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Unsocial society

by 김해룡

우리는 집단생활을 하는 사회적 동물들이다.
여러 분야의 사회생활에서 개인의 옳고 그름의 판단에 의해 발생하는 소통, 융화, 불통, 그리고 의견대립 등은 타인과의 관계 속에서 우리가 늘 겪는 일상의 크고 작은 이슈들이다.
이런 거미줄과 같은 관계들, 또 이 관계들을 위한 또 다른 파생적 관계들 사이에서 나 자신의 신념과 윤리잣대는 항상 나 자신을 향해야 하겠지만, 자칫 그 잣대의 활촉 방향을 타인에게로 돌릴 때 우린 잠재적 가해자가 될 수 있다.

'합리적 의심(reasonable doubt)'이라는 문장이 문득 떠오른다.
요즘 들어 자주 고찰하는 용어 중 하나인 이 '합리적 의심'이라는 말은 SNS상에서나 각종 매체에서 자주 접할 수 있는 흔하디 흔한 말 중 하나이지만, 그 합리성을 판단하는 나 자신의 편협한 잣대가 얼마나 위험한지 신중히 고민하며 쓰는 사람은 드물다는 느낌을 받았다.
아니, 신중히 고민하는 사람이라면 형사법 법률용어인 이 말을 절대 함부로 쓸 수 없을 것이다.

'소신'은 '고집'과 다르다. 그리고 '합리'는 '소신'과 '고집' 보다 더 큰 틀인, 집단 내에서의 공통질서적 잣대이다. 또한 큰 집단 내의 공통질서적 잣대는 더 큰 틀인 국가나 민족 간에서도 각 문화 간의 윤리 차이가 발생하게 마련이다. 이걸 '민족성의 상대적 윤리편차'라고 부를 수 있겠다(내 멋대로 지은 명칭이지만 더 좋은 표현이 있으면 수정하겠다.).

이렇게 개개인에서 더 큰 집단으로, 큰 집단에서 보다 더 큰 민족의 규모까지, 밖으로 날을 세운 윤리의 잣대는 타인과 타 집단에게 위협이 될 수가 있다.

성경책 한 권에는 여러 성인들의 복음서가 들어있지만, 크게 구약과 신약으로 나뉜다.
예수의 탄생 전과 후로 나뉘는 이 이야기는 세계에서 제일 많이 팔린 소설책으로 불리우기도 할 만큼 무교인 사람들 사이에서는 그리 심각하게 생각되지 않는 흥미로운 주제정도일지 모르나, 사실 실상은 그렇게 가볍지가 않다.
구약의 유일신을 믿는 유대교, 삼위일체의 신을 믿는 기독교, 예수가 죽은 후 신이 보낸 마지막 예언자 무함마드를 믿는 이슬람교. 이 세 종교는 2000년이 넘는 긴 시간 동안 예루살렘과 팔레스타인 지역을 둘러싼 영토분쟁으로 인해 역사적, 정치적, 사회적 요인이 복잡하게 얽혀있는 킬링필드의 현역 선수들이다. 그러나 이들 사이에도 소수집단이나 개인 간의 갈등들은 한 종교나 국가와는 무관하게 늘상 생겨나는 일상일 것이고, 그것은 자아를 가진 인간들이기에 평생 피할 수 없는 인류의 영원한 숙제일 것이다(오늘 점심, 저녁 메뉴 선정처럼).


우린 흔히 '나와 타인의 차이, 우리와 그들의 차이를 인정하고 받아들여야 한다'라고 말하곤 한다. 하지만 그 말과 생각 또한 너무도 찰나이고 삶은 길어서, 배다른 형제인 '생각'과 '감정'의 간극 탓에 우리 실생활에 그 상투어구를 적용시키지 못한다.


하지만 우리는 안다.


지구에서 유일하게 후회와 반성을 하는 동물인 인간은 숱한 과오들 속에서 점점 더 좋은 선택을 할 수 있는 정서 지능을 발달시켜 왔고, 그 후회와 반성만이 우리 마음속 판도라 기저에 유일하게 남아있는 희망이라는 것을.
각종 분야들의 뛰어난 '실력'처럼, 척도는 없다.
끊임없는 훈련만이 우리를 보다 나은 사람으로, 사회와 집단의 보다 나은 한 구성원으로 만들어 줄 것이다.

각자의 자리에서 분투하고 있는 모든 '홀든 콜필드' 들을 위하여.

keyword
작가의 이전글사고의 본질적 가치충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