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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연깨 Jan 24. 2023

좋아하는 것을 좋아할 용기

Kehlani , <Love Language>


 나는 드라마나 영화에서 나오는 특별하고 대단한 첫사랑의 기억이 없다. 사람들이 내게 던지는 웬만한 질문에 대해서는 크게 대답을 망설이지 않는 편인데, 항상 이 주제에 대해서는 망설여진다. 얼마 전 인터넷에서 김태리와 남주혁 주연의 드라마 <스물다섯 스물하나>의 고백 장면을 보았다. 김태리 배우가 울상을 지으며 '나 너 좋아해. 근데 너한테 열등감도 느껴. 넌 이게 뭐같아?' 라고 마음을 정말 토하듯이 뱉어내는 장면을 보고 생각이 많아졌다. 나도 저렇게 나의 밑바닥을 다 드러내면서까지도 누군가에게 호소해본 적이 있었나. 첫 연애를 떠올리면서 '그게 첫사랑이었겠구나' 싶다가도, 크게 후회나 아련함까지는 없는 걸 보면 아직 첫사랑이 오지 않았을 수도 있겠구나 싶다. 어쩌면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용기가 20대 초반에는 없었던 것 같다. 그래도 파도같은 사랑은 없었어도, 반추하고 싶은 물결과 같은 사랑의 기억들을 꺼내보는 것은 이제는 다 나은 상처의 흉터를 만질 때와 같은 항상 묘한 씁쓸함과 즐거움을 준다. 



 2022년은 나에겐 엇갈림이 가득했던 해이다. 만나는 사람마다 결국은 마음이 향하는 곳이 서로 달랐다. 초여름의 펍에서 마주친 그는 내가 첫눈에 반했던 사람이다. 그 해의 여름은 그로 인해 물들었고 또 얼룩졌다. 깊이도 모르는 바다에 다이빙하는 사람처럼, 무턱대고, 정말 자존심도 없이 빠져들었다. 그와의 시간은 마치 도박과도 같아서, 열 번 레버를 당겼을 때 한 번이라도 금화가 나오면 다시 또 나는 레버를 당길 준비를 하고 있는 사람이었다. 쉽게 빠진 사랑이었지만 빠져나오는 것은 마치 미로와도 같았다. 이 점에서 사실 그때의 나는 꽤나 용기있던(?) 사람같다. 당시 나는 불교심리학을 공부하며 명상 수업도 듣고 매우 건강한 마음 상태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사람이라는 변수가 이 모든 평화를 모두 깨트렸다. 그 때의 나의 상황에서 Paramore의 <Pool> 이라는 노래를 오랜만에 들었는데, 이 노래를 그렇게 자주 들었건만 이렇게 와닿았던 적은 그 때가 처음이었다. 


https://youtube.com/watch?v=3m8ElO9Y50Y&feature=shares 


Paramore <After Laughter> 앨범


As if the first blood didn't thrill enough


I went further out to see what else was left of us


Never found the deep end of our little ocean


Drain the fantasy of you


Headfirst into shallow pools



 이미 식어버린 그의 마음을 돌릴 수 없다는 것을 알면서도, 나는 혼자 지옥과 연옥을 방황하며 지냈다. 겉으로는 회사도 멀쩡히 다니고, 친구들과 웃기도 하고, 주말에 전시회도 보러다녔지만 나의 마음과 머리는 온통 어지러웠다. 거리를 걸으면 그와의 짧았지만 강렬한 추억을 떠올리게 하는 것 천지였다. 카톡방을 혼자 나갔다가, 차단했다가 다시 풀었다가, 프로필 사진을 눌러봤다가, 핸드폰을 침대에 던지는 것의 반복이었다. 집에 혼자 있으면 그 감정이 더욱 강렬하게 나를 집어삼켜서 애써 운동을 나가고 카페에 갔다. 인내가 필요한 시기였다. 



 그런데 정말 신기하게도 '나를 위한 선택'을 하나씩 해 나갈수록, 그의 존재가 점점 작아져갔다. 절대 하루 아침에 존재가 사라지진 않는다. 하지만 이 글을 읽는 누군가가 비슷한 지옥을 겪고 있다면, 말해주고 싶다.

 사랑은 그 자체로도 정말 소중하고 매혹적이지만, 그것이 나라는 사람을 인위적으로 바꾸게 하고 나 자신을 의심하게 만든다면 잠깐 스탑 사인을 세워야 한다고. 그것이 결국 그 사람을 끊어내는 것을 포함해야 한다면, 그래도 좋다. 그렇게 나를 위한 선택을 해나가는 것 자체가 매일 조금씩 1mm라도 그 사람의 존재가 작아지고 있는 과정이라고 꼭 말해주고 싶다. 그리고 그 남은 공간에는 잠시 잊고 있었던 나의 존재가 채워지게 된다. 좋아하는 책을 읽고, 음악을 들으며 빈 퍼즐조각을 다시 채워나갔다. 친구가 좋아하는 말 중에 이런 말이 있다. "내가 변해서 내가 된다." 엇갈린 사랑은 이 말을 절실하게 느끼게 해주는 좋은 기회이다. 






 오늘 서울로 다시 올라오는 차에서 켈라니 노래를 주구장창 들었다. 곧 있을 그의 내한공연에 대한 일종의 리추얼이랄까. 이번 공연을 기대하며 플레이리스트를 훑다가, love language라는 노래를 처음 들었는데 정말 지나가는 모든 사람 붙잡고 제발 한 번만 들어보라고 하고 싶을 정도로 좋다. 언어 장벽이 있는 연인이 서로를 이해하기 위해 겪는 상황을 표현한 노래인데, 정말 귀엽고 또 누구나 새로운 사람을 대할 때 이런 마음을 가지고 대하지 않나 싶다. 좋아하는 사람을 좋아할 때 필요한 용기와 인내를 담고 있는 노래이다. 이 노래를 들으며 현재와 미래의 인연에 대해 공상해보는 것이 나의 요즘 취미랄까.



Kehlani <While We Wait> 앨범


Said I wanna be fluent in your love language


Learnin' your love language


I know I don't speak your language


But I wanna know more, baby


And still, it's all foreign to me, I don't speak what you speak


I'll commit to learnin' if you, if you


You're a sweet fantasy, singin' your ABCs


Please be patient with me, with you





사랑이 힘들고 아파도, 그만큼 우리의 감정을 깊게 건드리는 일이 있다는 것이 소중하게 느껴질 때가 많다. 오늘 극장에서 <영웅>을 보면서, 안중근도 내면에 무한한 사랑이 있었던 사람임을 새삼 느꼈다. 미움과 분노보다, 사랑을 선택할 때 우리는 더욱 용감해지고 현명해진다. 설날에 강릉에서 할머니와 할아버지를 뵙고 오면서 소원을 하나 빌었다.




좋아하는 것을 선택할 용기와 인내를 주세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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