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 길 위에 있던 이는 소녀였다. 널찍한 어깨, 짧은 상고머리에 청바지 운동화 차림이 얼핏 소년 같아도 보였다. 하지만 셔츠의 단추 두 개를 풀어 어깨선을 뒤로 넘기고 손을 모아 선 태는 소년이라고 마침표를 찍기엔 다소 갸웃거려지는 구석이 있었다. 그래서 다시 보면 소녀는 소녀였다. 그녀가 선 자리는 해월당 앞. 남교오거리에서 향천대학교 앞까지 이어지는 그 길 위는 향천역과 공용버스터미널, 장날 아랫시장을 제외하고 지역에서 사람과 차로 가장 붐볐다. 그때 거기 선 그녀의 마음이 설렜다. 기다리던 순희를 만나는 것도 좋았지만 그 때문은 아니었다. 그냥 그랬다. 어느 날 방구석에 드러누운 마음이 이유 없이 처져서 눌어붙는 것처럼. 아니다. 어쩌면 운명적인 첫 만남을 기대했는지도 모른다. 순정만화 덕후이니까. 그녀는 거의 빨강머리 앤 실사판이었다. 자기를 보고 한눈에 “너는 정말 눈부신 아이로구나. 남들은 몰라도 나만은 알아볼 수 있어.” 류의 샤랄라한 대사를 날려 줄 이를 상상하는 마음이 있었을 것이다. 어딘가엔 반드시 있을 테니 그 길 위에 없으란 법도 없었다. 가을 어느 토요일 오후였다.
공용버스터미널 뒤 컴컴한 골목에 놓인 평상에 앉아있던 이도 소녀였다. 여느 남자보다도 짧은 머리카락, 흰색 면티에 무릎길이의 감색 반바지를 입었다. 자세히 보지 않으면 그냥 소년이었다. 그래서 덜 무서웠던가 보다. 새엄마의 전화를 받은 후였다. 한바탕 말싸움을 벌인 뒤 아버지가 술에 취한 채 자동차 열쇠를 들고 나갔는데 연락이 안 된다고 했다. 아버지와 새엄마는 터미널 앞길에서 식당을 하며 그곳에서 기거했다. 소녀의 자취방까지 채 십 분도 걸리지 않는 거리를 오가는 이는 주로 소녀였다. 가끔은 아버지였다. ‘오늘이 그날이면 좋겠는데...’ 자정이 한참 지난 시각이라 길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어둑한 샛길에서 누군가 툭 하고 튀어나오더니 비틀대며 소녀 쪽으로 다가왔다. 아버지 또래의 양복을 입은 남자가 말했다. “학생. 여기서 뭐해?” 소녀는 긴장했지만, 한껏 띠꺼운 표정을 띄어 퉁명스레 답했다. “아버지 기다리는데요. 왜요?” 남자는 다시 상냥한 목소리로 물었다. “그 아버지가 진짜 아버지야, 아니면 그 뭐랄까.. 애인이야?” 소녀는 짜증이 나서 혀를 찼다. “그냥 가시라구요!” 남자가 미안하다며 머릴 긁적이고 사라져갔다. 아버지는 나타나지 않았다. 소녀는 좀 울었던 것 같다. 여름이었다.
빛마을 앞에서 술기운이 오른 채 공중전화기를 붙들고 서있던 이는 더 이상 소녀가 아니었다. 기말고사가 끝난 날의 늦은 밤이었다. “무슨 일로 전화했냐?” 수화기 너머의 남자는 꽤 당황하고 있었다. “너 바보냐?” 머뭇거림 없이 답한 그녀도 스스로에게 조금 놀랐다. 그녀는 말하자면 쑥맥이었다. 스스로 여성스럽다고 생각하지 않았으니 여성스러운 끼를 내보일 생각조차 못했었다. 과 연락망을 보고 집으로 전화를 건 것은 일종의 사고였다. 두 사람 다 잠깐동안 말이 없었다. “내일 아침에 좀 보자.” 그는 시험을 마치고 차로 두 시간 거리의 본가에 가 있었다. “나 이제 널 못 볼 것 같은데..” 그녀는 그제야 부끄러움을 느껴다. 볼이 뜨끈하게 달았다. “내가 찾아다닐거다. 너 만날 때까지.” 무슨 이야기를 나눌지, 내일의 결말이 무얼지는 짐작조차 할 수 없었다. 두 달 전 과주점 테이블에서 술에 달떠 아무렇게나 뱉은 말일 터였다. “네가 조금만 더 여성스러웠다면 난 너한테 고백했을거야.” 그 너스레가 그녀를 자꾸만 그때 그 자리로 데려다 놓았다. 거리에 눈발이 날리기 시작했다. 그 겨울 첫 번째 눈이었는지는 모르겠지만 그야말로 첫눈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