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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구름물고기 Aug 25. 2024

너의 이름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습니다.

은비녀

상도동

쌈짓돈

보따리

한복

참외

소풍

한글

이름

치매

쪽진 머리

엄마의 엄마

쌍꺼풀 없는 눈

동백기름 반들반들  

얼음 동동 미숫가루

광해, 왕이 된 남자(2012년 작, 사진출처;네이버)

영화인문학 시간에 ‘광해, 왕이 된 남자‘를 보았다.

광해군 대신 왕노릇을 하던 광대 하선이 기미 나인사월이에게 ‘너의 이름은 무엇이냐?‘고 묻는 장면을 보다 강사님이 질문했다.

지금 기억나는, 떠오르는 이름이 무엇이냐고...

그 순간 한참을 잊고 지냈던 당신이...


이름을 쓰는 법을 가르쳐달라시던 당신이 떠올랐다.

가난과 전쟁으로 한글을 깨치지 못했던 사람

혼자 딸 셋과 아들 하나를 잘 키운 사람

남편처럼 의지했던 아들을 먼저 떠나보낸 사람

아들의 아내의 구박을 피해 보따리 하나 들고 세 딸의 집을 몇 달씩 오가던 사람


더운 여름날, 땀 흘리며 집으로 뛰어가면 차디찬 물방울이 악착같이 매달린 커다란 미숫가루 대접을 내게 건네며 웃던 사람

노란 참외를 좋아하던 사람

노래 부르기를 좋아하던 사람

어린 내가 미술대회에 나갈 때 옥빛 한복에 은비녀를 곱게 꽂고 엄마 대신 온 사람


또릿또릿하고 정정하게 여든다섯을 넘긴 당신이 딸을 먹인다고 찬장 깊숙이 숨겨놓은 참외는 쿰쿰하게 썩어가고

어느 날, 계단을 내려가다 당신의 다리는 부러졌다.

당신은 바스락바스락 소리가 나는 기저귀를 차고 몇 달을 누워 지냈다.


엄마와 내가 남은 작은 방에서 당신은 ‘저 년이 밥을 안 줘’하고 속삭이듯 이른다. 나는 외할머니 며느리가 왜 그랬을까 생각했다.

많이 먹으면 많이 싼다는 게 이유였고

외할머니가 살아온 무게로 닳아진 엉덩이엔 구멍이 나기 시작했다.


어린 나를 돌봐주던 당신은 나보다 더 작아졌다.

약을 파는 서커스단 공연을 보던 어린아이의 눈빛을 하고서 나를 바라본다.

딸에게서 받은 꼬깃한 쌈짓돈을 속고쟁이 주머니에서 꺼내어 내 손에 쥐어주던 살뜰한 당신

잠시 정신이 맑아진 어느 날,

숟가락을 쥐고 흥겹게 노래 몇 자락을 부르던 사람



연분홍 치마가 봄바람에 휘날리더라
오늘도 옷고름 씹어가며 산제비 넘나들던 성황당 길에 꽃이 피면 같이 웃고 꽃이 지면 같이 울던 알뜰한 그 맹세에 봄날은 간다
새파란 풀잎이 물에 떠서 흘러 가더라
오늘도 꽃편지 내던지며 청노새 짤랑대는 역마차 길에 별이 뜨면 서로 웃고 별이 지면 서로 울던
실없는 그 기약에 봄날은 간다
열아홉 시절은 황혼 속에 슬퍼지더라
오늘도 앙가슴 두드리며 뜬 구름 흘러가는 신작로 길에 새가 날면 따라 웃고 새가 울면 따라 울던 얄궂은 그 노래에 봄날은 간다
<봄날은 간다 -장사익>

https://youtu.be/uTFsVXsgvf8?si=f1VPQn7Qa6IBPb12​​


오래 잊고 지냈던

나의 엄마를 낳고 길러준 사람

딸의 딸인 나를 살갑게 챙겨준 사람

박금분 나의 외할머니, 사랑하고 또 감사합니다.

당신의 이름 석자를 꺼내어 호호 불며 반짝반짝 광을 내봅니다.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을 먹었습니다.


그리운 외할머니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박준

이상한 뜻이 없는 나의 생계는 간결할 수 있다 오늘 저녁부터 바람이 차가워진다거나 내일은 비가 올 거라 말해주는 사람들을 새로 사귀어야 했다

얼굴 한번 본 적 없는 이의 자서전을 쓰는 일은 그리 어렵지 않았지만 익숙한 문장들이 손목을 잡고 내 일기로 데려가는 것은 어쩌지 못했다

'찬비는 자란 물이끼를 더 자라게 하고 얻어 입은 외투의 색을 흰 속옷에 묻히기도 했다'라고 그 사람의 자서전에 쓰고 나서 '아픈 내가 당신의 이름을 지어다가 며칠은 먹었다'는 문장을 내 일기장에 이어 적었다

우리는 그러지 못했지만 모든 글의 만남은 언제나 아름다워야 한다는 마음이었다.


언젠가 우리 다시 만나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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