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보리의 노래 임홍재
임홍재라는 시인이 있다. 아니 있었다. 생소한 이름이라고 만만하게 봐선 안된다. 20대부터 촉망받는 패기의 젊은 시인이란 소릴 귀가 아프도록 들었다. 그도 그럴 것이 1975년 서울신문 신춘문예에 '바느질'이, 동아일보 신춘문예에 시조 '염전에서'가 동시에 당선되어 당당하고 화려하게 문단에 등장한 그다. 그 역시 기형도처럼 생전에 단 한 권의 시집을 갖고 있지 못했다. 그가 죽은 후 친구들이 그의 넋을 기리기 위해 '청보리의 노래'라는 유고시집을 발간했다. 흩어져 있는 시를 모으던 친구들은 시에 담긴 '가난'을 보고 너무 처절해 가슴을 한참이나 쓸어내렸다고 한다. 미당이 노래한 '가난은 한낱 남루에 지나지 않는다'는 시어가 너무나도 사치스러웠을 정도였다는 것이다. 천상병의 '가난'도 박재삼 김관식의 '빈곤'도 그의 가난만큼 절실하지 않았다.
술이 문제였다. 1979년 9월 29일, 글친구 이광복의 소설 현상공모 당선을 술 한잔 사주고 돌아오는 길에 면목동 다리에서 개천으로 떨어졌다. 축하하는 자리니 술이 빠질 수가 없었다. 그의 나이 겨우 서른일곱이었다. 자전거를 타고 가는 젊은 시인을 상상해 보라. 어둠 속을, 노래를 흥얼거리며 흔들흔들, 뒤뚱뒤뚱 굴러가는 저 슬픈 시인의 마지막을 떠올려 보라. 개천에 누워 쳐다 본 가을 하늘에는 별들이 쏟아질듯한 태세를 하고 있었을 것이고, 희미해지는 의식을 부여잡으며 지긋지긋하게 가난했던 어린 시절을 떠올렸을지 모른다. 남의 머슴 노릇만 하며 남의 송장만 주무르던 아버지가 부르는 만가 가락이 들렸다고 느꼈을지도 모른다.
촉망받던 그의 죽음을 통보받고 아버지 어머니가 받았을 충격은 가늠하기 조차 어렵다. '달머슴 새경 받아 한 몫에 져다 부리고 돌아온 아버지'와 '청보리 목 잘려 간 황토 영마루 떠나간 할머니 상복 깁던 바늘로' 평생 바느질 하는 어머니였으니 더욱 그럴 것이다. 연로한 부모는 어느 날, 종일토록 일어나지 않았다고 한다.
'아버지는 한 세상/남의 송장이나 주무르기만 할 것인가/진눈깨비 흩날리는 황토마루에/정성 들여 광중이나 짓고/외로운 혼이나 잠재울 것인가/마지막 다문 입에 동전하나 물리고/칠성판 바로 뉜 후/종내는 한 줌 흙이 되고 말 시체 위에/흙을 뿌리고 눈물을 뿌리며/오오호 달구 오오호 달구/만가만 부를 것인가' ('산역'중에서)
'누런 시래기 몇 두름 엮어 달고/어머니가 황토맥질 한 날은/하염없이 눈물 나더라//흉년이 들어 흉년이 들어/굶기를 식은 죽 먹기 하던 누이야//삼백날 머슴살아 등살 터진 빈 지게에 찬바람만 지고 오는 아버지를 부르지 말자/..... 어머니가 황토맥질 한 날은/굶어도 굶어도 배만 부르고 강물처럼 가슴이 뿌듯해/바람벽 껴안고 밤 내 울었다'('황터맥질'중에서)
전 직장에 있을 때 지역에 있는 문학비를 순례하자는 의견이 나왔다. 묘비와 문학비의 경계가 애매했지만, 시를 적어 넣는 커다란 묘비도 문학비에 포함시키니 30개가 넘었다. 홍사용 문학비를 시작으로 하나씩 하나씩 찾아 나섰다. 당시 안성농업전문대 (현 국립한경대학) 교정을 들어서니 오른쪽 한편에 임홍재의 문학비가 서 있었다. 찾아가던 날, 운동장의 모래가 작은 회오리바람에 하늘로 날리는 등 운동장 전체가 온통 모래투성이였다고 수첩에 기록돼 있다. 문학비는 1981년 4월 안성문우회와 그가 속했던 시월회와 육성회가 힘을 합쳐 세웠다. 비에는 '소곡'이 새겨져 있었다.
