슬픔의 힘 - 작별하지않는다를 읽고
돌아가신 큰 외삼촌의 엄지손톱만 한 증명사진을 꺼내 눈물을 훔치던 엄마를 국민학교 4학년 때 본 적 있다. 노랗고 얇은 습자지 같은 편지봉투의 잘린 귀퉁이로 감싸여 화장대 유리 밑에 끼어있던 그 사진이 어느 순간부터는 사라졌다. 엄마는 자기 슬픔을 지킬 고집도 버리며 남처럼 살아내려 했기에 슬픔을 잃어버렸다. 그때부터 엄마는 자신을 잃은 것이다. 슬픔은 도려내야 할 것이 아니다. 슬픔에는 소중한 내 것이 배어 있다. 붙잡고 싶었던 안타까움도 담겨있다. 그래서 자꾸 꺼내봐야 나를 지킨다.
서로를 지켜주려 했던 경하는 인선 엄마의 슬픔을 보며 자기 슬픔을 겹쳐봤다. 슬픔을 지키는 사람은 다른 슬픔을 보고 들을 수 있다. 슬픔은 땡땡하게 뭉쳐있어 말하기가 고통스럽다. 무엇을 어디부터 풀어야 할지를 찾을 수 없어, 말문을 몇 마디 못 열고 눈물로 그 말문이 막혀 침묵도 길어진다. 끄덕이고 토닥이며 같이 견디는 사람은 자기 슬픔을 지키는 사람이다. 경하의 슬픔은 뿌리가 깊어 슬픔에 갇혔다. 슬픔이 일상화된 집에서 태어나 슬픔을 볼 수 있는 경하는 돌처럼 굳어 자유롭지 못한 인선이를 챙길 수 있다. 그 둘은 슬픔을 챙기는 다큐를 찍으며 슬픔을 마주 보았다.
인선 엄마 정심이는 슬픔의 뿌리를 캐려 했다. 바보처럼 과거에 매여있냐고. 산 사람은 살아야지 죽은 사람의 뒤를 쫓으면 죽은 사람이 살아오냐고. 남들은 쉽게 말한다. 새털같이 많은 날에 다시 만나자던 오빠는 흔적을 찾을 수 없고, 검지의 피를 쏟아서라도 지키고 싶었던 막내를 잃은 슬픔을 건천이 흐르는 중산간의 돌집에 남아 지키고 있었다. 슬픔을 붙잡고 있어야 만질 수 없어도 그들을 만날 수 있다. 끔찍한 고통의 인선이를 눈밭에 굴러서도 아미를 챙기지 못한 나에게는 보이듯이. 기억에 살아 있는 그들을 만날 수 있는 힘은 슬픔을 지킬 때만 가능하다.
손목이 아프면서도 엄마 정심이를 챙기는 인선이와 오락가락하면서도 어린 인선이를 챙겨야 한다고 구석으로 데리고 가는 정심이 모녀의 모습은 아팠지만 사랑스러웠다. 상대의 슬픔을 볼 수 있을 때 사랑이 깃든다. 어릴 적 나는 아파도 방긋방긋 웃고 견디면 엄마가 나를 봐줄 줄 알았다. 그래서 내 아픔을 드러내지 못했고, 어릴 적 내가 본 엄마의 나이가 되어서는 슬픔도 드러내지 못했다. 그래서 나는 엄마가 없고, 내 엄마는 딸이 없다. 그전에 이런 슬픔의 힘을 알았다면 달랐을 텐데. 이젠 나는 너무 멀리 왔고, 엄마는 여전히 한 발도 띄지 않는다. 그래서 우리 모녀는 벌써 이별을 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