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평론가 정영일
밤새도록 울부짖는 매미소리를 거의 매일 듣다시피 하고 있다. 떠나는 여름이 아쉬워서 인지, 짧은 자신의 생이 서러워서인지 쟤들은 비 오는 날만 빼곤 단 하루도 울음을 거른 날이 없다. 처음엔 고통이었는데 이제는 측은지심이 생겼다. 오죽하면.
그해 여름도 그랬다. 1988년. 폭염이 거의 2주일 지속되자 언론들은 '더위에 녹다운된 한반도' '장기간 열대야로 잃어버린 밤' 뭐 그런 식의 제목들을 쏟아냈다. 온통 매미소리였다. 더위의 극성에 한 밤중인데도 사람들이 거리로 쏟아져 나왔다. 더워도 너무 더웠다. 그런데도 우리는 그럭저럭 그 더위를 견뎌냈다. 그럴 수 있었던 건 아마도 오매불망 기다리던 88 올림픽이 임박했기 때문이지 않았을까 싶다. 희망이 폭염을 물리친 것이다. 신원호PD가 1988년을 꼭 짚어 '응답하라 1988'을 만든 것도 그래서였을 것이다. 물론 내 생각이다.
'응답하라 1988'을 다시 보았다. '언제 저걸 다 보나'라는 생각에 1.5 배속으로 봤다. 하지만, 정지시키고 1배속으로 다시 돌린 게 수십 번. 결국 정상 속도로 보면서 웃다 울다했다. 드라마를 어쩌면 저렇게 잘 만들 수 있는 걸까. 신원호는 김원석과 함께 '한국에서 가장 뛰어난 재주꾼'이라고 나는 생각한다. '가슴이 뜨거웠고 넉넉하지 않았지만 마음만은 따듯했던 시절이 있었다'라는 덕선의 내레이션으로 시작되는 1회 첫 장면. 1988년은 그런 해였다.
하지만 올림픽보다도 나는 1988년 8월 25일, 그날을 더 또렷하게 기억한다. 목요일이었다. 지금도 그렇지만, 그때도 이상기류 탓에 국지성 폭우가 쏟아지곤 했는데 그날이 그랬다. 대기가 불안정했다. 그때 날아온 소식. '영화평론가 정영일 별세'. 5월에 병원에 입원했다는 소리는 들었는데, 이겨낼 줄 알았다. 그렇게 황망하게 갈 줄 몰랐다. 그날 밤 폭우가 쏟아졌다.
정영일. 우리 또래는 너무도 친근한 이름이지만 젊은 친구들은 아마 낯설지도 모르겠다. 원종배 아나운서와 함께 'KBS 사랑방중계'를 진행한, 검은 뿔테 안경에 머리는 단정하게 내린... 노타이 재킷차림과 웃음기 없는 표정, 안경너머의 어린이 같은 천진한 눈빛은 그의 트레이드 마크였다. 그는 늘 그 모습이었다.
정영일이 우리 시대의 마지막 로맨티스트였다고 나는 생각한다. 지금까지 그만한 로맨티스트를 본 적이 없다. 그는 내게 매우 뜻깊은 존재였다. 정신적 지주이자 나의 롤 모델이었다. 영화는 말할 것도 없고 음악, 친구, 술을 좋아하고 그리고 야구와 평양냉면을 사랑했던 남자. 맛집에 해박한 미식가이기도 했다. 휘파람으로 슈베르트 현악사중주를 연주해 프로 연주자를 놀라게 했고,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 포비치와도 막역하게 지냈다는 정영일. 나도 그런 멋을 알고 싶었다. 내가 브런치스토리에 글을 쓴 이유는 우리의 기억 속에서 절대 잊혀져선 안 될 정영일과 어느 날 홀연히 사라진 내 친구 때문이었다. 그들을 그냥 이렇게 보낼 수는 없는 노릇이었다. (친구의 부고는 100번째에 쓸 생각이다)
내가 영화감독의 꿈을 꾸었던 건 매주 내 손을 잡고 영화관을 찾은 아버지의 덕분이지만, 정영일의 영향도 만만치 않았다. 나뿐만이 아닐 것이다. 아마도 내 또래의 많은 이들이 그의 영향권에 있었다고 나는 확신한다. 우리 집 안방에 있던 텔레비전이 마루로 나오게 된 것도 순전히 정영일 덕분이었다. "이 영화 안 보면 큰일납니다" 그의 이 협박성 발언에 주말마다 밤새 영화를 보는 나를 한심하게 보던 부모님이 나를 내쫓을 수는 없었는지 텔레비전을 마루로 쫓아냈다.
