궁모란도
풍요로움과 고귀함의 상징, 모란
모란은 꽃이 크고 색이 화려해서 동양에서는 고대부터 '꽃 중의 왕[花王]', ‘부귀화’ 등으로 불렸습니다. 원산지는 중국 쓰촨 성[四川省]과 윈난성[雲南省] 지방인데, 중국 진한(秦漢) 시대 이전부터 약재로 재배되었고, 당대(唐代)에는 중국을 대표하는 꽃이 되었습니다. 꽃의 크기는 15~ 20cm 정도로 유난히 크며, 5월을 전후하여 꽃이 핍니다.
우리나라에서는 선덕여왕과 모란꽃 이야기가 유명하며, 설총(薛聰, 7세기말~ 8세기 전반 활동)의 「화왕계(花王戒)」가 『삼국사기(三國史記)』에 전합니다. 『조선왕조실록』에는 왕이 모란을 감상하거나 모란꽃 피는 것을 길조로 여기는 내용이 많이 등장합니다. 조선 후기 선비 유박(柳璞, 1730~1787)은 화훼 백과사전인 『화암수록(花菴隨錄)』에서 작약, 철쭉, 석류, 파초와 함께 모란의 특징을 ‘부귀’라고 일컬었습니다. 모란은 이처럼 조선 후기까지도 풍요로움과 고귀함의 상징이었습니다.
조선시대에 그려진 모란도
모란에 대한 기록이 삼국시대부터 있는 것을 보면 모란도 역시 그 시기부터 그려졌겠지만, 아쉽게도 남아 있는 작품은 없습니다. 다만 고려시대 모란무늬 청자매병, 청자주전자 등을 통해 예술품 소재로 사용된 모란 문양을 찾아볼 수 있습니다.
모란을 소재로 한 그림은 화조화와 장식화로 분류되는 모란도 병풍으로 크게 나뉩니다. 조선시대 모란도 병풍은 19세기말에서 20세기 초에 궁중장식화로 그려진 모란도와 민화 모란도가 남아 있습니다.
18세기 초반까지는 화조화에서 모란이 바위와 나무, 새 등과 함께 그려졌는데, 조선 후기에는 꽃의 비중이 커지고 더 두드러지는 경향을 보입니다. 심사정(沈師正, 1707~1769)의 <묵모란도>는 모란꽃의 특징을 크게 강조해서 표현했습니다. 19세기에는 모란만 단독으로 그린 모란도가 등장합니다. 신명연(申命衍, 1809~1886)의 장식적인 채색 <모란도>와 채색 없이 먹으로만 그린 허련(許鍊, 1809~1893)의 <묵모란도>가 대표적입니다.
의례용으로 제작된 모란도 병풍은 각 폭에 모란 또는 모란과 괴석이 반복해서 그려진 형태입니다. 이 가운데 왕실에서 사용한 것을 ‘궁모란병’이라고 부릅니다. 그런데 이 <모란도 10폭 병풍>은 일반 궁모란병과는 다른 형태입니다. 먼저 모란도 병풍의 쓰임새를 알아보고 이어서 이 병풍을 살펴보겠습니다.
모란도 병풍은 언제, 어디서 사용되었을까?
모란도 병풍은 종묘의례(宗廟儀禮), 가례(嘉禮), 상례(喪禮) 등 주요 의례와 어진(御眞) 봉안처 등 다양한 왕실 행사 장소에서 사용되었습니다. 모란도 병풍과 관련된 조선 왕실의 기록은 1627년 소현세자(昭顯世子, 1612~1645)의 『가례도감의궤(嘉禮都監儀軌)』가 대표적이며 이외에도 많은 기록이 있습니다.
