첫 직장을 떠나기로 결심한 날, 나는 모니터 속 사직서 파일을 한동안 바라보고 있었다.
가슴 깊은 곳에서부터 심장이 세차게 뛰었다. 익숙함을 버리고 새로운 길로 들어선다는 두려움과 더 많이 벌고 더 빨리 앞으로 나아가고 싶다는 열망이
뒤섞였다.
잠 못 이루던 밤들을 보내고서야 나는 사직서 제출 버튼을 눌렀다. 손끝이 살짝 떨렸지만, 내 결정에 후회는 없다고 스스로를 다독였다.
이직 첫날 아침, 외국계 보험사 사무실의 문을 열고 들어섰다. 낯선 회사 로고와 영어가 오가는 복도 풍경에 마치 신입사원이 되었던 그때처럼 긴장감이 몰려왔다.
몇 년간 몸담았던 대기업을 떠나 다시 새로운 환경에 뛰어드니, 모든 것이 새롭게 느껴졌다.
작은 회의실에서 진행된 신입 교육 시간,
나는 노트를 꼭 쥔 채 강사의 한마디 한마디를 놓치지 않으려 애썼다.
마치 첫 사회생활로 돌아간 듯 어깨에 힘이 들어갔다.
B2B 영업에서 B2C 영업으로의 전환은 생각했던 것 이상으로 낯설었다.
이전 직장에서는 기업 고객들을 대상으로 계약을 성사시키곤 했다. 정해진 상대와 체계적인 절차 속에서 움직이는 일이 대부분이었다.
그러나 새 일자리에서 내가 마주한 것은 길거리의
불특정 다수, 평범한 일상을 살아가는 개인 고객들이었다. 직접 전화를 걸어 약속을 잡고,
때로는 카페 한구석에서 처음 보는 사람에게
보험 상품을 설명해야 했다.
처음엔 머리가 하얘지고
말문이 쉽게 떨어지지 않았다.
내가 과연 이 사람들을 설득할 수 있을까
스스로에게 끊임없이 되물었다.
하지만 고객의 문제를 해결해 주는 근본 구조는 B2B나 B2C나 다르지 않다는 것을 깨닫기까지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상대방의 이야기를 끝까지 듣고 그에게 진짜 필요한 것이 무엇인지 고민하는 일 – 결국 영업의 본질은 같았다. 그 사실을 되새기자 쓸데없는 두려움이 조금씩
옅어졌다.
몇 달이 지나자 개인 고객들과 소통하는 법에도 점차 익숙해져 갔다. 첫 계약을 따내던 날의 떨림은
아직도 생생했다.
손끝이 차갑게 식을 정도로 긴장했지만,
눈앞의 고객이 진심으로 고마워하며 내 손을 꼭 잡았을 때 마음 한구석이 벅차올랐다.
사람 대 사람으로 마주 앉아 누군가의 미래를 함께
준비해 준다는 것이 이토록 보람찬 일이라는 걸
새삼 느꼈다. 좋은 성과는 금세 회사에서도 알아줬다. 회의 시간마다 이름이 언급되었고, 동료들은 내게 노하우를 묻기 시작했다.
그렇게 나는 새로운 환경에 서서히 뿌리를 내려갔다.
그 무렵, 사적인 삶 한편에서는 작은 균열이
생겨나고 있었다.
연애는 겉보기엔 여전히 순탄한 듯 보였다.
새로운 도전을 시작한
나를 그녀는 애써 응원해 주었다.
내가 야근으로 약속을 취소해도, 피곤에 지쳐 말수가 줄어들어도 그녀는 이해한다며 웃어 보였다.
주말이면 손을 잡고 극장 데이트를 하고, 맛집을 찾아다니는 일상도 한동안 그대로였다.
그러나 보이지 않는 틈은 조금씩 벌어지고 있었다.
나는 새로운 목표를 향해 하루하루 전력 질주하고
있었지만, 그녀는 그런 내 모습에서 이전과 달라진
무언가를 느꼈을지도 모른다.
내가 눈치채지 못한 사이, 우리 사이에는 조용한 거리감이 쌓이고 있었다.
결국 사소한 말다툼이 반복되다 큰 침묵이 찾아온
밤이 있었다. 그날 우리는 저녁 식사 자리에서 사소한 일정 문제로 언쟁을 벌였다.
말은 점점 날카로워졌고,
결국 서로 아무 말도 하지 못한 채 남은 음식을 앞에
두고 가만히 앉아 있기만 했다.
텅 빈 적막 속에서 우리는 비로소 알았다.
서로가 지쳐 있다는 것을, 그리고 같은 길을 바라보고 있지 않다는 것을.
일 중심으로 돌아가는 내 생활 패턴에 그녀는 조금씩 지쳐 갔고, 그런 내 열정을 끝까지 이해해주지 못하는 그녀에게 나 역시 서운함이 쌓였던 것이다.
마주 잡은 손엔 온기가 식어가고 있었다.
이윽고 그녀가 떨리는 목소리로 말문을 열었다.