영화를 무척 좋아했던 아버지는 매주 나와 영화관을 가면서도 한 번도 영화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한 적이 없었다. 하지만 텔레비전이 퇴출되던 그날, 공교롭게도 프레드 진네만 감독의 '지상에서 영원으로'가 방영됐다. 그 영화는 아버지가 가장 좋아했던 영화중 하나였다. 같이 보았으면 좋으련만, 아버지는 혼잣말로 "그래도 여배우는 데보라 커가 최고지"라고 중얼거리고 안방으로 들어가 버렸다. 그 유명한 장면, 그러니까 몽고메리 크리프트가 친구의 죽음을 애도하며 울면서 트럼펫을 부는 씬에서 나도 엉엉 울고 말았다. 아버지는 어쩌면 그 장면을 피하고 싶었는지 모른다.
오늘은 정영일의 기일이다. 점잖은 표정 때문에 꽤 나이 들어 보였지만 그때, 그는 고작 59세였다. 너무도 아까운 나이였다. 애통하기 이를 데가 없다. 신이 또 한 명의 재주꾼, '살아있는 영화, 음악의 백과사전'을 시기한 것일까. 정영일은 그 해박한 지식을 누구에게도 나눠주지 못하고 속절없이 세상을 떠나 버렸다. 그를 생각하니 가슴이 또 먹먹해진다.
지금은 거의 모든 영화를 마음만 먹으면 볼 수 있지만 그때는 영화를 접할 데라고는 극장과 지상파 TV가 고작이었다. 1969년 9월 17일 첫 방송을 시작으로 45년간 계속된 KBS '명화극장'은 고전 명작영화를 볼 수 있는, 말 그대로 문화의 보물창고였다.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의 주제곡을 편곡한 '타라의 주제'였던 그 시그널 뮤직은 지금 들어도 가슴이 설렌다. 그 음악을 듣고 있노라면 정영일의 낭랑한 목소리가 금방이라도 튀어 나올 것만 같다.
늘 좋은 영화만 방영할 수는 없었다. 때론 태작(駄作)도 섞였는데 그런 경우, 정영일은 별다른 멘트를 하지 않았지만, 정말 최악인 경우 "속물들의 화려한 이야기입니다. 안 보셔도 됩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놓치면 후회합니다""꼭 보셔야 합니다"라는 말이 없다면 사실 그건 '안 봐도 그만'이란 뜻이었다. 필름 속을 꿰뚫어 보는 그의 날카로운 통찰력. 영화에 대한 한없는 애정을 표현하다가도 성에 차지 않으면 독설도 불사했던 고집불통. 나는 그의 말 한마디, 눈빛, 표정 그 모든 걸 좋아했다.
정영일은 '명화극장'과 명절 특선 영화등 모두 900편에 가까운 영화를 소개했다. 생전에 쓴 '명화극장'이라는 글에서 "영화마다 '좋다'고 한 적은 결코 없다. 영화의 좋고 나쁜 대목을 모두 알고 있지만 , 영화를 기다리고 있는 TV관객에게 좋은 점 전하는 것은 상식이고 매너다. 글로 쓰는 영화평과는 다르다. 90초 안에 한 편의 영화를 소개해야 하는데, 보통 세 시간쯤 걸렸다"라고 적었다. 영화를 다시 보는데 2시간쯤 걸렸고, 자료를 찾는데 50분, VTR을 찍는데 10분이 걸린 셈이다.
