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명랑낙타 Aug 19. 2024

체험했던, 그만큼만 쓴 작가

  리얼리즘 작가 박영한 


 바람이 휙~하고 불면 먼지가 안개처럼 피어올랐다. 먼지가 걷히니 마법을 부린 듯,  견고한 요새같은 대단지 아파트가 눈앞에 펼쳐졌다. 안산 예술인 아파트. 거기에 박영한이 살고 있었다. 그를 만나러 가는 길이다. 허허벌판 여기저기에 건물들이 들어서고 있었다. 덤프트럭이 먼지를 날리며 달리고 온갖 자재들이 널브러져 있는, 말 그대로 세상이 온통 이판사판 공사판이다. 한때 고잔으로 불렸던 안산. 농촌의 껍질을 버리고 도시로 탈바꿈하려고 몸부림 치는 이곳에 이제 새로운 세상이 펼쳐질 모양이다. 



 ‘지상의 방 한 칸’이란 소설. 단언컨대 이 소설을 읽은 이들은 그리 많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EBS 수능강의에 이 소설을 다룬 수능 예상 문제가 있어서 나는 깜짝 놀랐다. OECD 국가 중 최하위 독서율을 자랑하는 나라에 비록 일부 고등학생이나마 이 소설을 읽었다는 뜻이니 말이다. 답은 더 놀랍다. ‘현재 화자에게 가장 필요한 대상, 가장으로서의 책임감을 나타냄’이다. 정답이다. 200자 원고지 600장이 넘는 궁상맞기 이를 데 없는 중편 소설을 이렇게 한 줄로 완벽하고 명쾌하게 요약할 수 있다니... 대한민국 1타 강사들은 정말 대단하다. 이 소설에는 주인공인 화자 즉 박영한이 방 한 칸을 얻기 위해 얼마나 피나는 노력을 했는지 함축되어 있다. 그런 그가 번듯한 40여 평 아파트 주인이 됐다니 찾아가는 건 너무도 당연하다.     

 


 안산 예술인 아파트는 1984년 공사를 시작해 1986년 본격적인 입주가 이뤄졌다. 20층 높이의 13개 동 1천458 가구. 서울에서 이리도 멀리 떨어진 곳에 뜬금없이 예술인 아파트라니. 고귀한 영혼을 갖고 있는 예술인들을 서울에서 멀리 떼어놓아야 할 이유가 분명 있었을 것이다. 복도식 아파트가 양쪽으로 줄지어져 있는 사이에 타워형 건물을 배치했다. 각 동 발코니마다 초록색, 분홍색 등 온갖 색을 칠했다. 예술인이 산다고 그나마 잔뜩 멋을 부린 것이다. 이 멋드러진 아파트를 보기 위해 전국에서 관광버스를 대절해 구경을 왔다고 한다. 



  박영한의 첫인상은 '참 잘 생겼다'. 도포를 입히고 갓을 쓴다면 조선의 신진사대부가 이런 모습일꺼라는 느낌을 받았다. 조각 같은 그의 얼굴을 보고 감탄하며 “성공하셨네요”라고 물었더니 부끄러워했다. 멋진 외모와는 달리 수줍음이 많은 건지 선비풍이라서 점잖은 건지 아무튼 그랬다. “윤 작가도 이웃입니다”. 윤 작가란 ‘돈황의 사랑’ 작가 그 윤후명을 가리키는 것이다. 둘은 절친이다. 기억은 가물하지만 그때 우리는 집 한 칸을 마련하기 위해 온갖 노력을 마다하지 않았던 그의 고난보다, 78년 오늘의 작가상 수상작이며 그를 일약 문단의 스타로 만들어준 ‘머나먼 쏭바강’에 대해 많은 얘기를 한 거 같다. 우리 문학사에 월남전을 최초로 다룬 박영한에 대해 김윤식은 '백조 떼만 모여있는 우리 소설계에 한 마리 까마귀 모양을 하고 나타났다'라며 놀라워 했다. 이 책은 무려 10만 권 이상을 팔려나가 조세희의 '난장이가 쏘아 올린 작은 공'과 함께 그를 베스트셀러 작가 반열에 올려놓았다.     


 그러던 그가 쏭바강 후속작인 '인간의 새벽'과 자전적 성장소설 '노천에서' 등 장편 두 편을 발표한 후 문단에서 돌연 자취를 감췄다. 침묵은 길었다. 무려 6년 동안 그는 김포 고천 고양 능곡 남양주 덕소에 살며 변신을 시도했다. 87년 현대문학 6월호에 ‘왕룽일가’를 발표하더니 잇달아 ‘오란의 딸’ ‘지옥에서 보낸 한 철’을 선보인다. 그사이 세상을 보는 그의 눈이 달라졌다. 날카로운 도시적 문체가 투박한 해학의 문체로 바뀌었다. 마치 깊은 산 속에서 누구도 칠 수 없는 마구를 익히고 마운드에 선 괴물 투수처럼 말이다. 내가 박영한을 만난 건 '지옥에서 보낸 한 철'로 동인문학상을 수상한 직후, 그러니까 '왕룽일가'가 단행본으로 나오기 전이었다. 그는 이 연작소설이 그의 작가적 인생을 송두리채 바꿔 놓을 줄 모르고 있었다. 그 후 '우묵배미의 사랑' '후투티 목장의 여름''은실네 바람났네' 등 3편을 더 발표하고 '우묵배미의 사랑'이 출간됐다. 완전 대박이었다. 훗날 '왕룽일가'가 드라마로 만들어지면서 쿠웨이트 박을 연기한 박주봉은 일약 스타가 됐다. '우묵배미의 사랑'은 영화로 제작돼 한국 영화사에 길이 남을 명작이 됐다. 


 우리는 작가들을 만나고 돌아오면 동행한 후배가 찍은 흑백 사진(가끔 컬러사진도 찍었다)을 작가에게 기념으로 보내주곤 했다. 작가에게 일종의 경의를 표하는 우리만의 의식이다. 그러던 어느 날 박영한에게 전화가 왔다.   

박영한: "보내준 사진 잘 받았다. 너무 마음에 드는 사진이 있는데 이번에 출간되는 '왕룽일가'에 사용해도 되겠나"

나: "물론이다. 사진을 찍어 준 그의 이름만 넣어달라"

박영한: "오케이"

 민음사에서 출간된 '왕룽일가' 뒤표지 모습, 지금 저 위에 있는 저 사진이다. 책이 나오자 나보다 사진 찍은 후배가 더 감동해 눈물을 찔금거린게 지금도 기억이 난다. 

 

 좋아하는 영화는 수도 없이 많지만 그래도 한국영화 20편을 꼽으라면 나는 서슴지 않고 장선우 감독의 1990년 작 '우묵배미의 사랑'에 한 표를 던진다. 나는 이 영화가 한국 뉴시네마 선언의 시발점이라고 생각한다. 리얼리즘의 정수를 보여준 영화. 다시봐도 잘 만들었다. 장선우는 미싱사들의 사랑과 이를 둘러싼 가정의 갈등을 해학과 주변인들에 대한 연민의 시선으로 담아내는 데 성공했다. 박중훈의 능청스러움과 폭력남편에게 두들겨 맞으며 마침내 막다른 골목까지 간 최명길의 처절한 연기. 그리고 유혜리의 놀라운 변신. 영화를 보면서 나는 2006년 8월 23일 59세 나이로 요절한 박영한이 떠올랐고, 가슴이 먹먹해 어쩔줄 몰라하며 방 안을 한참동안 서성거렸다. 곧 그의 기일이다.   



  

 





작가의 이전글 하늘로 돌아간 시인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