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음증적 쾌락을 위해 소비되는 여성의 결핍 (feat.로라 멀비)
어렸을 때부터 집에 오면 가장 먼저 하는 일은 TV를 켜고 OCN과 채널CGV에서 무엇이 상영 중인지를 체크하는 것이었다. 영화를 보며 내 머리로 들어오는 그 인풋의 느낌이 좋았다. 지금 이렇게 그에 대한 아웃풋으로 글을 쓰는 것은, 머리로 생각하고 있던 것을 어떤 영화가 '툭'하고 건드릴 때 그 순간의 희열과 경이를 공유하고 싶어서이다.
<아메리칸 뷰티>에 대한 리뷰를 쓴 건 이번이 처음이 아니다. 2019년에는 이 영화를 보고나서 느낀 설명할 수 없는 불쾌감을 토로하듯이 블로그에 썼었다. 그리고 두 번째 리뷰는 지금으로부터 약 1년 전 대학 교양수업에 과제로 제출했던 A4 2장이 그것이다. 그 글을 브런치 매거진에 올려보려 한다.
해당 리뷰는 영국의 페미니즘 영화이론가 로라 멀비의 논문 '시각적 쾌락과 내러티브 영화'를 활용하여 리뷰를 쓴 점을 고려하며 읽어주기를 바란다.
가부장제 사회의 무의식은 영화가 ‘보기looking’와 ‘성차’라는 개념을 재현하고 반영하는 과정을 구조화한다. 남근중심의 정신분석학적 관점에서, 여성은 결핍(남근의 부재) – 욕망(남근 소유) – 모성으로 이어지는 거세와의 연관성 속에서만 존재한다. 가부장제 무의식에서 여성은 거세공포의 상징, 모성으로 기능하고 그 외의 쟁점은 배제된다. 즉, 여성은 실재계의 창조자가 아닌 상징계의 의미로만 존재한다. 이러한 무의식에 기반한 관습적 쾌락은 기존 내러티브 영화에서 재현된다. 관습적 쾌락을 파괴하고 재정의하기 위해선 ‘보기’의 방식과 이로 비롯된 쾌락을 구조화해야 한하다. 보면서 얻는 쾌락은 아래 2개의 매커니즘으로 구조화되는데, 두 가지 모두 실재하는 현실보다는 관념적인 이미지 세계를 목표하고 있다는 점에서 한계를 갖는다.
먼저, 시각쾌락증은 보는 주체와 객체가 분리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보는 주체가 능동적으로 타자화된 대상을 바라볼 때 쾌락을 느끼는 점에서 성적본능의 기능을 갖는다. 영화 속에서 여성은 이미지로서 노출되며 남성은 시선으로서 작용하고, 여성의 외모는 심미성을 기준으로 양식화된다. 양식화된 여성은 등장인물과 관객의 ‘시선’을 위한 에로틱한 대상으로 기능하며 쾌락요소로 소비된다. 클로즈업을 통한 여성 신체 단절적 묘사는 캐릭터의 실재성을 떨어뜨리고 평면적으로 재구성한다. 극 중 여성은 남성에게 행동을 유발하는 트리거로서만 존재할 뿐, 실제로 행동하는 주체성을 갖지 못한다.
나르시스적 시각쾌락증은 보는 주체가 보여지는 대상을 동일시하는 데에서 출발한다. 자아 이미지보다 거울 이미지를 우상화하는 현상은 실재적 자아가 투상된 관념적 거울 세계 속 자아(영화에서는 남성배우)를 선망한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적이다.. 나르시시적 시각쾌락증은 시각쾌락증과 같이 주체와 객체가 존재하나, 영화 속 이미지와 자아 이미지를 동일시하는데서 오는 쾌락이라는 점에서 다르다. 두 이미지 사이의 거리감은 자기 보호로서 기능한다. 영화 속 능동적인 남성 배우는 영화 형식으로 인해 관객으로 하여금 마치 영화를 ‘경험’하듯 체험하며, 캐릭터가 여성인물과 달리 입체적으로 구성된다.
이러한 2가지 쾌락이 갖는 문제점은 다음과 같다. 먼저, 여성인물의 에로티시즘은 남성(배우와 관객 모두)에게 종속된다. 거세공포의 위협성을 없애기 위해 여성을 응징 또는 구원함으로써 관음주의와 결합하여 영화 속 여성은 수동적이며 피학적으로 존재한다. 또한, 여성을 오히려 숭배하는 대상으로 변화시켜 안도감을 느끼게 한다. 여성 상징을 숭배하는데 있어 쇼와 영화의 차이점은, 여성인물(대상)과 관객(주체) 사이에 다른 남성 인물이 있다는 것이다. 카메라는 의도적으로 관객이 극과 현실을 동일시하도록 착각을 불러일으킨다.