정영일은 1960년 조선일보에 입사한 후 28년 기자 인생을 마칠 때까지 문화부 기자로 일해왔다. 정영일의 영화평에 거의 빠지지 않고 등장하는게 있는데 그게 '사족(蛇足)'이다. 촌철살인의 그 짤막 한 '사족'이 때론 긴 본문을 압도하는 경우도 있었다. '사족'만으로도 재미있고 깊이 있는 평이 되었고, '사족'이 있어야만 한 편의 영화평이 완성됐다.
인상 깊었던 몇 개의 '사족'을 소개해 본다.
-가느다란 몸으로 나비처럼 춤추며 적을 쓰러뜨리는 이소룡의 무도, 마치 무용 같다. 놓치기 아까운 브루스의 매력. (사망유희)
-관객은 제아무리 강요해도 울고 싶지 않으면 안 우는 반면, 스스로 울고 싶으면 언제고 눈물을 흘리는 '냉정한 동물'이라는 것을 알아주길 바란다.(속 o양의 아파트)
-TV연속극 스토리텔러의 기능을 마치 영화연기로도 통하는 것처럼 오해하고 있는 듯한 J양. 발바닥이 카메라에 비칠 때는 미리 좀 닦으시도록.(꽃순이를 아시나요)
-봐도 그만 안 봐도 그만인 킬링타임용 필름.(하노버스트리트)
-아이디어에는 돈이 안 드는 법인데 우리 영화계도 머리 좀 짜보시면(사형도수)
-제대로 된(?) 집안 처녀 총각이 밤낚시를 가서 물에 젖자 옷 갈아입는 장미희가 이영하더러 천막밖에 나가 있으라고 한 것까지는 좋았으나, 그 직후 텐트 안에서 둘이 껴안고 입 맞추고 뒹구는 것은 무엇인가? 형식적인 절차인가? 한국영화라는 증명인가?(무녀의 밤)
-외화수입쿼터와 달러가 아깝습니다, 아아...(다크나이트)
정영일이 언론사를 떠나면서 쓴 글이 있다. 그가 어떤 기자생활을 했는지 가늠할 수 있을 것이다.
'기자를 한 덕분으로 평생을 만날 수 없는 사람들을 친히 대할 수 있었던 것을 잊을 수 없다. '사운드 뮤직'의 감독 로버트 와이즈. 배우 셜리 메클레인, 글렌 포드, 봅 호프, 질 세인트 존, 원로스타 헬런 헤이즈... 세계적인 첼리스트 로스트로 포비치는 따듯한 형님처럼 '미스터 정'이라고 불렀고, 정상의 현악 사중주단 아마데우스와 철야 통음 하면서 '서울의 찬가'를 합창하던 시간도 이제 소중한 추억이 되었는데, 피아니스트 루빈스타인과 바이올리니스트 아이작 스턴의 '큰 손'의 감촉을 잊을 수 없다' ('정년퇴임 날에...' 중에서)
매미 울음을 하도 듣다 보니 요즘 방음이 완벽한 곳에서도 소리가 들린다. 환청이다. 나는 그리움도 그렇다고 본다. 완벽하게 잊었다고 생각했는데 , 시도 때도 없이 튀어나오는 그리움. 누구를 잃는다는 것. 특히 선지자가 사라졌을 경우, 범인(凡人)은 가야할 길을 물어 볼 곳이 없어 방황하는 경우가 있다. 그건 나이와 상관없다. 애나 어른이나 늙은이나 마찬가지다. 지금 내가 그렇다. 한동안 길을 잃고 서성거리고 있다. 그럴 나이라고 남들은 말하지만, 정말 그럴까. 폭염이 쏟아지는 광야에 혼자 서 있는 나를 발견하곤 한다. 그래서 정영일이 이리도 그리운 것일까.
사족: 청룡영화상에 정영일영화평론상이 제정되어 네 명의 수상자가 나왔었다. 그런데 누군가 조선일보가 우파언론이라며 청룡영화상 정영일영화평론상 수상을 거부했다고 한다. 그 후 상은 중단됐으며 아직도 복원하지 못하고 있다. 우리 영화계의 고질적인 이념갈등의 한 단면이다. 그게 못내 아쉽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