'램프가 타고 있네./밤의 밑바닥에서/별 하나 지켜/천 년을 살며/생모래의 귀를 틔운/바람 속의 열매가/가을의 중심에/내려앉고 있네./죽는 길이 험할수록/죽음이 값진/청옥빛 열매가/바람길을 열고 있네.'('소곡' 전문)
어제 그의 시비를 찾아갔다. 40년 만이다. 그때는 분명 학교정문 들어서자마자 오른편에 있었는데 깜쪽같이 사라졌다. 도무지 찾을 수가 없었다. 학교의 규모가 엄청나게 불어난 탓이다. 마침 지나가는 두 명의 학생에게 시비의 존재를 물으니 '본 적도, 들어 본 적도 없다'고 했다. 학생을 앞질러 50여 미터를 더 올라가니 놀라워라! 그곳에 시비가 다소곳이 서 있었다. 시비 주변을 둘러보는데 아까 그 학생들이 "이게 시비였구나" 하면서 대수롭지 않게 스치고 지나갔다. "누구 시비예요?"라고 묻기만 했어도 이리 섭섭하진 않았을 것이다. 그렇다고 무심한 학생들을 나무랄 일은 아니다. 지금은 시인이 존중받는 세상이 아니다. '죽은 시인의 사회'인 것이다.
어차피 안성에 온 김에 임홍재의 유택을 찾아 나서기로 했다. 그의 고향 안성 마둔저수지 부근에 있다는 게 유일한 단서였다. 시비에서 10km 떨어진 곳이다. '한강에서 바늘 찾기'가 아닐까 하는 걱정이 앞섰다. 깊다고 소문이 자자했던 마둔저수지의 물이 절반으로 줄 만큼 심각한 가뭄이었다. 저수지길을 따라가다가 길 옆에 묘비 하나가 뎅그러니 서있는 게 보였다. 설마, 했는데 임홍재가 거기 있었다. 호박줄기가 제단 앞에까지 뻗어 있었다. 묘역도 묘비도 초라하고 쓸쓸하기 이를 데 없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게 분명했다.
임홍재가 신춘문예에 당선된 75년과 사망한 79년간의 5년은 정치적으로 험난한 시기였다. 많은 참여시인이 도시 산업화로 인한 노동력 착취와 피폐해진 농촌의 현실을 문학을 통해 직설적으로 고발할 때였다. 온몸으로 가난과 부딪히고 있던 시인에게 이런 문단의 흐름은 견디기 어려웠을 것이다. 사망하기 전 친구들에게 '쓰이지 않는 시'에 대한 고충을 토로한 것도 아마 이 때문임이 분명하다. '요절한 시인'은 늘 신화의 날개를 달고 우리 주변을 떠돌지만,평생을 가난하게 살던 임홍재는 문단의 조명을 제대로 받지 못해 그런 날개조차 달지 못했다. 지금은 아무도 그를 기억하지 못한다. 심지어 안성 사람들도 그의 이름을 대면 고개를 꺄우뚱거린다. 슬픈 일이다.
임홍재가 남긴 것은 빛바랜 몇 장의 사진과 편지 몇 통뿐이다. 언제쯤 그에 대한 재평가가 이뤄질 수 있을까.
내가 가장 좋아하는 그의 시 '유년의 강' 전문이다.
'온전한 가슴 하나 지니지 못해/삼백 날 피고름만 쏟던 누이야./찬 바람 길을 열고/갈밭에서 서서/바라죄는 가슴을 뜯어/강물에 띄워 버리면/응어리 응어리마다 삭아 버릴까/밤마다 강가에 나와/모래알 씹으며 울던 누나야./목매기송아지 울음 뒤에/허기진 나날들이 힘줄에 남아/다시금 살아 오르는데/삼천 사발 피고름에 찌든 누이야./이지러진 가슴 안고/강가에 나와/저 혼자 울음 우는 가을 강을 보아라./삼천 사발 피고름에 찌든 누이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