전통적 관습을 유지하는 것은 영화가 관음주의적 쾌락에만 의존하게 되는 것이다. 이를 막기 위해 카메라가 자유로운 실체성을 가지고 관객의 시선이 거리감을 갖도록 해야 한다. 형식적 쾌락을 추구하지만 내용적으로는 위협적일 수 있는 ‘보기’의 쾌락을 위해서, 남성이 아닌 여성의 이미지가 활용된다는 점도 문제이다. 사회의 고정관념을 반영한 이데올로기는 기술과 편집을 통해 형식적 아름다움의 탈을 쓰고 재현된다. 대표적으로 할리우드 스타일 영화는 관객이 느끼는 쾌락을 능숙하게 조종하며 고정관념을 고착화하기도 하는데, 사회의 고정관념과 관습에 대항하는 대안 영화가 존재한다는 점에서 이러한 관습을 전방위적으로 전환할 수 있는 가능성을 찾을 수 있다.
‘아메리칸 뷰티(American Beauty, 1999)’의 첫 장면은 캠코더 녹화 장면이다. 스크린에 여자 인물 ‘제인’만 노출되고 남자는 목소리만 등장하여 그와 대화를 나눈다. 캠코더라는 소재는 영화를 관통하여 끈질기게 등장하여 ‘제인’을 따라다니며 심지어 그의 방 안까지 관음한다. 카메라의 시점은 관음하는 캠코더의 녹화 화면을 주로 이루고, 관객은 ‘제인’을 촬영/관음하는 남성 ‘리키’와 동일시된다. 스크린에 ‘리키’가 등장하지 않은 채 ‘제인’이라는 타자를 보게 되는 관객은, 남성과의 거리감을 느끼지 못하고 자연스럽게 동일시된다.
로라 멀비에 따르면, 관객의 나르시스적 시각적쾌락은 카메라와 영화형식, 극장환경에 의해 좌우되기도 한다. 첫 장면에서 카메라가 남성 ‘리키’를 노출하는 대신 촬영 대상의 ‘제인’만 노출한 점에서 더욱 그러하다. 그러나 ‘아메리칸 뷰티’의 관객은 이러한 형식뿐만 아니라 남성인물의 비극적인 상황 자체에도 감정이입함으로써 그 동일시가 더욱 극대화된다. 극을 이끄는 주인공 ‘레스터’는 40대 남성으로, “아내와 딸은 자신을 패배자처럼 여긴다”고 생각하는 무기력한 인물이다. ‘리키’ 또한 아버지에게 부정당하고 사회적으로 소외 당하는 패배자적 인물로 그려진다. 이는 주요 남성인물과 관객과의 상황적 거리감을 좁히는 스토리적인 장치로 작용한다. 이는 ‘레스터’가 영화 초반부 “내 이름은 레스터 번햄이다.”로 시작하는 내레이션을 통해 더욱 강화된다. 이를 통해 관객은 점차 남성 인물에 자신을 투영하기가 한결 쉬워진다.
‘레스터’가 딸의 친구인 ‘앤젤라’를 만나는 장면에서 카메라는 춤을 추는 그녀를 비추고 이어지는 쇼트에서 그녀를 넋 놓고 바라보는 레스터를 보여준다. 이처럼 바라보는 대상과 주체를 연속적으로 보여주는 쇼트 구성은 관객으로 하여금 객체를 바라보는 주체적 시점에 동일시하게 한다. 이후 ‘앤젤라’를 둘러싼 주변 인물이 사라지고, 음악은 느려지며 그녀는 레스터를 위한 쇼걸이 된다. 이 장면은 관객이 영화 속 ‘레스터’를 바라보는 것이 아닌, ‘레스터’가 되어 직접 경험하는 것을 의도한 장면이다. 이후, 스토리 속 상상의 세계에서 ‘앤젤라’는 ‘레스터’의 상상 속에서 빨간 장미 꽃잎으로 가득 찬 환상적 공간에 나체로 누워있다. 이는 ‘레스터’의 욕망을 그대로 구현한 것으로, 자극적인 빨간색과 어린 소녀의 몸, 금발과 나체를 총동원하여 양식화된 아름다움을 재현한 장면이다. 이러한 장면 속에서 ‘앤젤라’는 딸의 친구도, 모델을 꿈으로 가지고 있는 학생도 아닌 그저 이미지로서 존재한다.
‘이미지’로서 존재하는 앤젤라가 “남자들의 축축한 시선을 좋아한다”고 말하는 장면은 관객으로 하여금 앤젤라의 상황에 이입하기 보다, 편안하게 ‘레스터’의 관점에서 볼 수 있게 하는 윤리적인 장치로서 작용한다. 한 가지 궁금한 점은, 이 영화를 바라보는 여성 관객은 영화의 해석적 텍스트 속에서 어떻게 구성되는 것인지이다. 미성년자에 대한 성적 대상화, 불법 촬영 및 스토킹이 영화 내에서 힐난당하기는 커녕 자연스럽게 합리화되기 때문이다. ‘제인’과 ‘앤젤라’는 모두 상대 남성이 자신을 관음하고 대상화하는 것을 즐기고 이를 통해 행복감을 느끼는 것으로 묘사된다. 이는 극 중에서 타인에게 비춰지는 이미지를 우상화하고, 보여지는 이미지가 실제의 나보다 더욱 완벽하고 이상적이라고 여긴다는 점에서 나르시스적 시각적쾌락과 일부분 맞닿는 지점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