어느 날의 수제버거, 그리고 '청시행'에 대한 단상

청춘의 시작은 행복!

by 권환준
내비게이션을 거역한 어느 날, 남양주 한강변의 수제버거 가게에서 ‘청시행(청춘의 시작은 행복!)’이란 문구를 만났다. 행복을 성공의 대가로만 여겨온 지난 여정을 돌아보며, 지금 이 순간의 만족이야말로 새로운 시작을 위한 가장 좋은 연료임을 깨달았다. 거창한 목표가 아닌, 담백한 현재의 행복에서부터 두 번째 청춘을 시작하려는 한 남자의 단상을 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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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느 날의 수제버거, 그리고 '청시행(청춘의 시작은 행복)'에 대한 단상


별다른 계획이 있던 건 아니었다. 빽빽한 일정표에 드물게 찾아온 빈칸을 견디지 못하고 무작정 핸들을 돌렸다. 강변북로를 타고 가다, 이정표 하나에 이끌려 들어선 남양주의 한적한 길. 도시의 소음이 멀어지고 차창 밖으로 익숙하면서도 낯선 풍경이 스쳐 지나갔다.


목적 없이 얼마나 달렸을까. 강물이 한눈에 들어오는 자리, 말쑥한 흰색 건물이 눈길을 붙잡았다. '수제버거'. 점심 끼니를 놓친 터라 별 고민 없이 주차장으로 차를 밀어 넣었다.


가게 내부는 군더더기 없이 깔끔했다. 무엇보다 압도적인 것은 통창 너머로 펼쳐진 한강의 풍경이었다. 일종의 액자였다. 수십 년간 내 삶의 배경처럼 도시를 관통하며 흘렀을 저 강물이, 그날따라 유독 생경한 모습으로 내 앞에 펼쳐져 있었다.


적당한 자리에 앉아 대표 메뉴로 보이는 버거를 주문했다. 잠시 후 지글거리는 소리와 함께 고소한 냄새가 주방에서부터 흘러나왔다. 평생을 경쟁과 효율의 언저리에서 살아온 탓일까. 음식을 기다리는 이 짧은 시간이 어색하면서도 나쁘지 않았다.


곧이어 두툼한 버거가 나왔다. 번이며 패티, 채소까지 제법 실하게 생긴 모양새가 마음에 들었다. 특별한 격식 없이 버거를 두 손으로 움켜쥐고 한입 크게 베어 물었다. 시장기가 반찬이라지만, 제법 괜찮은 맛이었다.


그렇게 몇 입 정신없이 먹다 시선이 테이블 위 냅킨 홀더에 머물렀다. 나무로 된 작은 판에 '청시행(靑始幸)'이라는 한자가 새겨져 있었다. 아래로는 '청춘의 시작은 행복!'이라는 작은 한글이 적혀 있었다.


순간, 헛웃음이 터져 나왔다.


'청춘의 시작은 행복'이라니. 내가 기억하는 청춘은 그런 낭만적인 단어와는 거리가 멀었다. 나의 이십 대, 삼십 대는 증명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남들보다 뒤처지면 안 된다는 강박, 가장으로서 짊어져야 할 의무, 세상이라는 거대한 기계 속에서 쓸모 있는 부품이 되어야 한다는 압박감.


행복은 그 모든 과정을 완수한 뒤에나 주어지는 일종의 보상이라 믿었다. 시작부터 행복을 논하는 것은 사치이자 나태라고, 그렇게 스스로를 다그치며 반생을 살아왔다.


그런데 이 버거 가게 주인은 대뜸 시작이 행복이라고 말한다. 얼마나 무책임하고 순진한 말인가. 처음엔 그런 생각이 들었다.


하지만 유유히 흐르는 강물을 배경으로 그 문장을 다시 곱씹어보니, 어딘가 막혀 있던 속이 뻥 뚫리는 기분이 들었다. 행복을 목적지로 설정해 놓고, 현재의 모든 순간을 그 목적지로 가기 위한 과정으로만 소모해 온 것은 아니었을까. 행복이라는 트로피를 얻기 위해 정작 행복을 느낄 수 있는 수많은 '오늘'을 외면해 온 셈이다.


생각이 여기까지 미치자, 눈앞의 버거 맛이 다르게 느껴졌다. 이것은 단순히 허기를 채우는 음식이 아니었다. 지금 이 순간, 내가 온전히 누릴 수 있는 구체적인 행복의 한 조각이었다.


잘 구워진 패티의 육즙, 신선한 채소의 아삭함, 창밖으로 들어오는 따스한 햇살, 그리고 이 모든 것을 누릴 수 있는 시간적 여유. 이 모든 것이 모여 '행복'이라는 감각을 만들어내고 있었다.


문득 깨달았다.


'청춘'이란 나이의 문제가 아닐지도 모른다. 무언가를 새로 시작하려는 마음만 있다면, 쉰을 넘긴 나이라도 청춘일 수 있다. 그렇다면 나의 두 번째 청춘은 바로 이 순간부터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그리고 그 시작은 '무엇을 이뤄야 한다'는 비장함 대신, '지금 이 순간 행복하다'는 담백한 만족감으로 채우는 것이 맞을 것이다. 행복을 연료 삼아 나아가는 삶. 그것이 이 버거 가게가 내게 건넨 진짜 메시지였다.


그날, 나는 꽤 오랜 시간을 그곳에 머물렀다. 버거 하나로 시작된 생각은 지난 삶의 궤적을 돌아보게 했고, 앞으로 살아갈 날들의 방향을 가늠케 했다.


거창한 깨달음은 아니었다. 그저 '시작은 행복이어도 괜찮다'는, 어쩌면 당연한 사실을 뒤늦게나마 알게 된 것이다.


가게를 나서며 '청시행'이라는 세 글자를 다시 한번 마음에 새겼다. 도시로 돌아가는 차 안, 마음이 전보다 한결 가벼워져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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