모란도 병풍이 사용된 왕실 행사를 보면 제례·혼례·장례 등 그 성격이 매우 다양하지만, 특히 죽음과 관련된 의례에 많이 사용되었습니다. 아름답고 화려한 꽃 그림이 상례에 많이 사용되고 종묘(宗廟) 제단의 벽을 장식한 것을 보면, ‘부귀’와 ‘풍요’를 상징하는 모란을 통해 왕실의 안녕과 번영, 영속을 기원했음을 알 수 있습니다. 혼례에도, 장례에도 다양하게 모란을 사용한 것입니다.
모란도 병풍은 왕실뿐 아니라 민간 혼례에도 사용되었는데, 조선 후기에 제작된 <평생도> 중 ‘회혼례도’ 장면에 모란도 병풍이 펼쳐진 모습이 등장합니다. 또한 다른 길상의 소재들과 어우러져 민화 모란도로도 그려지면서 모란은 오랫동안 여러 계층에서 널리 사랑받았습니다.
<글, 그림 ; 국립중앙박물관>
모란은 선덕여왕의 일화에 등장하는 식물이기도 하다. 공주 시절(당시 당태종 시기) 때 당나라에서 온 모란 그림에 나비가 없는 것을 보고 향기가 없지 않겠느냐고 추측했으며, 동봉된 모란 씨를 심었더니 실제로 향기 없는 꽃이었다는 일화가 삼국유사에 실려있다. 이 일화의 다른 구전에서는 선덕여왕이 여왕인 시절에 이 꽃씨와 그림을 받았다고 나오며, 당 태종이 남편이 없는 자신을 비꼬려고 보냈다는 것까지 간파했다고 나온다. 하지만 이는 그 시절의 그림을 그리는 화법을 몰라 생긴 해프닝이라고 생각한다.
동양의 그림은 읽는 그림으로 생각해야 한다. 화가도 그 그림에 담긴 문구적 의미의 전달을 염두에 두고 그렸으며 감상자 역시 화가가 전달하고자 하는 바를 문자적으로 이해해야 한다.
모란도의 이해
당시에 중국에서 모란을 그릴 때는 나비와 고양이를 함께 그렸다. 모란은 부귀를 상징하며, 고양이는 모로서 70세를 상징하며, 나비는 질로서 80세를 상징한다. 즉 모란과 나비, 고양이를 함께 그리면 부귀모질이란 뜻이 되어 70~80세가 되도록 장수하면서 부귀를 누린다는 뜻이 되는 것이다. 모란을 그릴 때 고양이를 그릴 수 없으면 나비를 넣을 수 없으므로 둘 다 빼고 모란만 그렸던 것이었다.
모란은 민중의 삶 속에서 다양한 포용성도 가지고 있다. 모란이 화병에 꽂으면 “부귀평안”을 의미하고 모란과 백두조(白頭鳥) 한 쌍을 같이 그리면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부귀를 누린다 ‘는 뜻이다. 모란꽃에 날아오르는 나비는 가정의 화목을 강조하며 남녀 간의 화합을 상징한다.
‘꽃 중의 꽃’으로 불리는 모란(牡丹)은 그 모양이 화려하고 풍염(豊艶)하여 위엄과 품위를 갖추고 부귀영화를 상징하는 꽃이라 부른다. 설총(薛聰)의 「화왕계(花王戒)」에서도 모란은 꽃들의 왕으로 등장하고 있다. 강희안(姜希顔)은 그의 저서 『양화소록(養花小錄)』에서 화목 9등 품론이라 하여 꽃을 9품으로 나누고 그 품성을 논할 때, 모란은 부귀를 취하여 2품에 두었다. 꽃의 자태가 아름다워 화왕(花王), 연화왕(年花王), 화사(花師), 보상화(寶相華), 부귀화(富貴花), 낙양화(洛陽花) 등 이름을 가장 많이 가지고 있는 꽃이기도 하다. 모란을 한자로는 목단(牡丹)이라고 표기하는데, 이는 우리나라에서 ‘목단(牡丹)’이 유음화되어 ‘모란’으로 발음되기 때문이다.
