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인 김지하
내가 살던 도시 유일한 지하도의 초입에 세평 남짓 크기의 작은 서점이 하나 있었다. 기차를 이용하는 여행객들이 차 안에서 읽을만한 소설, 에세이, 잡지류를 취급하는 여느 서점과 크게 다를 게 없었다. 하지만 이 서점은 좀 특이했다. 지하에 있는 것도 그랬고,책꽂이를 앞으로 당기면 그 안에 작은 공간이 있는데, 거기엔 일반서점에선 구할 수 없는 책들이 잔뜩 쌓여 있었다. 금서(禁書)였다. 소지하는 것만으로 '국가보안법상 이적물 소지죄'로 잡혀가던 그런 시절이었다.
대부분 책을 거기서 구했다. 지금은 번듯한 중견출판사로 성장했지만, 그때만 해도 대학원생들이 시간에 쫓기듯 번역한 이른바 '붉은 책'들이 신생출판사들에 의해서 쏟아져 나왔다. 거의 일본 서적을 번역한 것들이었다. 루카치와 마르쿠제의 이론서, 오스트로프스키의 '강철은 어떻게 단련되었는가'도 거기서 구해 읽었다. 물론 아무에게나 책을 내주는 것은 아니었다. 그나마 나는 주인과 안면을 터서 웬만한 책들은 구할 수 있었다. 웃돈을 요구하지는 않았다. 정가만 받았다. 놀라운 건 정보과 형사들이 그 앞을 스쳐 지나가도 서점주인은 눈 한번 깜짝하지 않았다는 것. 오죽했으면 서점 주인이 정보과 형사가 심어 놓은 프락치라는 소문이 나돌 정도였다. 아마 전국의 여느 도시에도 이런 서점이 하나쯤은 있었을 것이다.
지금 내 책상 위에 김지하의 시선집 '타는 목마름으로'가 있다. 1982년 6월 5일 간행된 초판이다. 이 시집을 읽으면서 물밀듯이 밀려오는 감동 때문에 온몸에 전율이 일었던 기억이 난다. 그 감동을 나는 책 뒷날개쪽에 이렇게 적었다. '이제 나는 호흡하고 싶다. 아 自由여! 1982년 6월 7일'. 이 시집도 거기서 구했다. 며칠 후 시집은 금서가 됐다.
재벌과 국회의원, 고급 공무원과 장성, 장 차관의 부정부패와 비리를 을사오적에 빗대 비판한 판소리 가락의 김지하의 저항시 '오적'을 우리는 필사본을 구해 읽었다. 그 필사본을 다시 필사해 친구들에게 몰래 건네주기도 했다. 김지하는 우리에겐 신화였다.
1974년 11월 18일 '민족작가협의회'전신인 '자유실천문인협의회' 결성식에서 선언문을 발표했는데, 그게 '문학인 101인 선언'이다. 그 선언문에서 요구한 첫 번째가 '시인 김지하를 비롯하여 긴급조치로 구속된 지식인, 종교인, 학생의 즉각 석방'이었다. 이것만 봐도 당시 김지하의 존재가 어땠는지 짐작할 수 있을 것이다.
김지하는 1974년 ‘오적’으로 반공법 위반, 민청학련 사건 배후 조종으로 국가보안법 위반으로 사형이 선고된 뒤로 무기징역으로 감형된 후, 1975년 2월 형집행정지 처분으로 약 10개월 만에 출옥했다. 그러나 인혁당 사건이 조작되었음을 폭로하는 칼럼 '고행... 1974'를 동아일보에 발표하면서 반공법 위반혐의로 다시 수감됐다. 결국 7년간 수감생활을 한 끝에 1980년 12월 형집행정지로 석방됐다. 옥살이를 하는 동안 아시아·아프리카 작가회의는 ‘제3세계의 노벨상’이라 불리는 로터스상 특별상을 수여했다. 김지하만큼 핍박받은 작가는 그 어디에도 없었다.
그렇게 절대적인 추앙을 받던 김지하의 한 많은 인생사는 1991년 조선일보에 기고한 칼럼 '죽음의 굿판을 걷어 치워라'때문에 꼬이기 시작했다. 명지대생 강경대가 곤봉에 맞아 사망하면서 청년들의 분신과 투신자살이 계속되자 이를 공개적으로 비판하며 포용과 상생을 주장했다. 진보진영 문단은 당연히 김지하를 '변절자'라며 강하게 비판했고, 김지하 때문에 결성된 '민족작가협회'가 그를 제명하는 난센스가 일어나기도 했다. 마침내 2012년 대선에서 박근혜 당시 새누리당 대선 후보를 공개 지지하면서 진보진영과는 영원히 결별하게 된다.