더 이상 서로에게 상처를 주기 전에, 잠시 멈춰 서자고.
애써 괜찮은 척했던 우리의 마지막 대화는
그렇게 끝맺음이 되었다.
우리는 사랑했던 만큼이나 담담하게
이별을 받아들였다.
집으로 돌아오는 길, 화려한 서울의 밤거리 풍경이
그날따라 유난히 쓸쓸해 보였다.
한때 내 삶을 환하게 비춰주던 불빛 하나가 툭 하고
꺼져버린 듯한 기분이 들었다.
가슴 한켠이 뻥 뚫린 채로, 나는 한동안 목적지도 없이 거리를 걸었다.
밀려드는 감정들이 뒤엉켜 나를 흔들었다.
후회와 미련, 안도와 홀가분함이 기이하게 공존했다.
무엇을 잃었는지 실감이 날수록 마음 한구석이 시렸지만, 동시에 이렇게라도 내 균형을 되찾아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참 복잡한 밤이었다.
이별 후 며칠 동안은 모든 것이 무기력하게 느껴졌다. 회사에 나가서는 일에 집중하려 애썼지만,
문득문득 멍해져 모니터만 바라볼 때가 잦았다.
집에 돌아오면 텅 빈 방 안에서 휴대폰만 들여다본 채 한참을 보내곤 했다.
그러나 슬픔에만 잠겨 있을 순 없었다.
나는 천천히 마음을 추스르고 다시 앞을 보기
시작했다. 오래전 혼자 서울에 올라와 처음 밤을 보냈던 때를 떠올리며, 스스로에게 다짐했다.
하나를 잃으면 하나를 얻는 법이라고들 하지 않는가. 그렇다면 지금 잃어버린 사랑의 빈자리를
다른 무언가로 채워볼 때라고.
나는 애써 마음을 다잡고 그 에너지를 오롯이 일로
돌리기 시작했다.
그러자 거짓말처럼 업무 성과가 눈에 띄게 올라갔다. 몇 달 만에 판매 실적이 최고치를 경신했고,
지점 실적 표에는 내 이름이 연일 최상단에 올랐다.
1년 만에 얻은 팀 리더 자격 덕분에 이젠 후배 영업사원들을 이끌 위치에 있었는데,
나는 그 역할에도 온 힘을 쏟아부었다.
어느새 팀원들은 내 뒤를 따르며 함께 목표를 향해
달리고 있었다.
분기 회의에서 상사는 내 성과를 치하하며,
회의실에는 박수 소리가 울려 퍼졌다. 쑥스럽지만 환희에 찬 미소가 얼굴에 번졌다.
손이 아플 정도로 많은 악수를 나누는 동안,
내 존재가 반짝이는 중심에 선 듯한 벅찬 감정을
느꼈다. 문득 그녀 생각이 스쳤지만,
이내 마음을 다잡고 환한 웃음으로 그 순간을
만끽했다.
수입도 전에 없이 크게 늘었다.
통장에 차곡차곡 쌓이는 액수를 볼 때마다 실감이
나지 않아 몇 번이고 눈을 비볐다.
매일 숫자에 쫓겨 살던 내가 이제는 숫자로 위안을
얻고 있었다.
’조금 더 벌고 더 빨리 원하는 삶에 다가가고 싶다’ 던 그 조급한 바람이 옳았음을 증명이라도 하듯,
현실은 내게 풍족한 보답을 안겨주었다.
얼마 후 나는 오랫동안 살던 비좁은 원룸을 떠나
조금 더 넓고 햇빛 잘 드는 오피스텔로 이사했다.
낡은 책상과 침대만 덩그러니 있던 공간은 세련된
소파와 작은 식탁, 그리고 책들로 새롭게 채워졌다.
금요일 밤, 혼자 와인을 따며 창밖의 반짝이는 도시 야경을 바라볼 때면 묘한 충만감에 입가에 미소가 떠올랐다. 꿈꾸던 서울 생활의 한 조각을 비로소 손에 넣은 듯한 기분이었다.
그럼에도, 번쩍이는 성취의 불빛 뒤편에서 가끔씩
빈자리의 그림자를 느꼈다.
원하는 것들을 거의 다 이루어가고 있는데도,
잃어버린 것의 자리만은 쉽게 메워지지 않는 듯했다. 성취감에 취해 바쁘게 달린 날의 끝,
고요해진 밤공기를 마주하면 문득 마음 한구석이
싸늘해졌다.
성공의 달콤함 뒤에 찾아오는 적막 속에서,
나는 가만히 자신에게 되묻곤 했다.
이것만으로 정말 괜찮은 걸까? 꿈을 향해 가는 길에
치른 이 대가는 언제쯤 나를 웃게 해 줄까 하고.
하지만 대답을 알 수 없는 질문들은 조용히
밤공중으로 흩어질 뿐이었다.
나는 다시 내일의 할 일 목록으로 생각을 돌리며
애써 눈을 감았다.
그때는 몰랐다. 그다음 계절이 그렇게 큰 물결을 몰고 올 줄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