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가 와서 계획했던 산에서 명성산으로 급히 방향을 돌렸다. 기억해 둔 곳으로 때를 맞춰 찾지 않아도, 꽃을 볼 수 있는 시기가 되어 다행이다. 칼 모양의 잎이 쌍으로 겹쳐 돋은 잎 사이에, 잎보다 키 작은 꽃대마다 한 송이씩 피는 보라색 꽃을 산길에서 발견했다. 꽃받침과 꽃잎이 좌우 대칭으로 두 개의 삼각형 모양으로 어긋나, 6개의 꼭짓점을 향해 각각 붓모양으로 뻗었다. 이 맘 때, 산에서 흔히 보는 ‘각시붓꽃’이다. 마당의 정원에서 보는 붓꽃과 달리 앙증맞은 크기로 여기저기에 피어, 산길이 심심하지 않다. 햇볕을 좋아하기에 눈에도 잘 띈다. 녹색잎 사이에 살짝살짝 보이는 보라색에 끌려 들여다보다, ‘이 꽃의 암술과 수술은 어디에 있지?’라는 의문이 든다. 암, 수술이 꽃받침과 꽃잎보다 튀어나와야 한다는 고정관념을 깨는 꽃이다.
내가 든 의문을 스스로 설명해 주는 꽃은 없다. 나를 위해 그들의 시간을 멈춰, 박제화된 형태를 보이지도 않는다. 그러니 산길 내내 꽃을 보며, 내 의문을 푸는 흥미로운 산길이 된다. 피기 시작하는 꽃 모양도 딱 붓모양이다. 다 핀 꽃잎은 무늬가 있는 잎과 무늬가 없는 잎이 각각 3개씩이다. 무늬가 있는 잎엔 노란 줄이 보인다. 꽃과 다른 색의 가루는 꽃밥이니 수술이다. 무늬가 있는 잎의 중심에, 끝이 두 갈래로 갈라진 기둥이 포개져 있다. 그럼 가운데 3개의 기둥은 암술이다. 그래서 무늬가 있는 잎은 꽃잎이고, 무늬가 없는 잎은 꽃받침이다. 암술대는 아래의 씨방과 연결되어, 씨를 안고 키울 것이다. 그래서 이 꽃은 꽃받침, 꽃잎, 암술대 3개의 삼각형 꼭짓점이 드러나는 꽃이다. 그리고 꽃잎의 무늬는 곤충을 유도하는 활주로이다. 이 활주로에서 곤충은 노란 꽃밥을 잔뜩 묻힌 후 다른 꽃을 찾아가 암술대에 묻힐 것이다. 이미 통통한 씨방을 키우기 위해 , 꽃받침과 꽃잎을 여의고 있는 꽃도 보이고, 한창 삼각형 모양으로 피고 있는 꽃도 보인다.
이제 산의 풀꽃은 녹색 잎이 먼저 나고, 꽃이 피는 시기이다. 일제히 발맞추지 않아도 자연은 흐름이 있다. 이 흐름을 거스를 순 없다. 먼저 피는 꽃은 있어도, 아무리 늦어도 낙엽 떨어질 때 피는 꽃이 없듯이. 잎보다 먼저 피는 꽃은 나무꽃인 진달래꽃으로 마무리될 거다. 산도 연두잎이 올라오고 있다. 노랗고 통통하게 돋아 진한 꿀향을 자랑하던 생강나무꽃도 잎에 양보하여 생기를 잃었다. 매주 다른 산의 부분을 더듬지만, 산꽃을 보며, 산에서 시간이 이렇게 흐르고 있음을 연결하여 느낄 수 있다.
칼모양의 잎이 겹쳐 있어, 꽃 모습이 분명하게 드러나지 않기에 렌즈 위치를 신경 써야 한다. 평면의 꽃이 잘 보이도록 찍으려면, 위에서 아래로 보며 찍는다. 하지만 대상을 내려다보며 찍으면, 생동감은 떨어진다. 그래서 잎 사이 틈새로 꽃이 자리 잡도록 찍으면 녹색 잎도 함께 담겨, 봄느낌이 더 난다. 역시 사진은 대상을 기록하기 위해서도 찍지만, 그 순간의 느낌을 담기 위해서도 찍는다. 내 느낌에 집중하기 위해 사진의 구도에 신경 쓴다. 그 구도는 렌즈의 위치로 결정된다.
포천시 이동면에서 비선폭포, 등룡폭포를 거쳐 억새밭을 지나 능선에 올라서면, 철원군 신철원리로 들어선다. 억새밭에 들어서기까지 길동무가 되었던 각시붓꽃은 더 이상 보이지 않고, 억새밭에는 2026년까지 완공된다는 케이블카 설치를 알리는 푯말과 거대한 기중기가 산정호수 쪽으로 머리를 들고 있다. 애써 철원 쪽의 삼각봉으로 눈을 돌리면, 칼날능선에 핀 진달래꽃이 반긴다. 삼각봉을 지나 명성산 정상으로 가는 산길은 한적하여, 진달래꽃을 길동무 삼기에 충분하다. 오른쪽에는 산 중턱을 깎아 꼬불꼬불 닦아 미로 같은 군훈련장 능선 내내 보이고, 왼쪽에는 산정호수에서 울려 퍼지는 유행가 노랫가락이 듣지 않으려 해도 들린다. 이젠 명성산도 다 왔나 하는 생각에 철원의 산길 안내판을 본다. 같은 저수지이지만 조용한 모습의 용화저수지와 1975년 8월에 일어난 일이지만 아직도 진실을 밝히지 못한 장준하선생의 추락 현장인 약사령의 시작점이 포함된 산길 안내도를 본다. 이곳을 또 온다면 철원방향으로 오리라 마음먹고 되돌아오며, 다시 각시붓꽃에 집중한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