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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명랑낙타 Aug 13. 2024

'쑥고개'작가 박석수를 아시나요

 박석수를 그리며 

 내가 박석수를 처음 본건 1987년이었다. 공적인 일로 전화가 왔고 우리는 만났다. 먹물을 갈아 넣은 것 같은 진한 눈썹이 인상적이었다. 시인으로 등단, '쑥고개'등 몇 권의 시집을 냈지만  최근 소설을 쓰기 시작했다고 했다. 그러면서 소설 '철조망 속의 휘파람'을 보여 준것 같다. 


 그때 박석수는 한겨레출판사(신문사 한겨레가 아님)에서 편집 주간일을 맡고 있었다. 사장님이 훌륭한 분이라 많은 편의를 봐준다고 했다. 건강이 그렇게 좋아 보이지 않았다. 박석수의 고향은 한 때 '쑥고개'라고 불리던 송탄이었다. '쑥고개' 지명과 관련해 고향의 또래들과 약간의 갈등이 있었던 것 같았고 그에 대해 박석수는 힘들어 했던 기억이 난다. 건강이 점점 악화하면서 한겨레를 그만 두고 푸른숲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연락이 왔다. 여러가지 어려움을 겪고 있던 그를 나는 멀리서 지켜 보기만 할 뿐, 뾰족하게 도와줄 방법이 없었다.


 나는 박석수를 위해 지역신문에 소설을 연재할 수 있도록 연결해 주었다. 그것이 경인일보에 연재한 '로보의 달' 이다. 선정적으로 써달라는 편집자의 간곡한 주문에도 불구하고 박석수는 개의치 않았다. 나 역시 선정 소설을 쓰겠다는 당초 계약을 위반했으니, 연재를 중단하던가 선정적으로 쓰던가 둘중 하나를 택하라고 협박(?)했지만 천성이 착한 박석수는 결국 '뜨거운 정사'를 쓰지 못했다. 가끔 독자의 항의가 있었으나  거의 1년을 버티고 버텼다. 몸이 아파 한달간 연재를 중단 한 적도 있었다. 신문사 입장에선 말도 안되는 대형사고였으나 무던한 편집국장과 무딘 문화부장이 있어 가능했다. 매월 꼬박꼬박 지급되는 원고료가 생활에 큰 보탬이 됐다고 연재 마지막 날 전화 통화에서 박석수는 처음으로 고백했다. 우리의 만남 거의 끝자락에 이런 고백을 한 것을 나는 '작가의 자존심'이었을 거라고 지금도 생각한다. 


 연재가 끝난 후 한달쯤 지났을때 박석수에게 편지가 왔다. 단행본을 내려고 하는데 원고 몇개가 누락됐으니 찾아서 보내달라고 했다. 울컥하며 읽었던 편지는 결국 말미에 이르러 애써 참던 눈물이 터졌다.


 '나는 요즘 병원에서 지어준 약을 먹고 방에 누워만 있자니 자꾸 하체의 힘이 빠져 힘들게 버티고 있습니다. 내가 살아 있는 동안 이 은혜에 과연 보답하고 갈 수 있을지는 아직 모르겠습니다. 그러나 잊지는 않겠습니다.안녕히 계십시오 1989.10.13 밤에'


'안녕히 계십시오'라는 문장이 너무도 슬펐다. 그리고 7년동안 박석수는 병마와 싸웠으나 1996년 9월 12일 영면했다.


  그 후 박석수는 우리 문단뿐만 아니라 고향 송탄에서도 완전히 잊혀진 존재가 되었다. 심지어 2017년 11월2일자 경인일보에 ' "무연고 묘인줄" 누워서도 외로운 시인 박석수'라는 기사가 실렸다. 천주교 용인 공원묘지의 그의 무덤이 20년간 아무도 찾지 않아 봉분이 망가지고 마침내 무연고 묘로 지정됐다는 기사였다. 죽어서도 철저하게 잊혀진 박석수. 그나마 송탄 지역의 몇몇 인사들에 의해 이런 사실이 밝혀지면서 마침내 박석수에 대한 재조명이 이뤄지기 시작했다. 박석수 문학을 재조명하는 세미나가 열리고 박석수의 문학비가 세워졌으며  문학관 건립도 이뤄질 것으로 보인다.


 고향은 서로 다르지만 같은 지역에서, 나는 중학교 박석수는 고등학교를 다녔다. 학교 재단이 같아 교가 역시 같다는 것에 대해 우린 신기해 했다. 가끔 술을 먹으면 둘이 '하느님~'으로 시작되는 교가를 부르며 울다가 웃었다. 쑥스러워 하며 미소만 짓던 그의 모습이 지금도 눈에 잡힐 듯 선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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