조선 시대 민화의 모란의 의미는 부귀와 명예를 상징한다. 또한 부귀영화를 의미하므로 여러 그루가 함께 어우러져 피어야 더욱 아름답고 그 의미를 바랄 수 있다. 이와 같은 상징성에 따라 신부의 예복인 원삼이나 활옷에는 모란꽃이 수놓아졌고, 선비들의 소박한 소망을 담은 책거리 그림에도 부귀와 공명을 염원하는 모란꽃이 그려졌다.
궁중모란도는 오랜 역사를 통해 극단적으로 정형화되고 양식화되었다. 궁중모란도에 표현된 꽃을 보고 모란의 생태적 특성을 찾는 일은 거의 불가능하다. 실제 모란과 그림으로 표현된 모란과는 큰 차이가 있다.
모란나무는 거의 직선으로 세워서 그렸고 꽃은 일정한 양식이 반복된다. 꽃의 색깔도 빨강, 노랑, 자주색, 흰색을 중심으로 반복된다. 두 가지 색으로만 칠해진 이파리는 앞면, 옆면, 뒷면이 한꺼번에 표현된 형식이 반복되고 이파리의 끝에는 상상의 태점이 박혀있다. 옆으로 퍼지는 꽃나무가 일직선에 가깝게 세워진 것은 세로 그림의 형식 때문일 것이다. 또한 꽃의 모양이 통통하게 표현된 것은 선묘로 입체감을 드러내는 조형적 필요 때문이다. 이파리는 양식화된 하나의 모양을 반복적으로 그려 불필요한 시각적 혼란을 막아 통일감을 주었다. 꽃과 이파리의 반복은 시각적 집중력을 높이고 중독성을 가지게 하는 역할을 한다.
특히 이파리 끝에 붙어있는 태점은 ‘새로운 생명의 탄생’이라는 내용을 함축하고 있다. 궁중모란도는 철저히 ‘생명의 찬양, 생명의 만개’라는 궁중회화의 내용과 미술 자체의 조형적 형식에 맞추어진 그림이다.
모란은 민중의 삶 속에서 다양한 포용성도 가지고 있다. 모란이 화병에 꽂으면 “부귀평안”을 의미하고 모란과 백두조(白頭鳥) 한 쌍을 같이 그리면 “머리가 하얗게 셀 때까지 부귀를 누린다 ‘는 뜻이다. 모란꽃에 날아오르는 나비는 가정의 화목을 강조하며 남녀 간의 화합을 상징한다.
<출처; 대구신문 / 박승온ㆍ사단법인 한국현대민화협회 사무국장>
전문가들의 설명을 길게 옮겨보았다. 나도 잘 모르는 지식을 새롭게 알게 되는 즐거움이 크다.
민화를 그리면 그릴수록 작품이 늘어간다.
그리고 싶은 그림도 다양하다.
민화 선생님께서 주신 본으로 계속 그리다가 처음으로 직접 ‘궁모란도’ 도안을 구입해서 그려보았다.
지금껏 그리던 그림보다 훨씬 큰 사이즈다.
처음 그린 것이 모란도였다.
이번엔 내 의지로 직접 골라서 그리는 작품이라 집에서 혼자 채본을 본떠서 그려보았다. 그리고 원본사이즈로 큰 본을 떠서 8월부터 그리고 채색을 시작했다.
모란이 주먹만 하니 채색을 하고 바림을 하는 일이 만만치 않았다. 채본대로 채색을 하지 않았다. 꽃의 색깔을 선택하고 한 겹 한 겹 색을 입히고, 바림을 하는 과정이 생생하게 기억되는 작품이다.
민화는 도안으로 그리기 때문에 얼마든지 다양한 채색을 통해 다른 느낌의 그림을 그릴 수 있다.
실력을 기르기 위해서는 많은 작품의 모사를 하면서 민화 채색과 바림의 기초를 다져야 한다.
다양한 민화도를 그려야 창작도 가능할 것이다.
내게 민화는 여전히 어렵고, 재미있다.
며칠 전 민화 전시회를 했다. 새로운 경험이었다.
