인 성지중학교로 너를 보냈으며, 너는 성지중학교를 거쳐서 성지고등학교를 3학년 1학기까지 다녔다. 네가 3학년이 되었던 1980년 5월 야당 정치인들을 후원해서 신군부의 눈 밖에 난 강석진 회장은 외화 도피와 세금 포탈을 명분으로 전재산 포기각서를 썼다. 그 이후 너는 강석진 회장의 몰락과 한국의 격변하는 정세에 쫓겨서 네 가문을 다시 부활시키려고 태국으로 돌아온 것이다. 지금까지 말한 내용을 한번 이야기해봐."
재호는 사이 롱의 지시에 따라서 그동안 들었던 내용을 한 글자도 틀리지 않고 완벽하게 사이 롱이 자신에게 말해주었던 내용을 그대로 사이롱에게 들려주었다. 사이 롱은 재호의 경악할 수준의 기억력에 놀라움과 감탄과 기쁨이 뒤섞인 표정을 감출 수가 없었다.
"이걸 딱 한번 듣고 완벽하게 기억한다고! 출발이 좋구나. 아주 좋아. 네 직계 조상은 13세기 전설적인 샨족의 왕이자 몽마오 왕국의 건설자인 사오 한 파, 고조할아버지는 사오 상 하이, 증조할아버지는 사오 슈웨 타익, 할아버지는 사오 홈 파, 아버지는 사오 쿤 터이고 가문의 상징은 황금 사자다. 그리고 네 어머니는 국경의 주인인 무세 가문의 사오 쿤 쉐 웅의 장녀이고, 가문의 상징은 은색 공작이다. 이 책은 남칸 가문에 대한 책자이고, 그리고 이것은 무세 가문에 관한 책자이다. 지금 내가 들려준 내용 말고도 가문의 주요 특징들을 반드시 숙지하도록 해. 기한은 3일이다."
사이 롱은 재호에게 남칸과 무세 가문의 족보와 가문의 문장, 인장, 가보 등 중요한 사항을 정리해 둔 책자 두 권을 재호에게 건네주며 임무를 하달했다. 재호는 남칸 가문에 대한 책자를 소개한 책을 빠르게 훑어보다가 문득 궁금한 점이 생겨서 사이 롱에게 물어보았다.
"네, 알겠습니다. 그런데, 이 그림 속에 장검은 뭐죠?"
"그 장검은 황금 사자의 포효를 뜻하는 '사오 킹 캄'이라고 한다. 미얀마 샨주의 북부 귀족들 사이에서는 '남칸의 영혼'이라고 불리지."
"사오 킹 캄! 남칸의 영혼! 멋진데요."
재호는 장검의 이름을 읊조리며 장검을 마주하게 될 때를 생각하며 흥분과 기대가 밀려오는 것을 느꼈다.
"아쉽게도 이 장검의 행방을 현재로서는 알 수 없다."
사이 롱의 말에 실망한 표정을 짓는 재호에게 사이 롱이 피식 웃으며 말했다.
"실망했나? 그러기에는 아직 이르다. 그건 네가 풀어내야 할 숙제이기 때문이다."
"제가 풀어내야 할 숙제라고요?"
"그래. 네 아버지 사오 쿤 터가 미얀마 내전으로 돌아가시기 전 남칸 축제 때 마지막으로 선보인 라이 타이의 초식이 있다."
"그 초식이 남아있다고요?"
재호는 기대와 흥분으로 사이 롱의 말을 되물었다.
"그렇다. 그 초식의 이름은 '라이 킹 레오', 즉 '수중 사자 잠영(潛影)'이다. 간단히 잠영이라고 한다."
"라이 킹 레오! 그런데 그 잠영을 전수해줄 사람이 현재 살아 있나요?"
"그렇다. 다행히 남칸 가문의 집사였던 캄 루(Kham Lu)님이 네게 그 초식을 전수해줄 것이다."
"캄 루 집사님은 지금 어디에 계신가요?"
"아직 이르다. 네가 남칸어를 완벽히 마스터하고 나면 대면하게 해줄 거야."
"하루라도 빨리 만나고 싶네요."
"워워워! 진정해, 재호! 아직은 때가 아냐. 그를 언제 만날지는 네게 달렸다. 네가 부산으로 유학을 가서 적지 않은 세월 남칸어를 사용하지 않아서 서툴다고 해도 티가 나지 않을 정도는 되야 하니까. 그렇지 않으면 캄 루는 너를 의심하고 '잠영'을 네게 전수해주지 않을 거야."
