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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들의 삼촌 브루스 리

무술인 이소룡

by 명랑낙타



아직도 나는, 1973년 그 뜨거웠던 여름밤을 잊지 못한다. 영화광이던 친구(그는 지금도 몸에 군더더기가 하나도 없이 오직 근육만 있다)와 눈꼽만큼의 사전 정보 없이 들어간 영화관은 '금연'이란 말이 무색하게 담배연기가 자욱했다. 심각한 영화인가? 좌석제가 아닌 이유도 있지만 그래도 관객이 이미 반이 훨씬 넘게 채워져 있었다. 대부분이 두번 보고 있는 듯 했다. 뭐 대단한 영화라고? 그때까지만 해도 우리는 그렇게 생각했다.


영화가 시작되면서 우리는, 조금씩 벌어진 입을 다물지 못했다. 처음 들어 보는 이름. 이소룡. 그가 스크린을 압도하고 있었다. '외팔이'시리즈의 왕우 와는 달라도 한참 달랐다. 편집도 매끈했다. 무엇보다 이소룡이, 그의 몸짓이, 그의 포효가 나와 내 친구의 정신을 무너뜨리고 있었다. 그럼에도 좌석이 영화도 시작되기 전에 가득 채워졌는지. 왜 담배연기가 안개 낀 장충단 공원처럼 자욱했는지는 알아채지 못했다.


나와 친구를 경악하게 한 것은 맨 마지막 장면이었다. 영화가 끝나자 사진 한 장이 스크린을 채웠다. 아마도 아내, 아들과 함께 찍은 가족사진으로 기억된다. 거기엔 이런 설명이 붙어 있었다. '배우 이소룡은 네 편의 영화를 남기고 지난 7월 20일 뇌출혈로 사망했다.' 그다음 몇 문장이 더 있었는데 기억이 나지 않는다. 이미 우린 멘붕 상태에 빠져 있었다. 방금 스크린 위에서 괴성을 지르며 날아다니던 이소룡, 쌍절곤이라는 이상한 무기를 기막히게 휘두르며 적을 쓰러뜨리던 브루스 리가 이미 이 세상 사람이 아니라는 사실에, 우리는 크게 좌절했다. 영혼이 이렇게 탈탈 털리는 거구나... 를 나는 그때 처음 깨달았다. 영화 시작 전 가득 채워진 좌석, 자욱한 담배연기. 이유가 있었다. 친구는 한번 더 보자고 했지만 나는 그냥 나가자고 했다.


친구와 동네까지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걸었다. 마치 꿈을 꾼 것 같았다. 지금은 아무리 감동적인 영화를 보아도 그 감흥이 하루를 넘기지 못한다. 그때는 달랐다. 아마 내 또래들은 모두 기억하고 있을 것이다. '정무문'을 본 후, 우리가 어떻게 달라졌는지를. 내 친구는 당연히 쿵후 도장으로 향했고, 나는 조잡하게 만든 쌍절곤을 구해 들고 머리통에 수많은 혹을 만들며, 괴성을 지르고 온 동네를 돌아다녔다. 골목길 여기저기에 코를 만지며 '아뵹~~'을 외치며 뛰놀던 아이들을 쉽게 볼 수 있었다. 이소룡 열풍이었다.


지금처럼 정보가 넘치지 않던 시절, 그의 사진 몇 장을 구하기 위해 여기저기를 온통 뒤지기도 했다. 일본 영화 잡지 '스크린'과 '로드쇼'를 찾아 헌책방도 들락거렸다. 갑자기 이소룡이 없는 세상이 무의미해 지기도 했다. 어린 나이지만 공허했고, 슬펐다. 불과 두시간, 그것도 극장안에서 만난 영화 주인공과 어떻게 이토록 친밀해 질수 있는 것일까. 친 삼촌이 죽었어도 이렇게 슬프지는 않았을 것이다.


오늘은 우리의 영원한 삼촌 이소룡, 브루스 리가 별이 된 지 53년이 되는 날이다. 1973년 7월 20일. 그때 그의 나이는 겨우 서른셋. 여전히 눈매가 푸른 나이였다. 훗날 알았지만 사인은 뇌부종이었다고 한다. 우리는 몰랐지만, 홍콩과 할리우드는 발칵 뒤집어졌던 모양이다. 그가 사망한 곳이 여배우의 집이었고 범죄조직이 연루됐다는 소문이 돌기도 했다. 그를 둘러싼 죽음은 여전히 미스터리다. 오랜 시간이 흘렀지만 당장이라도 "도와줘요 멀더! 스컬리!"를 외치고 싶은 심정이다.



그는 네 편의 영화에 출연했다. 원래는 당산대형(71년), 정무문(72년), 맹룡과강(72년), 용쟁호투(73년) 순으로 제작됐는데 우리나라엔 '정무문'이 먼저 선을 보였다. 첫 개봉은 1973년 7월 27일 피카디리 극장이었다. 전국 동시상영이 흔하지 않은 탓에 지방에는 몇일의 간격을 두고 상영됐을 것이다. 내가 살던 동네는 아마도 8월 초순쯤이었을 것이다. 그가 사망했을 때 촬영 중이었던 '사망유희'는 대역을 써서 어설프게 짜깁기해 1978년 상영됐다. 나는 그래도 좋았다. 우리의 삼촌 브루스 리가 그 유명한 노란 운동복을 입고 악당들을 통쾌하게 넘어뜨렸으니까. 아니 그렇게라도 그의 모습을 다시 볼 수 있었으니까.


사족. 이소룡이 하늘의 별이 된 후, 그를 추모하는 많은 영화들이 제작됐지만 그 어느 것도 내 마음을 흔들지 못했다. 그러다 '말죽거리 잔혹사'를 보고 내 가슴은 요동쳤다. 역시 너였구나! 유하.


지금도,아니 앞으로도 '말죽거리 잔혹사'가 '유하의 이소룡 헌정 영화'라는데 내 생각엔 변함이 없을 것이다. 유하는 충분히 그런 생각을 갖고 영화를 만들었을 것이다. 요즘도 '말죽거리 잔혹사'를 1년에 한두 번은 다시 본다. 그때마다 가슴은 뜨겁다. 내 영원한 사랑 브루스 리. 기억에 남는 맨 마지막 장면, 성룡의 '취권' 상영관 앞에서 그들의 대화.


"아직 취권도 안 보고 뭐 했냐"

"별로일 거 같은데"

"아이, 내 말 믿고 한번 봐봐. 인마"

"이소룡 영화보다 재밌냐"

"야, 이소룡이 게임이 되냐"

"웃기지 마 그래도 이소룡이지. 씨"

"이소룡 한 물 갔지. 색햐"

"이소룡이지. 색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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