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18화 엇갈린 운명
시리가 가져온 수건, 비누, 치약, 칫솔 등 개인 위생 도구들을 재호에게 건네주며 말했다.
"사오 칸! 뭐 필요한 것 있으면 언제든지 저를 부르세요."
"네, 알겠습니다. 고맙습니다."
"덥지 않아요?'
시리는 재호를 보고 덥지 않냐고 물어면서 손바닥으로 자신의 얼굴에 부채질을 했다. 저녁 식사를 할 때는 못느꼈지만, 시리는 몸매가 잘 드러난 통치마에 하얀 면티를 입고 있어서 그 모습이 꽤 섹시했지만, 재호는 담담하게 시리의 질문에 대답했다.
"그래도 여긴 티크 나무 숲이 있어서 도심보다는 덜 더운 것 같아요."
"그렇다면 다행이네요. 뭐 생각나는 거 있으면 말해요."
"혹시 여기도 수박 같은 거 있나요?"
"수박을 좋아하세요?"
"네, 여름에는 없어서 못 먹죠."
"그럼 잠시만 기다려주세요. 제가 곧 땡모반을 만들어 드릴게요."
"땡모반?"
"수박 주스요."
"아 수박 주스."
재호가 수박 주스를 따라 말하면 군침을 흘리자, 시리는 환하게 웃으며 침대에 앉아있는 재호의 얼굴에 커다란 복숭아처럼 봉긋 솟아있는 자신의 가슴이 거의 밀착되게 다가가 그의 입가에 묻은 침을 손으로 닦아주었다.
"네, 땡모반이요."
재호가 정신을 차리기 전에 시리는 이미 돌아서서 재호의 방을 나서서 주방을 향해 걸어갔다.
"무슨 냄새지? 시리의 몸에서 특이한 냄새가 났는데. 황금빛 달콤함이라더니 시리의 몸에서 나는 향기를 말하는 것이었나?"
한편, 주방으로 간 시리는 얼음과 적당한 크기로 썰어 놓은 수박조각들을 믹서기에 넣고서 돌렸다. 믹서기에 얼음과 수박이 갈리며 돌아가는 소리가 적막한 정글의 어둠 속에 울려퍼졌다. 세로로 길이가 상당히 긴 유리 잔에 땡모반을 넣어서 빨대를 꽂고, 그 위에 얇게 썬 수박 한 조각으로 멋을 낸 후 시리는 쟁반에 얹어서 그것을 들고 재호의 방으로 가서 문을 두드렸다.
"네, 들어오세요."
"여기 땡모반이에요."
"우와, 대박! 이거 진짜 큰 수박 주스네요. 이렇게 큰 수박 주스는 처음이에요."
"어서 먹어봐요."
"네, 감사합니다."
빨대에 입술을 갖다대고 그대로 길게 한 모금 수박 주스를 빨아마신 재호는 그 달콤함에 감탄했다.
"우와! 정말 달아요. 진짜 진짜 달고 맛있어요."
"맛있다니 다행이에요. 앞으로 땡모반이 생각나면 언제든지 말씀하세요. 제가 즉각 만들어 드릴게요."
"저한테 너무 잘해주셔서 어떻게 감사해야 할지를 모르겠어요."
"뭘 이 정도 가지고 그러세요. 정말이지 필요한 것 있으면 뭐든 말씀하세요."
"필요한 건 아니고 궁금한 게 하나 있어요."
"뭔데요?"
"여기로 오는 길에 빽빽이 들어선 거대한 나무들 있잖아요?"
"아 티크 나무요."
"네. 그 티크 나무의 거친 껍질을 감고 올라가며 피어 있는 하얀 꽃들은 무슨 꽃이에요?"
"자스민 꽃이에요. 태국어로는 말리(Mali)꽃이라고 해요."
"아 자스민이었군요."
"왜요?"
"시리에게서 그 꽃에서 나는 것과 똑같은 향기가 나서 물어봤어요."
"제게서요?"
"네."
"얼마나요?"
"예?"
"얼마나 강하게 나냐구요?"
"아주 은은하면서도 깊은 여운을 남길 정도로요."
"어느 쪽이에요?"
"예?"
"좋은 쪽으로 아니면 나쁜 쪽으로요?"
"그야 당연히 좋은 쪽으로죠. 살짝 정신이 혼미해지는 것만 빼고요."
시리는 재호의 솔직한 표현에 고개를 살며시 돌려서 부끄러우면서도 행복한 미소를 지었고, 재호는 자신이 한 말을 뒤늦게 깨닫고는 얼굴이 화끈거려서 애꿎은 땡모반을 연신 흡입했다. 얼마간의 어색한 시간도 시리가 화제를 돌리며 이어가는 대화 속에 웃음꽃이 피어났고, 재호가 땡모반을 다 마시자 시리는 빈 잔을 쟁반에 얹어서 가지고 나갔다.
