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리운 오주석 형
어느 날 문득, 전기에 감전된 듯, 주체할 수 없는 그리움이 마구 솟구칠 때가 있다. 그것은 아주 오래전 보았던 평택평야의 노을 일 수도 있고, 첫사랑의 연인일 수도 있고, 초등학교 3학년 담임 선생님일 수도 있고, 사춘기 학교 가는 길에 늘 마주쳤던 이름 모를 소녀일 수도 있다.
내겐 오주석 형이 그런 경우다. 내가 주석이 형을 처음 본 건 35년 전 수원 팔달산 시민회관에서 열렸던 대학생 동아리 음악회에서였다. 그때 형은 기타로 슈베르트의 '밤과 꿈'을 연주하고 있었다. 지금도 그걸 들으면 긴 머리에 고개를 푹 숙이고 열정적으로 연주하던 형의 모습이 떠 올라 견딜 수가 없다. 그리고 몇 년 후, 피아니스트 잉그리드 헤블러 독주회가 호암아트홀에서 있었다. 모차르트의 대가답게 모차르트가 건반 위에서 그녀에 의해 놀고 있었다. 연주가 모두 끝나자 누군가 좌석에서 벌떡 일어나 열렬히 박수를 쳤다. '브라보!'와 함께. 다름 아닌 주석이 형이었다. 주석이 형은 클래식을 정말 사랑했다.
그런 주석이 형과 마침내 단 둘이 대화를 나눈 것은 용인 호암미술관에서였다. 그때 주석이 형은 그곳에서 연구원으로 있었고, 직장일 때문에 찾아간 형을 만나 이런저런 얘기를 하던 중, 우리가 여러 인연으로 겹치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 후 공교롭게도 내가 살던 아파트에 주석이 형이 이사를 왔다. 복도식 아파트라 203호에 살았던 나는 201호의 형집 앞을 거의 3년을 지나다녔다. 가끔 양쪽 집을 오가며 술자리가 벌어지곤 했는데 음악과 미술 이야기를 하다 보면 시간 가는 줄을 몰랐다. 형은 파바로티가 부른 카루소를 좋아했다. 신청곡을 받으면 '카루소'였다. 우린 깊은 밤 음악을 들으며 많은 이야기를 나눴다. 형이 수원 매산로 본가로 옮기면서 만남은 끊겼다. 그 후 형은 단원 김홍도 연구로 일가를 이루었고, '한국의 美 특강'을 시작으로 우리 미술의 아름다움을 알리는 최고의 전도사가 되었다. 형이 박사학위 논문이 단행본으로 출간되었을 때 사인을 해서 수줍게 내게 건네던 생각이 난다. 주석이 형은 김홍도를 정말 사랑했다.
그러던 2005년 2월 7일 자 신문에는 무심한 사람들의 눈에는 그저 스쳐 갈 부고 기사가 귀퉁이 한쪽을 차지하고 있었다. '수원출신 49세 소장 미술사학자 오주석(吳柱錫) 별세'. 난 생전 그렇게 슬픈 부고기사를 본 적이 없어다. 세상에... 생전 주석이 형은 변변한 직함 없이 언론의 조명도 제대로 받지 못하고 '진흙 속의 진주'인 채로 젊은 생을 마감했다.
주석이 형의 저서 '오주석의 한국의 美 특강'을 꼼꼼히 읽은 사람들은 그의 이력 중 '2005년 2월 5일 백혈병으로 별세'라는 마지막 글귀에 이르면 백이면 백 "아!"라는 탄식을 내뱉게 된다. 그 소리가 크면 클수록 그는 이 책에 흠뻑 빠진 사람이다. 그날 밤 그는 오주석의 생애가 궁금하고 "왜 내가 그의 강의를 한 번도 들어보지 못했을까"라며 잠을 설칠지도 모른다. 지금도 유튜브에 떠다니는 형의 강의를 들으면 탄성이 절로 난다. 주석이 형을 알고 있는 사람들이 "오주석이 살아 있다면 유홍준은 저렇게 구라를 칠 수 없었을 것"이란 농담을 자주 했다.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김홍도의 '씨름'에 대한 주석이 형의 설명은 이렇다. '등장하는 사람은 모두 22명인데 오른쪽 위의 중년 사나이를 보세요. 입을 헤 벌리고 재미있게 보고 있죠? 재미있으니까 윗몸이 쏠렸죠? 그 옆 장가든 친구는 씨름판에 오자마자 팔베개를 했군요. 씨름판이 막바지에 다다랐다는 얘기죠. 왼쪽 관람객 중 부채로 얼굴을 가리고 있는 자는 갓도 삐딱하게 쓰고. 하여간 성격도 소심하고 영 시원치 않죠?' 전혀 들어 본 적이 없는 이런 해설에 일반 독자는 말할 것도 없고 전문가들도 열광했다. 이런 분석을 그 누구도 한 적이 없어 더욱 그렇다. 입에서 입으로 알려진 이 책은 스테디셀러가 됐다. 하지만 우리는 앞으로도 이런 해설을 다시는 듣지도, 보지도 못한다. 유튜브에 돌아다니는 몇 편의 강연 영상으로 형에 대한 그리움을 달랠 수밖에 없다.
다행히 수원시의 배려로 수원 행궁 공방거리에 오주석을 기리는 열린 문화 공간 '後素'(후소)가 2018년 문을 열었다. 후소는 주석이 형의 호다. 건축가 김석철이 설계한 건물 2층에는 '오주석의 서재'를 꾸며놨다. 그나마 49세에 요절한 형을 위해 그런 공간을 만들었다는 게 얼마나 다행인 줄 모른다. 나는 주석이 형이 그리우면 가끔 그곳을 찾는다. 비가 내리는 날에 가면 더 좋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