"지금 당장부터 미얀마 샨어와 남칸방어를 배우고 싶어요."
"젊다는 건 열정이 넘쳐서 좋군!"
그때, 베이스 캠프의 보조 요리사이자 청소를 담당하고 있는 시리가 노크를 하고 들어왔다.
"저녁이 준비됐습니다."
"아 이쪽은 태국명은 시리이지만, 미얀마 남칸 출신으로 원래 이름은 황금빛 달콤함을 뜻하는 '완 쉐(Wan Shwe)'야."
"Mai-soong-ton-jao-khà(마이-숭-똔-짜오-카). Hpro-tsu-tsai-pan-khà" (프로-쭈-짜이-빤-카)."
"무슨 뜻이죠?"
"남칸어로 반갑습니다. 잘 부탁드립니다를 의미한다고 보면 돼."
"사이 롱님은 어떻게 남칸 방언을 알고 계시는 거예요?"
"난 남칸 지역과 매우 가까운 미얀마 샨주 북부 세니 출신이니까."
"아! 그래서 남칸 방언도 잘 아는군요."
"뭐 남칸 사람처럼은 아니어도 어느 정도 말하고 알아들을 수는 있지. 자 어서 저녁 먹으러 가자고."
"네."
재호은 시리의 안내를 받으며 사이 롱과 함께 식당으로 이동했다. 그곳의 식탁 위에는 미얀마 전통 쌀국수 칵 수오이 남칸 (Khat Suey Namhkam)과 찹쌀로 만든 밥 카오 냐우(Khao Nyaw)가 각자의 자리에 하나씩 놓여있었고, 그 외에 남칸식 민물고기 된장구이인 투아 나오 파 (Thua Nao Pa), 남칸식 돼지고기 발효요리 무 솜 (Moo Som), 남칸 산악 지대의 야생 채소 볶음 킹 팩 (Hking Phak)이 같이 먹을 수 있게 몇 개씩 차려져 있었다.
사이 롱이 재호와 함께 들어서자 모두 일어섰다가 사이 롱이 착석하자 같이 자리에 앉았다.
"자 소개하지. 이쪽은 오늘의 요리를 준비해준 주요리사 룬 캄(Lung Kham)이야."
"사와띠 캅(Sawatdee Kráp)."
"사와띠 캅(Sawatdee Kráp)."
재호도 쁘라툰남 시장에서 사이롱을 따라다니면서 귓동냥으로 들은 태국어로 반가움을 표현하자 룬 캄은 환한 미소를 지어보였다.
"그리고 이쪽은 중국 운남성 접경지에서 수십 년간 무역을 하면서 남칸어를 익혔던 태족(Tai) 출신 언어학자 사이 렝이야."
"Chom-jai-te-khà" (촘-짜이-떼-카)."
"Chom-jai-te-khà" (촘-짜이-떼-카)."
재호가 어슬프게 사이 렝의 발음을 따라하자, 사이 렝이 이를 교정해 주었다.
"사오 칸! '촘(Chom)'을 발음할 때 입술을 너무 내밀지 마라. 부산 촌놈처럼 들린다. 입안에 묵직한 구슬을 문 것처럼 소리를 가두고, 마지막 '카(Khà)'는 슈웨리강 깊은 곳에 돌을 던지듯 낮게 가라앉혀야 해."
"네, 알겠습니다. Chom-jai-te-khà" (촘-짜이-떼-카)."
재호가 사이 렝의 교정으로 다시 말하자 흡족한 미소를 지어 보이며 칭찬을 했다.
"처음인데 나쁘지 않군. 앞으로가 기대되는 친구로군."
"네, 잘 부탁드립니다."
"자, 이쪽은 네게 라이 타이 검술을 가르쳐줄 무술 사범인 아잔 통이다."
"Chom-chai-te-khà" (촘-짜이-떼-카). Sue-pái-long-mue-kan-di-di-khà" (쓰-빠이-롱-므-깐-디-디-카)."
"아잔 통은 미얀마 동부 켕퉁 출신이라 남칸 방언과는 달리 발음이 부드럽다. 그러니 라이 타이를 익히기 위해 이해하는 수준에서만 이해하면 된다."
