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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해룡 Jul 19. 202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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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희의 혼돈

집에 도착한 성희는 이상함을 느꼈다. 방이나 거실, 서재도 평소처럼 어지럽혀져 있는 건 분명 같지만, 이 집에 이사 온 뒤로 처음 느껴지는 감정이었다. 뭔가 다른. 그건 바로 낯섦이었다.
자신이 아는 사람 중 가장 너드(Nerd)하다 말할 수 있는 사람이 바로 남편이었다. 사피오 섹슈얼인 그녀에게는 항상 무슨 생각을 하는지 알 수 없는 차가운 듯한 침착함을 유지하는 남편이, 그의 의도와는 전혀 상관없이 너무나 매력적으로 보였다(물론 의학연구소에서 근무하는 그의 직업의 영향이 컸지만). 여기저기 자신의 생활반경을 사정없이 어지럽히는 그의 지독한 편집증도 그녀에게는 그로테스크하게 느껴지는 '설계된 혼잡'이었다. 남편은 그 혼잡 속에서 필요한 것을 정확히 찾아내고 사용 후 다시 정확하게 그 자리에 놓아두었다. 처음에는 남편을 도와주고자 어질러진 물건을 제자리에 정리하고 깔끔하게 청소를 해놓았었지만, 자꾸 본인의 물건을 찾다가 포기하고 출근하는 일이 잦아지자 결국 남편은 성희에게 "바쁠 때는 도저히 못 찾겠으니까 제발 내가 놓아둔 대로 놔줘. 정리하지 말고. 부탁이야."라고 말했다. 그의 성격상 정말 오랫동안 고민하다 꺼낸 말이라는 걸 알기에 성희는 미안함에 안쓰러웠고, 그때부터였다. 남편의 그 사랑스러운 폐허에는 두 번 다시 관여하지 말기로 마음먹은 때가.
성희는 남편과 대학교 캠퍼스 커플로 시작해 결혼하여 아이를 낳고 함께 키우는 지금까지, 15년이 넘는 시간을 보필해 온 동반자로서의 자신을 높이 평가했고, 그 평가는 지극히 객관적일 거라 자신했다. 남편의 다정하고 따뜻한 행동들에서 항상 확인했기 때문이었다. 그녀는 자주 하던 일을 잠시 멈추고 '큰 일을 하는 남자는 역시 여자를 잘 만나야 해.'라고 생각하고는 싱긋 웃으며 흐뭇해하곤 했다.
성희의 남편 한혁수 씨는 WCI(World Cryonics Industry)에서 한국 연구팀의 책임자로 근무하고 있다. WCI는 미국, 러시아, 독일, 중국, 일본, 한국, 6개국의 의료기술 협약으로 세워진 회사로, 냉동 장기, 냉동 난자와 정자, 그리고 냉동 인간과 급속해동 기술을 연구한다. 인류의 피할 수 없는 질병인 '죽음'을 치료하자는 궁극의 목표를 지향하며, 이와 관련된 기술이 우수한 여섯 국가가 국제기구의 대규모 후원과 거대 자본가들의 천문학적 금액의 투자 아래 처음으로 손을 맞잡게 되었다.
하지만 여섯 개의 소속된 국가를 포함해 전 세계적인 관심을 받으며 출항한 WCI는, 생명공학의 특징인 '연구 주제들 간의 모호한 범주 경계와 더딘 진행속도'로 인해 대중들이 기대하는 만큼의 눈이 부신 성과를 보여주지 못했고, 성난 민중들은 흥미를 잃고 채널을 돌려버리듯 금세 외면해 버렸다.
원래 한국에서 냉동 장기이식 전문 센터인 '휴먼테크'를 운영해 오던 한혁수 씨는 한 학회에서 만난 미국의 물리학자 제임스 에팅어 교수와 여러 해 교류를 해왔다. 급기야 5년 전, 돌연 제임스 교수가 신임 이사이자 급속 냉, 해동 분과 자문으로 몸 담고 있던 WCI와 휴먼테크의 인사합병을 결정했다. 여러 과학 저널과 매스컴의 비판적인 논란에도 불구하고 혁신적인 실험 성공 사례들이 연거푸 이슈가 되자 갖가지 논란과 우려는 동전을 뒤집듯 열광과 맹신으로 바뀌었고, 이윽고 한혁수 씨는 합병 후 3년 만에 포브스가 선정한 '세계에서 가장 영향력 있는 인물 100인'에서 13위에 선정되며 범국가적인 위상을 떨치는 위치에 까지 올라서게 되었다.
