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현을 그리워하며
돌이켜보면 사소한 것에 후회가 더 많이 남는다. 그때 왜 지하철을 타지 않고 버스를 탔을까. 엘리베이터를 이용하지 않고 왜 계단으로 올라가다 넘어졌을까. 왜 고백을 하지 못했을까. 왜 그때 그에게 그런 말로 상처를 줬을까. 유치하지만 뭐 이런 거 말이다. 그래서 문학평론가 김현을 생각할수록 후회가 많이 남는다. 정말 사소한 것이었는데 그때 왜 그랬을까.
공식적인 자리에서 김현을 세 번 봤다. 한 번도 그에게 아는 척을 하지 못했다. 멀리서만 바라봤을 뿐이다. 그러니 손을 잡을 기회도 없었다. 왜 그때 그의 손을 잡고 '반갑습니다'라고 인사를 하지 못했을까. 그게 뭐가 어려운 거라고. 그게 너무 후회가 된다. 살아있다면 지금이라도 찾아가서 손을 덥석 잡고 싶지만 이제 그는 우리 곁에 없다. 그의 손은 어땠을까. 두터웠을까. 말랐을까. 손가락은 가늘었을까 아니면 그가 우리 문학에 남긴 위대한 족적처럼 우람한 손가락을 가지고 있었을까. 아! 그때 나는 왜 김현의 손을 잡지 못했을까.
전 직장을 다녔을 때 한국 현대문학 중 문학사에 남을 60편의 작품을 고른 적이 있다. 그때 김현의 '상상력과 인간(소설론집)''사회와 윤리(시론집)'을 묶어 소개했다. 선정 전, 평론도 작품으로 볼수 있는 것인가에 대한 진지한 토론이 있었다. 의견은 팽팽했다. 그러나 "대상자가 누구냐?"라고 물었을 때 "김현!"이라고 하니 대체적으로 수긍했다. 원래 내 생각은 59번째는 박경리의 '토지'로 하고 60번째 마지막을 '김현 전집'으로 하고 싶었다. 그가 우리 문학에 끼친 영향력이 헤아릴수 없을만큼 커서다. 그렇게 할 수 도 있었지만 작가들에 대한 예의가 아니었다고 생각해 10번째로 앞당겼다. 나는 지금 그걸 후회하고 있다. 그렇게 한들 작가들도 김현이라면 이해했을 것이다.
남의 글을 읽고 쓰는 비평도 소설 시 못지않은 창작의 소산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소설이나 시처럼 비평도 우대를 받아야 한다고 늘 생각해 왔다. 그런 면에서 김현의 비평은 정말 최고였고 그 글은 최고의 창착물이었다. 김현은 내가 알고 있는 대한민국 최고의 작가다. 김현이 1985년 12월 30일부터 1989년 12월 12일까지 만 4년간 썼던 그의 일기를 보라. '안네의 일기'나 '버지니아 울프 일기'를 뛰어넘을 만큼의 '일기문학'에서 위대한 족적을 남겼다. 그 일기를 묶은 유고집 '행복한 책 읽기'를 읽고 있노라면, 점점 후반부로 갈수록 삶과 죽음의 팽팽한 경계선에서 한 지식인의 고뇌 앞에서 탄식이 절로 나온다. 읽다가 울컥해서 책을 덮은 적이 한두 번이 아니다. 나는 1992년 초판을 가지고 있는데 여기저기 친 밑줄과 눈물이 범벅이 되어 책은 남루하지만, 내가 힘들 때 제일 찾는 책 다섯 권 중 단연 첫 번째다.
1989년 6월 12일
어제는 좀 힘이 들었다. 아침부터 몸에 좀 열이 있었는데 무리해서 북한산을 종주했더니 밤에는 열이 나고 뼈마디가 쑤셨다. 이러다가 가는 것이 아닌가 할 정도로. 삶의 순간순간이 죽음과의 싸움인데 그것도 모르고 희희낙락 지낸다. 그러나 고통이 없다면 죽음의 실감도 없으리라. 많이 아프라. 죽음이 너를 무서워하도록
1989년 8월 19일
내 기억 창고엔
내가 꾸다 만 꿈들이 널려 있고
어쩌다 우울한 날들에는
악몽이 되어 우우우 되살아났다
악몽은 긴 채찍을 들고 내 뒤를 쫓고
나는 어그적거리며 달아나려 했으나
무서워라, 벗어날 길이 없었다
놀라 깨어나 보면
머리는 휑하니 비어 있었다
일기의 마지막은 이렇게 끝난다
1989년 12월 12일
'새벽의 형광등 밑에서 거울을 본다 수척하다 나는 놀란다
얼른 침대에로 되돌아와 다시 눕는다
거울 속의 얼굴이 점점 더 커진다
두 배, 세 배, 방이 얼굴로 가득하다
나갈 길이 없다
일어날 수도 없고, 누워 있을 수도 없다
결사적으로 소리 지른다 겨우 깨난다
아, 살아 있다.
김현의 유고집 제목이 '행복한 책 읽기'였으나 김현문학전집 5권의 제목은 '책 읽기의 괴로움'이었다. 서로 상반된다. 그런데도 묘하게 같은 느낌이다. 행복한 괴로움? 김현은 이렇게 쓴 적이 있다. “책 읽기는 결핍이나 불행의 몸짓을 연습하는 움직임이 아니라, 자기가 책을 통해 불행이나 결핍이 되어, 충족이나 행복을 싸워 얻게 하는 움직임이다. 그런 의미에서 책 읽기는 고통스러운 작업이다.” 하지만 '즐거운 고통'이란 글에서는 “책 읽기는 즐거운 일이어야 한다. 그러나 어쩌랴. 대부분의 경우 책 읽기는 즐거운 고통이다. 나는 그 고통을 최근에 윤흥길의 ‘황혼의 집’을 읽으면서 다시 느꼈다. 그가 고통스럽게 읽은 세상을 나는 그의 책을 통해 즐겁게 접근해 갔는데 그 책을 덮고 나니까 다시 그가 느낀 고통만이 내 속에 남아 있었다.”
맞다. 책 읽기는 '즐거운 고통'이다.
1990년 6월 27일. 김현은 49세 나이로 요절했다. 만일 그가 더 살아 있었다면, 단언컨대 지금처럼 한국문학이 지리멸렬하지 않았을 것이다. 한국문학도 그의 죽음과 함께 무너진 것이다. 네이버 검색란에 '김현'이라고 치면 문학평론가 김현이 아닌 국회의원 김현이 나온다. 빌어먹을! 이게 우리 우리 문학의 현주소다. 가을이 오면 목포에 있는 김현문학관을 찾아 가 볼 생각이다. 핸드프린팅이라도 있으면 좋으련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