전시회에 관람을 온 사람들에게 민화에 대한 설명을 했다. 선을 어떻게 그리는지, 작업시간에 대한 질문이 있었다.
황묘농접도에서 고양이는 70대 노인, 나비는 80대 노인, 패랭이 꽃말은 ‘청춘’이다.
바위는 불변함을 뜻하고 제비꽃은 등긁개를 닮았다 하여 ‘여의화’라 불리운다.
이 그림은 단원 김홍도의 작품이다. 특별히 그림에 대한 기록은 없으나 환갑 축하용으로 선물하기 위해 그려졌을 거란 추측이 있다.
그림의 의미는 ‘장수와 뜻하는 바를 다 이루라’는 소망이 담겨있다.
민화의 매력은 이런 소망과 사랑이 담긴 데에 있는 것 같다. 선물하고자 하는 이의 소망과 마음을 담은 귀한 선물이다. 수많은 시간을 그리고 또 그려서 완성해야 하기에 마음이 맑아지고 집중력이 커진다.
민화를 그려서 뭐 하냐고 묻는 이가 가끔 있다.
나는 민화가 좋아서 그린다. 그림을 그리고 있는 시간이 즐겁다. 모든 잡념이 사라지고 그것에만 집중하고 거기엔 나와 그림만 존재한다.
그렇게 한 시간, 하루, 한 달,... 시간이 쌓이고 그림은 모습을 드러낸다. 한 번 색을 입히고 기다리고 바림을 하고 물감이 마르기를 기다리고 2차, 3차 바림을 한다. 그 위에 또 역바림을 한다. 마르기를 기다리고, 올라오는 색감을 보고 더 바림을 할지 테두리를 그릴지 다음 작업을 또 진행한다.
다양한 기법을 터득하려면 다양한 경험과 부단한 연습과 노력이 필요한 일이다.
하고 싶은 일이 있다는 건, 취미가 있다는 건 행복한 일이다. 혼자서도 즐길 수 있다면 가장 좋은 취미가 아니겠는가. 나이가 들수록 취미생활이 더 필요하다. 스마트폰이나 컴퓨터를 보는 것보다는 붓과 선지를 보며 그림을 그리는 게 나에게 맞는다. 더 일찍 시작했더라면? 이란 생각이 들 때도 있지만 더 늦지 않게 민화를 만나서 기쁘다.
아직 취미를 찾지 못한 분께 적극 추천하고 싶다.
단, 단시간에 결과물을 얻길 바라는 분이라면 추천하지 않는다. 민화는 공들인 시간만큼 아름다워진다. 시간이 흐른 뒤에도 더 그릴 수 있다는 게 민화의 장점이 아닐까 한다. 완성한 그림이 부족하다고 느껴지거나 고치고 싶을 때나 그리다 만 작품도 다시 그리면 된다.
민화는 같은 물감을 똑같이 타서 그려도 색감이 다르다. 그리는 사람의 붓터치에 따라서 그림이 달라진다. 어떤 그림은 맑고 깨끗하게 올라오는가 하면 어떤 그림은 탁하고 지저분하게 올라오기도 한다.
글씨처럼 그림도 그리는 이의 마음이 표현된다.
민화를 그리는 시간이 내겐 정신수양의 시간이다. 명상의 시간이고 나를 충만하게 하는 시간이다.
화조도
화조도는 글자 그대로 꽃과 새를 그린 그림이다.
새는 하늘과 땅을 연결해 좋은 소식을 전하는 메신저의 의미이다.
꽃은 번영, 풍요, 장수, 명예, 사랑 등을 의미한다.
화조도는 행운과 복이 깃들게 하는 길상의 의미를 갖는다.
추석에 친정엄마께 화조도를 선물하였다. 그림처럼 엄마의 나날이 화사하고 아름다웠으면 좋겠다는 나의 염원을 담았다.
붙임말 >> 추후에 그림을 완성하는대로 완성본을 올리겠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