덩달아 성희의 삶 역시 하루아침에 다시 태어난 듯 바뀌었다. 그녀는 이제 공인이 되어 어디를 가던 주목받았고 지금의 하루하루가 너무 만족스러웠다. 내성적인 성격 탓에 기피하던 여러 사교모임에도 참여하게 되었고, 딸의 학부모 모임 또한 주변의 성원으로 인해 동네가 화곡동에서 대치동으로 바뀌었으며, 여러 여성잡지나 뷰티 채널, 심지어 공중파 뉴스에도 출연하여 인터뷰를 하게 되는 지경에 까지 이르렀다. 성희는 지난 힘든 시절들을 떠올리며 지금의 이 희열은 그 시절을 힘겹게 버텨낸 자신에게 따르는 값진 보상이라 여겼고, 자신이 누구보다 누릴 자격이 있다고 생각하며 매일을 즐거움으로 채웠다. 다만 한 가지 불편했던 것은, 그토록 각광받는 남편이 집을 비우는 빈도가 그의 인기만큼이나 더 늘어난 것이었다. 그럴수록 성희는 남편에게 전보다 더 자주 연락을 하게 되었고, 점점 즉각적인 답을 하지 않는 바쁜 남편에게 자주 서운함을 느낀 그녀의 마음은 차츰 집착의 행세를 띄게 되었다.
여자의 마음이란 일련의 물리법칙이 전혀 다르게 작용하는 양자의 영역과 같은 초공간 이므로, 성희는 자신의 마음에 애초부터 집착이 존재했던 것 같기도 하고, 처음 느껴보는 듯 낯설기도 했으며, 모든 감정의 파편들은 지금의 이 혼돈을 통해 거시적으로 나타나 잔잔했던 호수에 여러 차원의 파동으로 생채기를 냈다. 성희는 무수한 장면과 상황들을 머릿속으로 연출하고 그려보는 자신의 상상력에 감탄하기까지 했다. 그녀는 본인의 인내심의 한계를 잘 알지 못했지만 그 경계에 가까이 왔음은 분명히 느꼈다.
성희는 어릴 때부터 꿈이라는 거창하고, 때론 거추장스러운 그것을 가져본 적이 없었다. 산타의 존재를 믿었었던 나이에 버릇처럼 말했던 '아빠와의 결혼'의 부도덕성을 깨달을 무렵부터 시작된 의무교육의 생존경쟁은 그녀가 책상에서 고개를 들어 먼 곳을 바라볼 수 조차 없도록 만들었지만, 오히려 그 경쟁 안에서 맛본 승리의 희열과 부모님의 환호는 그녀 마음에 쏙 드는 보상이었다. 그녀에게는 성적을 올리기 위한 그간의 노력들이 전혀 아프거나 힘들지 않았고, 그녀만의 즐거움을 얻는 과정의 연속들을 통해 큰 어려움 없이 명문대에 입학하여 곧 지금의 남편을 만났다. 자신의 삶이 방향성을 찾은 기분이 들었다. 바로 성희에게 꿈이 생긴 것이다. 그렇다. 남편은 성희가 처음으로 갈망해 마지않는 꿈이었다. 자신이 원하는 보상을 위해서는 그 과정 속에서 느끼는 고통마저 즐길 수 있었던 그녀는 지금, 삶의 의미를 도둑맞은 느낌이었다.
지금 가장 필요한 건 무엇일까. 저 남편 책상에 쌓여있는 여자들의 증명사진들은 무엇이며, 출생지, 주소지가 적혀있는 리스트들은 또 뭔지 남편에게 찾아가 담판을 짓는 것일까. 침착하게 자초지종 유추를 위한 단서를 슬쩍 남편에게 떠보는 게 먼저일까. 그도 아니면 리스트의 주소지로 무작정 찾아가 보는 것이 맞을까. 내게서 남편의 관심을 앗아간 그 어떤 존재를 확인하는 게 첫 번째다. 성희는 서둘러 남편 책상에서 여자들의 증명사진들과 주소 리스트를 재킷 주머니에 넣었다. 그녀는 잊었던 노스탤지어가 솟구침을 느끼며 자신의 가방 중에서 제일 비싼 백을 챙겨 분주히 집을 나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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