시리가 나가자 재호는 손바닥으로 자신의 뺨을 수차례 때리며 자책했다. 운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려서 사랑하는 소연과 생이별을 하고 머나먼 타국으로 도망쳐 온 자신의 현 상황과 다시는 한국 땅에 돌아오지 말고 자신은 영원히 잊고 살라는 소연의 마지막 말이 아직도 귓가에 생생하게 울리는 듯 재호는 외로움과 그리움 사이에서 고뇌하며 열대의 정글에서 풀어진 자신의 마음가짐을 차갑게 가라앉히려고 애썼다.
재호는 사이 롱이 건네준 남칸의 사오 쿤 터 가문의 족보를 펼치고 열심히 숙지하기 시작했다. 밤이 꽤 깊도록 남칸 가문에 이어서 무세 가문의 족보에 대해서도 숙지한 재호는 진해에 두고 온 소연이 잘 지내고 있는지 생각하며 한참을 뜬 눈으로 있다가 겨우 잠이 들었다.
한편, 진해 해군병원에서 몸을 추스린 소연은 태석의 도움으로 희망원에서 얼마 안 되는 자신의 소지품을 챙긴 후 프랭크가 남겨준 저택으로 거처를 옮겼다. 소연이 나가는 날 이연옥 원장은 뭐가 그리 아쉬운지 연신 눈물을 흘리며 태석에게 신신당부했다.
"우리 소연이 잘 부탁한데이. 우리 소연이 혼자라고 함부로 대하지 말고 잘 아껴주고 지켜주라. 그라고 쟈는 절대 혼자 아이다. 내가 쟈 엄마다. 알제?"
"네, 잘 알겠십니더. 너무 걱정 마이소. 제가 아직 어리고 서툴지만서도 야가 애 잘 낳고 잘 키울 수 있도록 옆에서 마이 도와주고 잘 지켜주겠십니더. 그라니까 이제 그만 들어가이소. 바람이 차다 아입니꺼?"
"괜찮다. 너네 가는 거 보고 갈꾸마. 니들이 먼저 가라."
"엄마! 자주 올게."
"아이다. 가서 태석이랑 잘 살아라. 여는 진짜 힘들 때만 오고. 알았제?"
"엄마!"
"아이고 우리 딸!"
그렇게 부둥켜 안고 한참을 울면서 이연옥 원장과 소연은 어렵게 어렵게 서로를 떠나고 보내면서 결국 이별을 받아들였다. 태석은 소연의 짐을 어깨에 짐어지고 프랭크가 그들에게 남겨준 저택을 향해 발걸음을 옮기기 시작했다.
전날 밤 태석의 아버지 한동준 국회의원은 태석이 나가서 산다고 할 때, 보안사 장군 출신답게 불같이 화를 내고 호통을 쳤다.
"야이 문디 자슥아! 니가 지금 제 정신이가? 지금 한참 중요한 시기인데, 대학 갈 생각은 안 하고 뭐? 어디서 듣도 보도 못한 족보도 없는 가시나랑 살겠다고 집을 나가? 어데 니도 사람이면 한번 생각이라는 걸 해봐라."
"충분히 생각했십니더. 그라니까 아부지는 말릴 생각하지 마이소."
"뭐라케샀노? 이 문디 자식이. 니 인생 그 따구로 살라카모 고마 여기서 콱 죽어삐라."
한동준 의원이 아이언 골프채를 들고 한태석의 머리를 내리칠려고 하자, 태석의 엄마 정여옥이 온몸을 던져서 한동준 의원을 막아섰다.
"아 죽일 생각입니꺼? 그렇게 윽박질러서 될 아이가 아니란 거 당신이 더 잘 알잖습니꺼?"
"니는 고마 비켜서라. 빨리 안 비키고 뭐 하노?"
한동준은 정여옥에게 눈을 부라리며 위협했지만, 정여옥은 한 발자국도 물러서지 않고 대꾸했다.
"쟈 얼굴에 칼자국 난 거 안 보입니꺼? 당신이 쟈가 하기 싫은 거 억지로 강요할 때, 당신 보는 앞에서 커터 칼로 지가 그은 거 말입니더. 지는 마 그때만 생각하모 지금도 심장이 막 떨린다 아입니꺼."
정여옥이 말을 하다가 무릎에 힘이 빠져서 주저앉으려는 걸 겨우 악을 쓰며 버티면서 말을 이어갔다.
"태석이 아부지요. 지금은 고마 태석이 하고 싶은 대로 실컷 살아보라고 냅둡시더. 그라모 지도 살아보고 힘들면 고마 돌아올 겁니더."
"니 찢어진 입이라고 그게 말이라고 하나?"
"안 그라모예? 태석이가 커터 칼로 지 목아지 긋는 거 볼랍니꺼? 예?"
정여옥의 절규에 한동준 의원은 결국 골프채를 집어 던지고 거칠게 문을 열고서 집을 나가버렸다. 그렇게 한 차례 홍역을 치르고서 다음날 한태석은 아버지 한동준 의원의 집에서 나와서 희망원을 거쳐 소연의 짐을 어깨에 짊어지고 소연과 함께 프랭크의 집으로 향하고 있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