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반려사물 이야기 - 1
일본에서 석사 과정을 마쳤다는 가이드는 정말 말이 많았다. 빽빽한 일정을 채우기 위해 우리를 태운 관광버스가 바삐 이동할 때면 어김없이 마이크를 잡고 쉴 새 없이 떠들어댔다. 우선 그녀는 우리에게 일본 인사말을 가르쳤다. 사요나라, 스미마셍 등은 물론 그녀가 어떤 안내나 당부를 할 때면 앵무새처럼 일제히 “오케이데쓰”를 합창하게 했다.
혹여 우물거리거나 차창 밖을 주시하는 사람은 여지없이 그녀의 레이더망에 걸려 별도로 독창하는 시간이 주어졌다. ‘바보짓이 따로 없구나. 패키지여행은 역시 체질에 맞지 않아’라는 후회의 탄식을 그나마 삼킬 수 있었던 것은 그녀의 입에서 무작위로 쏟아져 나오는 쏠쏠한 정보 때문이었다.
그녀의 정보는 논문처럼 정렬된 구석이 있으면서도 잡다한 재미가 있었다. 가령 “오케이데쓰”를 합창시키기 전에 ‘OK’에 일본어 ‘데쓰’를 붙여 ‘오케이입니다’라는 합성어를 만든 일본 특유의 기질을 설명해 주는가 하면, 일본의 여러 호칭을 소개할 때도 하느님을 뜻하는 ‘사마’라는 극존칭을 배용준에게 붙인 연유와 일본 사회의 반응을 곁들이는 식이다. 또 그와 연결해 경제력 면에서 최강의 우먼 파워를 자랑하는 30~80대 일본 여성들의 생활상까지 들려줌으로써 귀를 쫑긋하게 만들었다. 그러나 그녀의 설명이 점점 깊이를 더해 일본의 고대사와 근현대사에까지 이르자 “오케이데쓰”를 매번 명랑하게 외치던 관광객도 “피곤하실 텐데 이젠 좀 쉬세요”라며 권유 아닌 권유를 하기에 이르렀는데, 그녀는 눈치가 없는 걸까 혹은 가이드 정신이 뼛속 깊이 배인 걸까, 일본에 관한 네버 엔딩 스토리는 지칠 줄 몰랐다.
“여러분을 위해서라면 저는 괜찮습니다. 그럼 이제부터는 막부 시대로 넘어갈게요. 막부 시대는 무사 시대가 출발한 시기로 일본 근현대사의 시작이라고 할 수 있죠 … 천황과 무사 집단이 대립한 남북조 환란기가 지나고 더 이상 할 일이 없어진 무사들은 무엇을 했을까요?”
그녀가 그 누구도 궁금해하지 않는 수수께끼까지 낼 무렵, 우리를 태운 버스는 벳푸의 유명한 유황 온천지 ‘가마도 지옥’에 도착했다. 일본 사람들은 온천 여행을 왜 ‘지옥 순례’라고 한 걸까? 물론 우리는 의욕 충만한 가이드를 통해 그 이유는 물론이고 무사의 역사까지 꿰찬 터였다.
일본의 온천은 기독교 순례자들의 탄압지였고, 천황과 무사들만 애용하는 곳이었다. 사연을 알고 나면 결코 순례하고 싶은 마음이 들지 않는 가마도 지옥. 그곳에서 내키지도 않는 단체 족욕을 하다 만난 작은 병 하나가 아직도 내 책장 한구석을 장식하고 있다.
여행사 측 패키지 상품으로 1인당 삶은 달걀 2개와 함께 제공된 그 병에는 탄산수가 담겨 있었다. 그런데 특이하게도 병 입구에 작은 구슬이 들어 있어 탄산수를 조금씩 마실 수 있도록 양을 조절해 주었다. 그 병에 매료된 사람은 나와 네 살배기 조카였다. 탄산수를 급히 마시다가 사레에 들릴 것을 염려해 고안한 병이라니, 징글맞을 정도로 세심한 디자인과 기발한 발상에 감동해서 나는 족욕하는 내내 병 속 구슬을 들여다보고 흔들어보았다. 한편 어린 내 조카는 그 구슬을 한 움큼 모을 심산으로 엄마의 완력에도 아랑곳 않고 빈 병을 모아둔 곳에서 한동안 떠날 줄 몰랐다.
이제 와서도 그곳을 순례하고픈 마음은 들지 않지만, 그 지옥에서 건진 탄산수병은 지금도 방 한편에서 내게 알 수 없는 흐뭇함과 어떤 영감 같은 것을 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