오늘은 김지하 3주기가 되는 날이다. 김지하는 2022년 5월 8일 원주자택에서 가족들이 지켜보는 가운데 눈을 감았다. 전립선암이 원인이었다. 그날 장례식은 진보진영 문인들이 대거 불참하는 등 꽤 초라했다는 소문이 한동안 있었다. 유홍준이 '나의 인생만사 답사기'에 그날의 분위기를 이렇게 적었다. 설마 했는데. 사실이었다.
'김지하는 외로이 세상을 떠났다. 원주의 한 교회에서 치러진 그의 장례식은 내가 이제까지 본 장례식중 가장 초라하고 쓸쓸하였다. 가족과 교인, 그리고 끝까지 그의 곁에 남아 있던 벗과 후배 몇 명만이 그의 마지막 길 을 배웅했다. 그것은 너무 슬프고도 안타까운 일이었다. 김지하를 그렇게 보낼 수는 없는 일이었다.'
못내 아쉬웠던지 49재에 많은 이들이 모여 김지하를 추모했고 12월에는 '타는 목마름으로 생명을 열다'라는 제목의 추모 문집이 간행 됐다. 문집에 황석영이 쓴 글 중 인상 깊은 대목이 있었다. 길지만 중요하다고 생각해 인용한다.
'어느 무렵부터인가 그의 잠적이 시작되었다. 그의 아내 김영주에게서 내게 급박한 전화가 왔다. 그가 열흘 이상 연락이 없어 어디 갔는지 못 찾겠다고 했다.사방에 수소문하여 그가 백양사에 있다고 알려주면서 김지하가 행려자처럼 이곳저곳 떠돌고 있음을 알게 되었다. 그는 심한 환각증에 시달린 뒤에 치료를 받고 오래 전에 술을 끊었다. 물론 그는 또다시 술을 마시지는 않았다. 그냥 허전해서 떠돌았을 것이다.
어느해 대선시기에 박근혜에서 비롯된 풍파 역시 그 나름대로 해원의 뜻이 있었으리라 짐작된다. 매체들이나 또는 강연회장의 청중들은 내게 김지하를 어떻게 생각 하는가 벼르듯이 묻곤 했다. 그때마다 나는 김지하는 아픈사람이라고, 그가 나을때까지 기다려보자고,말하곤했다' (황석영 '여기까지 다들 애썼다!'중에서)
사족이다. 순전히 내 생각이다. 91년 김지하의 칼럼을 34년이 지난 지금, 이 싯점에서 다시 읽어보면 어느정도 수긍이 간다. 전두환 정권이 종말을 고하고 치러진 대통령 선거에서 노태우, 김영삼, 김대중이 출마했다. 김영삼과 김대중의 단일화는 통일 버금가는 우리의 염원이었다. 단일화가 성사됐다면 단언컨대, 노태우는 태통령이 될 수 없었다. 민주화가 도래했을 것이고 대학가에 분신자살도 없었을 것이다. 그러나 정권욕에 집착한 두 김 씨의 불화로 단일화는 실패했고, 노태우가 대통령이 되었다. 대학가는 들끓었다. 여기저기서 분신자살이 이어졌다. 분신대기조가 있다는 소문도 돌았다. 그걸 비판한 김지하가 잘못한 것인가. 단일화를 하지 못해 젊은이의 무고한 희생을 만든 양 김씨가 잘못한 것인가. 김지하는 천하의 몹쓸 인간이 됐고 81세로 한 맺힌 세상을 떠났다. 후에 차례로 대통령이 된 두 김씨 누구도 그때 학생들의 분신자살에 대해 유감을 표명했다는 소리를 나는 듣지 못했다.
소설가 김훈은 어느 인터뷰에서 이렇게 말한 적이 있다. "시의 이름으로 박정희 독재와 싸웠던 고귀한 투쟁, 짓밟혀 있거나 투항해 있었던 시대에 자유와 생명을 갈망했던 정신을 기억해야 한다... 말년에 그가 보여준 파행 때문에 시대로부터 소외 당해 있었던 것은 사실이지만, 정신사적으로 그의 삶을 되돌아볼 필요가 있다" 나는 김훈의 말에 전적으로 동의한다.
추모문집 출간 기자간담회에서 유홍준은 “지하 선배는 다시 지상으로 올라와야 합니다”라고 말해 분위기를 숙연하게 만들었다. 하지만 유홍준의 기대와는 달리 김지하는 여전히 지하에 머물고 있다. 3주기인 오늘, 나는 김지하가 서정주처럼 잊혀진 시인이 될까봐 그게 두렵다.
횔더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어둠이 지배하는
시인의 뇌속에 내리는
내리는 비를타고
거꾸로 오르며 두 손을 놓고
횔더린을 읽으며
운다
어둠을 어둠에 맡기고
두 손을 놓고 거꾸로 오르며
내리는 빗줄기를
거꾸로 그리며 두 손을 놓고
횔더린을 읽으며
운다
'나는 이제 아무것도 아니다
즐거워서 사는 것도 아니다'
('횔더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