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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나대로 May 03. 2024

두문동재와 분주령에서 만난           한계령풀꽃


  강원도 정선군과 태백시를 나누는 두문동재(1268m)에서 분주령을 가는 산길에는 문을 막고 나오지 않는다는 두문불출(杜門不出)의 배경이 되는 경기도 개풍군 광덕면 광덕산 서쪽 골짜기의 두문동과 두문동재의 관련을 알리는 안내판이 있다. 이 내용이 진짜인지 아닌지 확인할 방법은 없다. 고려 말 조선 초의 역사가 이 오지의 산속에서도 기억되고 있다는 것이 놀랍다. 그동안은 그냥 지나쳤지만, 이번 산행에서는 대세를 따르지 못했던 그들의 아픔을 상상했다.


  니가 바꿀 힘이 없으면, 네가 꿇어야 해. 분위기 깨는 소리 하지 말고, 그냥 묻어가. 그리고 지금 이 상황에서 이익이 되는 것이 무엇인지만 살펴봐. 뻔한 계산도 못하는 넌 바보야. 좋은 것이 좋은 거야. 나는 끝까지 반대는 했지만, 제대로 싸우지는 못했다. 손해 보는 나와 함께 하자고 다른 사람을 설득할 자신도 없다. 하지만 내 마음은 쉽게 바뀌지 않는다. 눈에 보이는 이익보다 자기답게 사는 길을 선택하고 싶다. 도저히 타협할 수 없을 때, 선택할 수 있는 길은 무얼까? 불이익을 감수하며 버티다 더 이상 버틸 수 없을 때, 조용히 떠나는 것이다. 산에서 풀처럼 사는 것이다. 폭력에 꿇지 않고 싶은 것이지, 당장 죽고 싶은 것은 아니니까.


  덩치 큰 나무 사이의 틈에 여린 몸으로 크게 자라야 30~50cm로 스쳐지나면, 잘 보이지 않는다. 그리고 6월이 되면, 씨앗과 뿌리만 남기고 땅 위에서 흔적 없이 사라진다. 꼭 필요한 것을 모르니 덜 필요한 것만 챙기느라 시간을 낭비하고, 영원히 살 것처럼 악착을 떠는 인간을 비웃듯이. 4월 말에서 5월은 짧은 삶을 화려하게 살다 미련 없이 사라지는 그들의 삶이 절정인 시기이기에, 대덕산 탐방 예약을 기다린다. 올해는 한 주가 늦어져 더 종종거렸다. 4월 말이 되면, 연두 잎을 어깨에 메고 노란 꽃다발이 아래에서부터 피어오르는 한계령풀꽃을 이곳에서 만날 수 있다. 그들은 꽃과 잎을 함께 땅에서 밀어 올려 핀다. 초록 잎의 모양이 후광을 비추는 것 같고, 꽃봉오리들은 무더기로 핀다. 산꽃을 만나는 매력은 이 순간에 빛난다. 목표로 하는 꽃을 찍으려다 다른 꽃을 훼손하지 않도록, 발끝에도 눈이 달린 것처럼 움직여야 한다.


  현진오 지음, 문순화 사진의 <봄에 피는 우리꽃 386>에 보면, 실처럼 가늘어진 뿌리줄기의 20~50cm 아래에 둥근 덩이뿌리가 있고, 여기에서 수염뿌리가 난다고 한다. 다른 매자나무과 식물들과 뚜렷하게 구분되어, 매자나무과 한계령풀속에는 한계령풀 한 종만 있다고 한다. 덩이뿌리이기에 여러해살이풀이고, 북한에서는 ‘메감자’라 한다고 한다. 사진을 찍어 꽃을 관찰하면, 식물도감에 안내되어 있는 총상꽃차례임을 더 실감할 수 있다. 한 줄기의 긴 꽃대에 지름 1cm의 작은 꽃들이 무더기로 핀다. 꽃잎 6장, 수술 6개, 암술 1개의 작은 꽃 10~20개 정도가 짧은 꽃자루로 어긋나게 달려 있다. 이때 꽃대와 꽃자루 사이에는 꽃을 보호하는 작은 턱잎을 달고 있어, 활짝 피기 전에는 노란 꽃들 사이에 연두색이 조화롭고 풍성해 보인다. 그리고 짧은 꽃자루가 아래는 더 길고 위로 갈수록 짧아, 안정적인 조형미도 돋보인다. 활짝 피기 전의 한계령풀꽃을 만나기 위해는 더 서둘러야 한다.


  두문동재에서 금대봉 갈림길의 싸리재(1.2km)에는 많은 꽃이 핀다. 그래서 가는 시기에 따라 주인공이 바뀐 꽃들을 볼 수 있다. 바뀐다는 것은 사라지고 태어남이 이어진다는 것이다. 한 생명체가 사라져야 다른 생명체가 주인공이 될 수 있다. 사라질 삶이기에, 자기답게 살아야 한다. 만나지 못할 두문동의 고려 유신들도 자기답게 선택한 삶을 풀꽃처럼 살았을 것이라고 상상하며 발걸음을 옮긴다. 금대봉 갈림길에서 분주령으로 접어들면 산길의 풍경은 나무들로 바뀐다. 분주령에서 태백 검룡소로 내려갈까를 고민하다가 노랑무늬붓꽃과 할미꽃을 만났던 추억이 생각나 대덕산에 들렀다. 다시 두문동재로 돌아오는 산길에서는 갈 때 못 봤던 홀아비꽃대도 만났다. 선물 같은 산꽃들을 만나며, 선택할 때는 더 자신답게 선택해야 더 화려한 삶을 누릴 수 있음을 느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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