"그러니까 '반갑다. 앞으로 잘해보자는 뜻'인 거죠."
"그 녀석 눈치 하나는 기가 막히군! 좋아. 아주 좋아."
"그리고 이쪽은 네게 남칸 사오가문의 의례와 복식을 가르쳐 줄 룬 페 (Lung Hpe), 그리고 저쪽은 네게 사교예절과 식사예절 등 남칸의 문화를 가르쳐 줄 난 홈 (Nang Hom)이다."
사이 롱이 소개할 때마다 서로 간에 인사말이 오갔고, 재호는 남칸의 귀족 가문인 사오 칸으로 거듭나기 위한 첫걸음을 뗐다.
"자 인사는 이쯤하고 식사하도록 하지. 사오 칸! 맛있게 먹도록!"
"네, 잘 먹겠습니다."
재호는 씩씩하게 말했으나, 미얀마 쌀국수 '칵 수오이 남칸'을 한 수저 떠서 입안으로 넣는 순간 돼지 뼈를 장시간 고아낸 국물에 특유한 방식으로 삭힌 대나무 죽순(Hnyat)을 넣어서 시큼하면서도 쿰쿰한 부패한 듯한 죽향이 진동하는 형언하기 어려운 맛에 살짝 당황했다. 함께 한 모든 사람들이 그 표정을 놓치지 않고 본격적인 식사 예절에 대한 교육에 들어갔다.
"남칸 귀족이라면 이 향을 즐기며 국물을 들이킬 수 있어야 한다."
"네, 알겠습니다."
"앞으로 Hman-khà, jao-sao-khà(만-카, 짜오-사오-카)라고 말하도록."
"Hman-khà, jao-sao-khà."
"아랫배를 단단히 조이고, 소리가 척추를 타고 올라오게 만들어. 'Hman-khà...'라고 할 때 네 가슴의 진동이 이 찻잔까지 전달되어야 진짜 남칸의 대답이다."
사이 렝이 계속해서 재호의 발음을 교정해주었고, 재호는 이를 열심히 따라했다. 익숙하지 않은 맛에 적응하면서 동시에 남칸 방언과 식사 예절을 동시에 익혀야 하는 재호에게 신경 세포의 각성과 언어 영역에 기민함을 극적으로 요구하는 상황이었다.
재호는 계속해서 슈웨리강에서 잡은 민물고기에 샨족 전통 발효 콩인 청국장과 유사한 '투아 나오'를 듬뿍 발라 바나나 잎에 싸서 숯불에 구운 요리를 맛보았고 얼굴의 찡그림과 풀림, 그리고 미소의 적응과정이 계속해서 반복되었다. 생돼지고기를 밥, 소금, 마늘과 함께 며칠간 발효시켜 신맛이 나게 만든 뒤 고추와 함께 볶은 무 솜은 재호의 입맛에도 맞아서 맛있게 먹었다. 고수보다 향이 강한 각종 허브와 쌉싸름한 맛이 나는 야생 나물을 돼지기름(Lard)에 빠르게 볶아낸 야채 볶음인 킹 팩 (Hking Phak)에서 또 한번 도전에 직면했지만, 재호는 덤덤하게 그 맛을 받아들였다. 재호의 일거수일투족을 지켜보던 사이 롱과 요리사를 포함한 교관들도 재호의 적응력에 적잖이 놀라며 또 동시에 안도하는 모습이었다.
"숟가락 대신 오른손 세 손가락으로 찰밥을 뭉쳐 반찬을 집어 먹어야 합니다. 남칸의 사자는 고개를 숙여서 음식을 먹지 않고 음식을 집은 손을 입까지 올려서 먹습니다. 손가락 마디에 기름이 묻지 않게 우아하게 먹는 것이 사오 칸의 품격입니다."
"네, 알겠습니다."
사교 예절과 식사 예절을 담당한 난 홈이 재호에게 밥 먹는 중간 반찬을 집어 먹을 때 예절을 알려주었다. 재호는 중간 중간에 입안에 있는 기름기를 씻어내기 위해서 샨차를 마시면서 첫 남칸식 식사를 무사히 마친 후, 자신의 숙소로 돌아가서 침대에 걸터 앉아서 안도의 한 숨을 쉬고 있을 때 시리가 수건과 칫솔, 비누와 치약을 들고 재호의 숙소로 찾아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