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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연속에서 걷고 바라본 철학자.

자급자족 숲속생활의 철학자 소로

by 마이진e


소크라테스 익스프레스 에는 14명의 철학자가 등장한다.

그 중에서도 자연친화적인 삶과 검소한 생활로 유명한

헨리 소로에 대하여



본다는 것이 무엇인지 종종 헷갈린다.

바라보는 건지

흘려보는 건지


2층 카페 창가에 앉아 멍하니 거리를 보다 보면

잔잔히 흐르는 물결처럼 세상이 지나간다.

눈은 떠있지만, 마음은 딴 데 있다.




에릭 와이너는 그런 나에게

바라봄의 철학자로 소로를 소개 한다.

“그는 걷는 철학자가 아니라 보는 철학자였어요."




그 말이 마음에 닿는다.

월든의 소로의 글을 보며 그는 묵묵히

지켜보고 바라보는 존재라는 였다는 걸

어떻게 보면, 다르게 봄으로서 살았던 셈이다.



소로는 숲으로 들어갔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고

그저 존재하기 위해 애썼다.

그는 새를 봤고, 물결을 봤고

그 안에서 자신을 봤다.




자연을 좋아 해서가 아니었다.

더 가지려고 하지 않았고

그러함을 존재해 보이기 위해 애썼다.

그는 새를 봤고, 물결을 봤고,

그 안에서 자신을 봤다.


오롯이 그의 시간이었다.


그가 본건 나무가 아니라

고요함 이였고

햇살이 아니라

살아 있음이었다.




우리는 다 본다고 생각한다.

하지만 소로는 묻는다.




“ 그걸 정말로 보았니? “

그 잎사귀가

오늘 아침의 잎사귀라는 걸 알아보겠니?



한참을 멈춰 선 것 같은 문장이다

읽는 내가 아니라

읽히는 내가 된다.


와이너는 말한다.

우리는 바쁘게 ‘목적지’를 향해 달린다.

그런데 소로는 ‘지금 여기’를 본다.


스쳐 지나가는 것들 사이에서

잠시 멈추고 귀 기울인다.




나는 천천히 걸어 보고자 한다.

천천히 바라보고자 한다.



길가의 자라난 꽃들에게 다정하게 건넨다.

“오늘도 무사히 피어 있네”

그 말이 무슨 뜻인지 몰라도

나는 그렇게 살아 보려 노력해 보고자 한다.




소로처럼 산다는 건

누구보다 더 적게 소유하고

누구보다 더 깊이 바라보는 것

그건 아무것도 하지 않는 게 아니라

제대로 살아내는 방식이다.



어느 날엔가 와이너는

소로의 집터를 찾아간다.

그 자리에 앉아 조용히 말해본다.

“그는 떠났지만, 그의 시선은 여기에 있어요.”




그 말이 참 좋다.

살아가는 법을 다시 묻는 일이다.

아무도 주목하지 않는 순간에

자연이 고맙게도 존재하고 있다는 걸

믿고 보는 일이다.


오늘도 나에게 묻는다.

지금 이걸

정말로 보고 있는 걸까?

아니면 그냥

지나가고 있는 걸까?


소로라면

멈춰 섰을지도 모르겠다.

그리고 조용히 속삭였을 거야

“이 순간에도 우주는 충분해”


이것이 소로의 삶을 영위한 방식이다.


에릭 와이너가 바라본

소로처럼 본다는 것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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